글쓰기로 WWW 시대를 따라가기

  

이선영(미술평론가)

  

1990년대 중반, 서른이 넘어서야 컴퓨터와 인터넷을 접한--그것도 웹진으로 전환된 [미술과 담론]에 참여하기 위해 마지못해--나는 그 이후로도 나날이 발전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업그레이드되는 속도와는 관계없이 최소한의 요구만을 따라가며 살았다. 따라가기 란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투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계열이어서 학교 때 양측 면에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출력물이 나오는 플로차트 그리는 것부터 배웠지만, 컴퓨터의 원리를 배우는 것과 관련 기계를 애용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 같다. 유아기 때부터 컴퓨터와 놀았던 세대나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같은 부류에 비하면, 나는 그 반대편에 있는 셈이다. 컴퓨터 자판이 일반화되기 전, 20대 후반부터 미술관련 글을 쓰기 시작한 나는 붉은 선으로 칸이 나뉘어진 200자 원고지에다 또박또박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도 깔끔한 친구들은 워드프로세서를 활용하곤 했지만, 컴퓨터와 호환이 잘 안 되는 등 문제도 많았다. 



필사하는 중세의 수도승


아직도 잡지사나 출판사 같은 곳에서 원고청탁이 올 때 단어숫자가 아니라, ‘200자 원고지 OO매’ 하는 식인 것을 보면, 옛날식의 글쓰기에 관련된 방식이 흔적으로 남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원고지에 글을 쓰다가도 생각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처음에 연필로 쓴 다음에 다시 볼펜으로 쓰는 수고, 그리고 참고문헌을 인용하기 위해 손으로 일일이 베껴 쓰고 오려서 풀로 붙여 글쓰기를 위한 기본 자료를 만드는 미련한 과정은 나만 겪었을지 모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러한 방식은 나름대로 ‘구조주의’적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구조주의와 예술은 모두 자르기와 결합이라는 두 가지 전형적인 조작에 의해서 정의되는데, 여기에서 우주는 하나의 글쓰기, 텍스트, 또는 기호의 의미망으로 간주된다. 현대의 예술작품 역시 레비스트로스가 프루스트의 작품에 대해 코멘트 했듯이, 재단사와 같은 방식으로 작품 속에서 각 단편들을 접합하고 서로 이어 놓곤 한다. 


‘풀과 가위로 만들어진’ 작품은 자연 또는 자아라는 씨앗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자라나거나 창조된다는 낭만주의적 사고를 벗어난다. 물론 텍스트는 개인의 자연스러운 욕망에 의해 시작되고 추동되지만, 누에고치나 거미줄에서 줄이 뽑히듯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선행 텍스트들 간의 상호적 관계로부터 나오는 인공적 과정이다. 선행 텍스트들로 갈갈이 해체될 위험이 있는 ‘구조적’ 방식의 극단화가 ‘인용문만으로 이루어진 책’(수잔 손탁)이나 엄청난 각주들로 글의 무게를 가늠하는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알고 있던 것도 ‘객관적’ 전거를 대야하는 ‘실증주의’적 방식과 무원칙적인 자료의 나열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습과정에서 전형적인 텍스트의 조직화의 능력도 한눈에 파악되고 읽혀지길 원하는 사이버 문화에서는 ‘스크롤의 압박’으로 간주되며, ‘3줄 요약’이나 몇 개의 키워드로 환원되어야 하는 신세가 된다. 


전거를 꼼꼼하게 대가며 길게 쓴 내용은 언젠가는 참고하겠지만 일단은 읽혀지지 않으며, 결국 영원히 안 읽혀지는 방식은 정보가 넘쳐나는 사회에 와서 만연한다.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했다고 하지만 지식인들의 위상이 더 단단해 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펙터클의 시대가 왔다고 해서 미술인들의 위상이 더 높아진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자신의 사고를 충분히 전개해 가면서 길게 쓰여진 내용을 축약한 것과 아예 지식과 정보의 소비를 겨냥하고 짧게 쓴 패턴 화 된 글과는 차이가 있다. 사이버 세상이 와서 지면에 한정되지 않고 글과 작품을 보여줄 수 있다는 기대와 달리, 더 ‘간편한 스타일’을 요구받는 것은 빈번하다. 그러나 스타일링을 하는 과정은 비슷하다. 별 것 아닌 내용에 선정적인 제목을 붙여 낚시질하기, 텍스트와는 무관한 이미지로 화려하게 장식하기 등등. 편집자 스스로도 독자들이 긴 본문은 읽어보지 않을 것이라는 예단아래 글도 이미지처럼 그저 보기 좋게 편집하는 경향 등...이러한 압박이 음으로 양으로 텍스트나 작품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의 중세적 필사가

  

처음부터 ‘사이버 세상’에서 태어난 세대와 달리, 나는 한세대—통상적으로 30년을 기준으로 하는—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에 텍스트가 생산, 유통되는 극적인 방식을 체험했다.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원고지가 아닌 파일로 원고를 마감하기 시작한 이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손으로 먼저 쓰고 컴퓨터로 옮기는 과정을 지속했던 것 같다. 최초의 자료에 대한 변형은 그것을 손으로 그대로 옮겨 쓰는 과정이 힘들었기 때문에 야기되었다. 글쓰기라는 정신노동의 상당부분이 육체노동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20세기의 필자 역시 중세의 필사가 못지않았던 셈이다. 그리고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서 중세적 필사가가 근현대적 과정을 거치고 다시 중세를 닮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글쓰기를 하고 있다. 내 세대는 개체발생 속에 계통발생을 되풀이한 셈이다. 학창시절이었던 1980년대는 자료 찾기도 만만치 않아서, 외국 문화원같은 곳에 직접 찾아가서 구한 아트 인덱스를 따라 여러 대학에 흩어져 있는 잡지들을 복사해오는 수고 등이 나중에는 컴퓨터로 한 큐에 해결 되는 획기적인 변화를 겪었다. 



뒤러, [연구에 몰두하는 제롬], 1514년.


마치 컴퓨터가 나 같은 종족을 위해 발명된 것처럼 느껴질 만큼, 자료 검색, 수집, 복사, 편집, 나중에는 발표에 관련된 편리함을 누렸지만, 20여 년 간 매체계의 변화는 멀미가 일어날 만큼 크게 다가온다. 어쩔 수 없는 단계가 되서야 비로소 움직이는 굼뜬 소비자를 닦달하는 시스템의 힘은 더욱 커지고 있다. 아직도 정보를 소비하는 자로서의 나와 (나름대로)정보를 생산하는 자로서의 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음을 느낀다. 컴퓨터가 아니더라도 생산/소비의 간극은 있을 수 있는데, 컴퓨터 자체가 속도와 복제라는 면에서 압도적인 측면이 있는 만큼 괴리는 크다. 글(작품)을 읽는(보는) 것보다 쓰는(만드는) 것에 몇 십 배의 시간과 노력이 더 들어가지만, 다른 문화 상품과 달리 대량 소비될 수 없는 한계 때문이다. 가끔 작가들의 홈페이지도 둘러보지만, 재기발랄한 작가에게도 인터넷은 아나로그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적 작업이 끝난 다음, 나중에야 오는 자료창고 정도에 머물러 있음을 본다. 


만약에 그 반대의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그는 작품보다는 포장에 열을 올리는 작가일 것이다. 글을 전문으로 하는 문인들의 경우도 인터넷에서의 담론활동을 소모적으로 여기곤 한다. 수년전 모 싸이트에서 재미있게 놀던 시절, 웃긴 고양이사진 한 장만 올려도 하루에도 클릭 수가 수천 건 넘어가곤 했지만, 며칠 동안 골머리를 썩혀가며 쓴 미술 사이트의 글 클릭 수가 얼마 되지 않아 문화와 예술 간의 괴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 어쨌든 몸으로 체감되는 변화로서는 텔레비전, 신문, 잡지 같은 기존 미디어의 중심이 산재된 점. 그러나 지금 잡초처럼 번성하고 있는 수많은 인터넷 언론매체들의 상태를 볼 때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부작용도 커졌다는 점이다. 잡지 같은 매체는 이미 인터넷 등에 신속한 정보전달에 뒤지는 만큼 심층 취재나 내용물이 요구되지만, 아직 그러한 요구를 충분히 담고 있지 못하는 형편이다. 읽히는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면, 종이 잡지의 활로는 불투명하다. 웹진은 중간 정도의 위치에 있는 듯하다. 


웹진은 넘쳐나는 여러 가지 볼거리로 주의가 산만한 네티즌과 뭔가 진지한 것을 요구하는 독자 모두를 상대로 한다. 금방 다른 곳으로 클릭할 수도 있는 이들의 관심을 어느 정도 붙들어놓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어떤 필자나 편집자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다(多) 중심성, 접근성, 익숙함 등은 인터넷의 장점이다. 우리의 몸은 손수 자료를 정리하고 찾는 수고 대신에, 컴퓨터 앞에 먼저 앉게 적응되었다. 이젠 책상 위의 컴퓨터도 한물가고, 손안의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으로 안 보이는 것은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와의 만남이나 작품의 직접 관람을 대치하는 검색, 웹상에서 긴 텍스트를 숙독할 수 있는 집중력의 저하, 생산자보다 재생산자의 논리가 더 강조되는 점은 작품과 담론에 유리한 상황만은 아닌 듯하다. 그러나 정보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예술이나 담론 역시 이에 상응하는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알고 보면 정보화도 예술 역시 그 뿌리를 대고 있는 자연의 법칙과 관련된다. 



20세기초 프랑스인이  상상한 서기 2000년 미래의 모습


A.L. 바라바시는 [링크]에서 우리의 생물학적 존재, 사회적 세계, 경제, 그리고 종교적 전통들의 상호연관성을 말하며,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다’(보르헤스)고 인용한다. 저자는 여러 가지 지도들을 나란히 놓았을 때, 이 다양한 지도들이 공통의 청사진에 따르고 있음을 말한다. 경제. 세포, 인터넷 등과 같이 매우 상이한 시스템들 간에는 그물망적(Web-based)이라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인터넷 역시 인간의 창조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유기체나 생태계와 가깝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링크]에 의하면 유 무선으로 연결된 컴퓨터들, 생화학적 작용에 의해 연결된 우리 몸속의 분자들, 거래행위에 의해 연결된 기업들과 소비자들, 축색돌기들에 의해 연결된 신경세포들, 다리에 의해 연결된 섬들, 이 모든 것들은 그래프, 즉 링크들에 의해 연결된 노드들의 집합이다. 이처럼 고도로 상호 연결된 삶의 그물망으로부터 그 어떤 것도 배제되어 있지 않다. 네트워크라는 동적인 시스템 속에서 예술과 그에 관련된 담론은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단지 외부적인 압력인가, 아니면 현대예술의 내적인 변모와 이미 맞물려 있는 것인가. 

    

텍스트, 또는 그물망적 세계

   

미디어 이론가인 마크 포스터의 [뉴 미디어의 철학]이 주장하는 ‘정보양식’은 이전의 대면적이고 구어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의 시대와 인쇄를 매개로 글로 씌여진 의사소통의 시대 이후에 도래한 전자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의 시대의 양식을 말한다. 마크 포스터에 의하면 각 단계마다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의사소통 수단은 상징적 유사물, 기호의 재현, 정보적 시뮬레이션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 자연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는 것은 데이터 뱅크이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 조건]에서, 데이터 뱅크는 포스트모던 시대 사람들의 자연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권력의 강화와 정당화는 자료저장과 이용력, 그리고 정보의 작동효과에 달려있다. 리오타르가 가정하는, 원칙적으로 모든 전문가가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완벽한 정보게임에 의해 지배되는 포스트 모던적 지식의 세계에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리오타르에 의하면 능력이 똑같다면, 여분의 수행성은 결국 상상력에 달려있다. 상상력은 게임 참여자가 새로운 수를 두게 할 수 있고, 게임 규칙을 바꾸게 할 수 있다. 


예술은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언어’(블랑쇼)라는 점에서, 사이버 세계에도 예술의 자리는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현실이 아니라 가능성으로만 있는 듯하다. 정보화된 제2의 자연에서 태어난 세대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는 이 게임에서 상동성보다는 이질성을 중시하는 예술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 게임에서 예술이 고무하는 차이의 감각은 중요하다. 다나 해러웨이는 ‘자연의 재발명’이란 부제가 붙은 책에서, 정보 발생 및 처리 체계는 내적으로 차별화된 기표들의 이론에 새겨지며, 미메시스로서의 재현 학설들과는 거리가 먼 포스트모던 대상이라고 말한다. 다나 해러웨이에 의하면, 재현은 시뮬레이션으로, 유기체는 생물의 구성요소와 코드로, 미메시스는 기표들의 유희로, 깊이와 원상 그대로의 상태는 표면과 경계로, 완전성은 최적화로, 기능적 전문화는 모듈과 구성으로, 생식은 복제로, 개체는 복제 단위로, 자연/문화 는 차이의 장으로, 정신은 인공지능으로. 포스트 모던적인 몸은 유동적이고 분산된 명령-통제-정보 네트워크의 명령을 받는 의사소통 체계로 작용된다. 



사물까지 확장된 인터넷의 이미지


이렇게 텍스트화 된 포스트 모던 세계에서, 텍스트를 파악하는 것은 ‘진리를 찾아내는 논리적인 진행이 아니라 의미의 구축화 과정’(바르트)이 된다. 텍스트가 만들어지고 상호 엮여져 가며 만들어내 생성의 개념은 기성의 체계를 재현하는 과정보다 더 중요하다. 텍스트로서 세계와 작품을 보는 것은 역동적 변형 가능성에 방점을 찍는다. 전통적인 의미의 작품 대신에 텍스트를 강조했던 바르트에 의하면, 텍스트는 무한한 구조가 있으며, 복수 언어적이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현실도 더 이상 질서 있고 안정된 구조가 아니라, ‘상호 관련된 복합적인 리얼리티의 그물망’(퍼트리샤 워)으로 여겨진다. 현실 역시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우리를 벗어나는 붙잡을 수 없는 것’(블랑쇼)이다. 텍스트는 단선적인 논리를 향해 흘러가지 않는다. 데리다에 의하면 텍스트는 원초적인 것이 존재하지 않고 불완전한 원초적인 것을 대신하는 보충만이 있을 따름이다. 


현대의 후기 구조주의적 사유에 의하면, 서술은 더 이상 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표면이 되고 통일성과 의미는 표면을 확장하는데서 나타나는 것이지, 표면 밑에 놓여있는 유일한 원리를 발견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닫혀있는 단선적 지식, 또는 정보가 아니라 열려있는 텍스트의 세계이다.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말도 있듯이 열림은 상호적이다. 텍스트는 네트워크와도 같다. 텍스트는 선행 언설들로 짜여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문화의 모든 것과 관련된다. 현대미술과 담론에 이미 와있는 이러한 현실을 보다 활성화시킴으로서 미술을 닫혀있는 하나의 계에 한정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소비)문화에 의한 예술의 죽음이나, 고립된 영역에서 예술의 순수성과 우월성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양자 간의 불필요한 선택을 대신하는 문화와 예술의 상호적 변형을 요구한다. 인터넷은 이러한 상호적 변형의 장(場)으로, 예술은 문화에서 소(유)통의 측면을, 문화는 예술에서 질적 차원을 공급받아야 할 것이다. 

  

출전;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ART;MU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