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과 인간

  

이선영(미술평론가)

  

들어가며

  

하루의 일과를 마친 저녁 시간대, 일반인을 위한 현대미술 강연이라는 가장 어려운 과제에 대한 가장 손쉬운 접근으로 나는 인간이라는 주제를 택하겠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포함한 인간만큼 확실한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존재론적 차원이 아니라, 외적으로 봐도 인간의 몸은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가장 민감한 경계라는 점에서 이해의 용이성이 있다. 예술에 기대될법한 이러한 자명한 인간적 기준 때문에, 수학공식이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이해되지만, 예술이 이해될 수 없음은 이해가 안 된다고 여겨진다. 현대미술 또한 수학처럼 일종의 언어이므로 그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습득해야 하지만, 그러한 언어를 모국어 배우듯이(또는 세계화 시대의 경쟁력을 위해 지배적 언어를 습득하듯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조건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다. 그래서 때로 현대 예술작품은 분개한 대중에 의한 테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상당부분 예술가에게도 책임이 있는 이 상황은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심정으로 해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얼마전 비행기 안에서 한 수학자가 방정식 풀다가 이 수수께끼같은 문자들이 이슬람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 어떤 승객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오해받은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현대미술에서 인간은 ‘온전한’ 모습으로 재현되거나 표현되지 않기에, ‘현대미술과 인간’이라는 식의 접근 또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현대미술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의 해체나 사라짐, 인간의 변형(trans-) 내지 초월(post-) 같은 난해하고 추상적인 내용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삶처럼 시간적인 변화라는 축(before/after)을 따라간다면 다소간 용이해 진다. 물론 미술사와 미학이 다르듯, 시간적인 순서가  논리적인 인과관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공간적 간격은 인간에 대한 자명성을 폐기하고, 끝없는 의미의 보충에 대한 필요성을 요구할 것이다. 그것은 미술에 대한 역사를 요약하는 것에 해당할 만큼 광범위하다. 그만큼 주제를 이끌어가기 위한 방식도 다양하다는 점에서 예술적, 비평적 주제가 될 수 있다. 자연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그 자체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에 대한 담론은 역사가 있다. 그 역사는 연속적이지 않다. 인간 그 자체나 예술작품에 반영된 인간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담론의 역사에는 균열이 산재한다. 


인간이 역사적 존재라 함은, 그것이 영원한 존재와 달리 역사적으로 사라질 수도 있음을 함축한다. 현대의 유력한 ‘고고학적 담론’(미셀 푸코)에 따르면, 인간이 탄생한 것은 얼마 안 되고,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처럼 곧 사라질 예정이다. 끝없는 진보를 향해 역사를 다시 써온 주체(와 그러한 주체를 중심에 놓는 ‘휴머니즘’)에 대한 반성과 회의는 현대 인문학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사라짐’은 비극적 분위기만을 가지지 않는다. ‘근대적 인간’ 그자체가 문제적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자연을 비롯한 다수의 타자들을 배제한 그 인간은 위대하기도 했지만 편파적이었고, 보편적이었지만 지금은 상대화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한편 그 인간은 아직도 제도로서 보장되고 있는 순수미술의 탄생을 추동했다. 고립된 대중과 소통하는 고립된 예술가의 시대가 열리자, 투명한 소통은 이제 자명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근대적)주체는 시각 이미지의 오랜 역사 속에서 ‘순수미술’이라는 제도의 산물과 같은 시기에 태어난 쌍둥이 분체와도 같다. 또한 현대예술에 대한 강력한 경쟁자인 ‘대중문화 또한 비슷한 시기에 출발’(벤자민 부클로)했다. 

  

근대이전, 신 앞에 홀로 선 개인  

 

개인은 ‘개인주의’ 시대인 근대 이전에도 있었다. 청교도주의가 예기치 않게 ‘자본주의를 준비’(막스 베버)했듯이 개인 역시 종교적 사고 속에서 발견된다. 리하르트 반 뒬멘은 [개인의 발견]에서, 종교개혁을 낳은 종교적 개인주의를 말한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는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고 개인들에게 구원과 신앙을 규정한다. 개인의 구원은 더 이상 성직자나 성사의 중개를 받았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모든 개인들은 신과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 종교에서 모든 사람들은  중간 매개자 없이 신 앞에 각자 홀로 서야한다. 자신의 양심을 따라 자기성찰과 자기규제를 해야 하는 고백성사나 마녀나 악마를 가려내기 위한 이단 심문제도 역시 개인이 주체로 서는 장이었다. 개인주의는 이러한 종교적 바탕을 가지기에 ‘서구적’이다. 그러나 특정 종교와도 무관치 않은 이러한 개인주의는 특정 경제적 질서와 결합하면서 더 보편화되었다. 자본주의 세계의 보편적 인간상은 자기 이익에 충실한 ‘합리적’ 개인으로 변질된다. 



중세 시대 이단심문에 쓰였던 고문기구 Iron Maiden

역사적으로 ‘인간의 발견’이 있었던 것은 르네상스 시대라고 지적된다. 르네상스 시대에서 인간은 신인(神人), 즉 신적 질서의 구현으로 나타나면서, ‘앎의 대상이 인간과 역사였던 근대’(1800-1950)(푸코)를 준비했다.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앎의 대상이 신이었던 르네상스(1500-1660년), 자연이었던 고전주의(1600-1800), 인간과 역사였던 근대, 그리고 언어였던 현대로 나눈 바 있다. 그의 분류법은 연속성을 가정 하는 통상적인 문예사조사와는 일치되지 않지만 신과 인간을 거쳐 언어에 이르는 담론의 과정을 역사적(고고학적)으로 다루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신적) 인간은 대우주와 소우주가 상응하는 상징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조화롭고 신비스러운 유비의 사상에 바탕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비트루비우스적 인간](1521)에서 ‘인간의 육신은 우주의 지도’(푸코)로 간주되며, 뒤러의 작품 [가죽옷을 입은 자화상](1500)은 완벽한 좌우 대칭으로 정면 얼굴을 그리는 예수 초상화법을 이용한 자화상이다. 이는 신적 인간임과 동시에 창조자로서의 예술가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한다. 


특히 16세기에 번성한 초상화나 자서전의 붐은 면밀한 자기관찰과 자기인식의 과정이 나타난다. 뒬만에 의하면 이러한 과정은 사회규제 및 사회 규율화와 밀접하다. 그에 의하면 사회전반에 걸쳐 규율화 과정이 진행되면서 자기발견과 개성이 급격히 발전하는데 유리한 조건이 만들어진다. 인간의 영혼까지도 통제하는 새로운 기관들이 생겨나면서 근대 개인의 발견과정이 촉진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규율화 과정은 개인화를 배제한 것이 아니었고, 심지어 전자는 후자에 대한 전제조건이기도 했다. 규율과 개인은 반대에 있지 않고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자율적 개인을 문제 삼는 많은 담론들이 동시에 타율적 규율 또한 문제 삼는 것이다. 도미니크 바뱅은 [포스트 휴먼과의 만남]에서 자의식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대서사시이며, 집단적인 창작품이고 언제나 변화하는 공동의 구조물이라고 말한다. 주체의 변화를 이끈 것은 의식에 영향력 있는 매체계의 변화이다. 중세 말에 발견되어 근대의 문자문화를 이끈 미디어 혁명으로서의 인쇄는 인간의 내면과 자의식을 자족적 형식 속에 안착시켰다는 점에서, 자화상과 같은 위상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는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신을 정점으로 하는 존재의 대연쇄 속에서 그 신성한 질서를 반영하는 개체라는 위상을 가진다.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표현과 의사소통의 매개체들이 어떻게 정신의 구조화에 일조했는지 역사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첨단 미디어가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 더 실감나는 그의 이론은 ‘구술성에서 문자성으로 이끈’(월터 옹) 인쇄문화의 혁명성을 강조한다. 인쇄문화와 평면 위에 고정된 이미지와의 관계는 그 출발부터 명확했다. 기원전 5세기에 알파벳이 발명되어 널리 전파되고, 이것이 15세기 인쇄술의 발명과 결합되면서 인간의 내면적 경험과 외면적 경험이 구조화되었다. 문자로 기록된 선적인 사고방식은 원인과 결과를 중시하는 논리학을 낳았고, 인쇄술의 발전은 음성을 고정시켰다. 도미니크 바뱅은 인쇄술 이후에 등장한 데카르트 방식이 오랜 기간 동안 일관성 있고 질서 정연하고 안정적인 자아라는 축을 중심으로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형성했다고 말한다. 

  

근대의 계몽적 주체와 소외

  

근대적 개인의 발견 및 발전에 가장 강력한 추동력을 제공한 것은 계몽주의이다. 리하르트 반 뒬멘은 ‘자기생각이란 진리의 최고 시금석을 자기 안에서(즉 자신의 이성 안에서) 찾는 것이며 계몽이란 언제나 자기 스스로 생각하라는 격언’(칸트)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스스로 생각하라는 요구는 계몽주의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내건 요구사항 있다고 강조한다. 계몽주의는 지식과 학문을 장려하고 개혁을 실천하며 이성이 도처에 더 많이 지배하도록 한 것이다. 이때 자기생각, 자기교육 자기실현은 계몽주의의 요구였다. 동시에 중상주의에 나타나듯, 개인의 이익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그것은 이해관계에 충실한 개인, 소유권을 바탕으로 한 법적인 개인이다. 근대 예술에서 인간은 이성과 노동으로 자연을 지배하는 영웅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꾸르베의 [돌 깨는 사람](1849)과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1850)은 분위기는 약간 다르지만, [리얼리즘]의 저자 린다 노클린이 ‘근대생활의 영웅주의’이라고 표현한 이미지들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꾸르베, 돌깨는 사람, 1848


자신을 스스로 규정하고 실현한다는 목표를 가지는 인간이 직면한 역사적 조건은 근대성(modernity)이다. 찰스 테일러는 [근대의 사회적 상상]에서, 새로운 실천과 제도적 형식(과학, 기술, 산업생산, 도시화), 새로운 생활양식(개인주의, 세속화, 도구적 합리성),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불안들(소외, 무의미, 절박한 사회적 해체감)로 근대성을 요약한다. 돈 슬레이터도 [소비문화와 현대성]에서, 근대성이란 점차 행정과 통제, 계산이라는 공식적이고 객관화된 체계, 양화, 방법지배와 규율에 의해 특징지워졌음을 말한다. 그러나 부의 생산--실제로는 가격--은 절대적이건 상대적이건 빈곤, 착취, 불안정성을 지속적으로 초래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보다 많은 물건이 생산되며 사회생활이 물화되어가는 근대에 인간 소외는 필연적이다. 모더니티라는 조건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 소외(동시에 예술가의 사회적 고립)는 모더니즘 예술의 지속적인 주제가 되었다. 


해방과 소외를 낳은 계몽의 역설은 투명한 합리주의 사회가 불투명한 비합리주의적 개인을 낳은 역설과 마찬가지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현대와 막스 베버가 합리주의라고 명명한 것 사이에는 내면적 관계가 있다고 본다. 유럽에서 무너진 종교적 세계상들로부터 세속적 문화가 생겨나는 결과를 가져왔던 탈(脫) 마법화 과정을 베버는 합리적이라고 서술했다. 새로운 사회구조들은 기능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체계들의 분화라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 체계들의 모습은 핵심조직인 자본주의적 경영과 관료제적 국가 장치를 중심으로 형성됨으로서 문화적, 사회적 합리화가 일상생활을 장악해 간다. 조지 리처가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 지적한 네 원칙인, ‘효율, 수량화, 예측가능성, 제어 가능성’은 막스 베버가 예측한 합리주의의 결과물이다. 도미니크 바뱅에 의하면 베버는 인간이 합리적인 하나의 구조에서 역시 합리적인 다른 구조 사이를 오갈 수 밖에 없는 폐쇄된 사회가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 같은 사회에서 인간은 합리적인 교육체계에서 합리적인 노동체계로 진입하면서 합리적인 여가체계와 합리적인 가정 속에 맴돈다. 사회란 합리적인 구조들로 이루어진 망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이런 사회에서 출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주체를 향한 진보는 계속되었다. 위르겐 하버마스에 의하면 ‘새로운 시대의 원리로 발견된 주체성’(헤겔)은 개인주의, 비판의 권리, 행위의 자율, 관념주의적 철학을 수반한다. 그러나 주체의 자유와 해방은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자기이익의 ‘합리적’ 추구로만 수렴되는 점이 문제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데카르트) 식의 추상적 주체성과 자기 자신의 규범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비판과 자기혁신의 실행이 현대성의 기획이 된다. 그러나 각 분과별로 나뉜 현대예술의 조건 속에서 이러한 기획은 진정으로 보편적일 수 없었다. 출발은 보편적이지만 결국은 자기 스스로만을 지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기지시성이 현대예술이 난해해진 근본적 이유다. 

  

현대예술의 자기 지시성, 맥락성

 

인간이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캔버스에 덧입혀진 물감이라는 그림의 조건을 직시하는 흐름이 마네와 세잔을 필두로 한 근대회화의 흐름이다. 모더니즘이 새삼 강조한 예술의 자기지시성은 모더니즘의 역사에 선명하다. 이러한 흐름이 미술계 내부를 넘어서 사회를 향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와 구별된다. 페터 뷔르거의 이러한 구별에 의하면, 1920년대 러시아 구성주의는 진보적인 형식에 진보적인 내용을 담으려 했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일 것이다. 러시아 혁명기에 이론가 타라부킨은 예술품은 매체인 재료(색, 소리, 낱말)와 구성이라는 두 가지 전제로부터 나온다는 것, 재료는 구성을 통해서 일관된 전체로 조직되고, 예술적 논리와 의미를 얻게 됨을 강조한다. 벤자민 부클로에 의하면, 구성주의자들은 구조 언어학과 궤를 같이 하면서 회화와 조각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문법을 개발했다. 그들은 기능적, 분석적으로 시각적 기호의 생산장치(생산절차와 도구)를 제창하였다. 




베르토프 [카메라를 든 사나이], 러시아 구성주의 영화와 몽타주, 1929

로드첸코는 모던적 기능주의와 같이 구성과정을 투명하게 하고, 공간구조와 재질을 강조하며, 회화적 의미화 장치의 자기지시성을 부각시켰다. 벤자민 부클로는 그의 작업이 기호와 그 기호의 의미화 활동 간의 물적 일치 및 기호와 지시체(지시대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강조하여 기호의 지표적(indexical) 지위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의미와 읽기라는 제 2의 차원을 거부했다고 평가했다. 즉 그는 재현과정을 순전히 지표적 기호로 환원하여 재료는 매개 없이 자신을 직접 재현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회화와 조각의 환영적 공간으로부터 실제의 공간이 강조되었다. 구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산과 결합시키려 했던 과학에 대한 열망을 체계적 탐구와 연결시켰는데, 이것은 1917년 혁명 이후, 소련에 임박해 있던 공업화 및 사회공학의 도입과 관련이 있으며, 이는 서유럽과 미국에서 영향력 있었던 테일러주의나 조직화된 소비의 관념과 유사하다고 벤자민 부클로는 지적한다. 


구성주의자들의 목표는 구성의 기술적 수단들을 작품자체 속에 구체화하고, 그것을 현존하는 사회일반의 생산수단 발전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타틀린이나 로드첸코같은 비재현적 구성주의자들은 자기충족적인 구성작업을 그만두고, 산업혁명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취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기술자들처럼 현실의 재료를 탐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술적 아방가르드가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고자 했던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조우하는 기간은 매우 짧았고, 당국으로부터 비 대중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관제적인 미학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밀려나고 말았다. 실현보다는 실험에 머물렀던 구성주의 미학의 전제인 자기지시성은 인간이 아닌 구조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참조대상을 벗어나 인간적 비유가 사라진 구조는 곧 해체된다. 장 삐아제에 의하면 인간적 주체에 의존하는 인간중심의 인식론을 근본부터 수정한 것은 구조중심의 인식론이다. 


이는 인간의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탈 중심화의 전략이다. 생물학적 구조주의의 예로 유전자의 체계를 들 수 있다. 전형적인 구조는 바로 유기체지만, 인간을 유전적 차원으로 보는 시점 자체는 인간을 조직적으로 해체 조립할 수 있는 관점과 과정을 예시한다. 구성주의는 건축과 디자인, 영화 등에서 자기 논리에 맞는 적절한 자리를 찾았으며, 회화는 지양되었으며 조각은 엉거주춤했다. 구성주의자들이 과학자들의 궤적을 따라 인간적 비유가 완전히 말소된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전후의 미니멀리즘을 기다려야 했다. 미니멀리즘은 기둥 식 조각에 아직도 남아있는 인간주의의 잔재를 일소한다. 여기에서 상징적 체계로서의 인간의 모습은 완전히 해체되고, 연극적 장치 속에서 배회하는 모호한 지각만 남게 된다. (후기)구조주의는 인간에 대한 관점을 급진적으로 변경하면서 예술에 대한 관점 또한 변화시킨다. 구조/후기 구조주의적 사고에서 예술은 한 묶음의 구조로 압축될 수 있는 자의적인 관습이나 무의식적 욕망이 살포되는 장으로 간주된다. 


주체/객체 이분법에 근거한 이전시대의 반영이나 표현은 거부되고 모든 것이 구조로 수렴된다. 비평적 관점에서 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다이엔 맥도넬은 [담론이란 무엇인가]에서, 의미는 기술적인 과정에, 제도에, 일반적인 행동의 패턴에, 전달과 유포를 위한 형식에, 그리고 교육 형식에 구체화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고에서 예술은 인간이 아니라, 구조 즉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알튀세)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 중심에 인간이 있든 아니든, 안정된 담론은 없는 것이다. 다이엔 맥도넬은 그자체로 존재하는 언어는 없으며 언어의 보편성이란 것도 없다고 말한다. 다만 방언과 은어, 속어, 특수한 언어들의 집합이 있을 뿐이다. 동질적인 언어사회가 존재하지 않듯이 이상적인 언어 능력을 갖춘 화자, 청자는 있을 수 없다. 오직 정치적 다양성 속에서 지배적인 말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현대미술을 포함한 현대적 담론에서 방점은 인간에서 언어로 넘어왔지만, 언어 역시 확실한 기준점이 되지 못한다. 현재 지배적 가치로 군림하고 있는 자본이나 시장과 마찬가지로.

  

휴머니즘을 넘어서

  

개인(individual)이란 어원적으로 볼 때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개체’를 뜻하지만, 인간 대신에 담론의 중심을 차지한 언어나 구조는 지시대상/기호, 기표/기의로 분열되어 있으며, 현대는 이 조건을 직시한다. 사이보그에 대한 담론이 예시하듯, 인간은 고유한 동일성을 가지기 보다는 이질적인 것들이 접속되는 장이 되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은 재 발명되는 것이다. 다나 해러웨이는 [유인원, 사이보그, 여자-자연의 재발명]에서 잡종의 피조물로 유기체와 기계로 구성되어 있는 사이보그의 존재를 말한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고정된 대상보다는 경계를 만드는 프로젝트가 중시되는 것이다. 다나 해러웨이는 무엇이 단위로, 즉 하나로 간주되느냐 하는 문제는 영구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본다. 개인에 대한 의미가 만들어지듯, 몸 또한 만들어질 수 있다. 즉 인간을 포함한 자연적 대상들의 원상 그대로의 상태(integrity)가 아니라, 경계를 가로지르는 흐름과 그 속도에 집중해야 한다. 




록스타의 나르시시즘을 벗어나고자 얼굴을 가린채 활동하는 Daft Punk


다나 해러웨이는 생물학적 몸을 ‘인공 지능/ 언어/ 의사소통 체계’로 바꾸어 생각한다. 즉 과거의 위계 질서적 몸은 네트워크-몸에 자리를 양보한다는 것이다. 생물학이나 컴퓨터 기술, 정보통신 등 날로 발전하는 ‘기술이 인간의 정신과 몸의 좌표들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현실’(펠릭스 가타리)을 알려준다. 유전자같은 미시적 차원에서의 변화 또한 인간의 중심을 해체한다. 가령 인간을 유전자의 구조로 파악하면, 인간의 이질성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도미니크 바뱅은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에서, 정체성이나 행동, 사회구성원 간의 관계를 결정짓고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가령 예상 수명 따위)을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라고 하는 본질주의적 사고가  2001년 인간 게놈 지도의 완성으로 무너졌다고 말한다. 인간의 유전자가 생쥐나 개의 유전자보다 복잡할 것도 없으며, 인간이 지닌 유전자 중에는 완전히 인간 소유가 아닌 것들도 있다. 


같은 유전자가 서로 다른 종에서 발견되고 완전히 다른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113개의 유전자는 세균에 의해 우리 몸에 유입된 것이다. 수용성을 가진 유전자는 자신이 놓인 상황에 따라 활성화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유전자 차원의 조작은 인간의 유전적 특성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한 기술적 가능성은 많은 SF 영화의 상상력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바뱅은 자연적으로 태어난 유전자가 차별받는 영화 [가타카]의 예를 든다. 가타카가 보여주는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회적 지위나 피부색에 토대를 둔 계층이 아닌 전혀 새로운 계층, 즉 유전자 프로필에 따른 새로운 계층이 부상한다. 유전자 프로그래밍으로 태어나지 않은 주인공은 체액을 비롯한 모든 신체요소(혈액, 머리카락, 눈썹, 소변 등)들을 얻어 ‘정상인’ 행세를 한다. 부분과 전체라는 유기적 관계는 해체되고, 부분이 전체가 될 수 있게 된다. 휴머니즘을 포함한 모든 형이상학을 일소하면서 ‘미국의 철학적 선명성을 고양했던 미니멀리즘’(케네시 베이커)이 예시했듯이 말이다. 


그것은 동일성의 모델에 따라 차별이 이루어지는 세계라는 점에서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와 통하는 바가 있다. 유전자 차원에서 작동하고 관철되는 규율은 개인을 만드는 동시에 개인을 평준화 시킨다. 푸코에 의하면 규율은 감시와 평가를 통해 이런 기능을 해왔다. 다이엔 맥도넬은 그러한 종속절차로서의 규율이 실제로는 각 인물들과 그들의 정체성을 묶어주지 않음을 말한다. 그것은 지배의 전략일 뿐이다. 규율은 푸코가 ‘개인화를 통한 지배’로 부른 주요 절차 중 하나이다. 집단/개인의 이분법이 아니라, 개인화 자체에 내재된 지배의 전략을 말한다. 푸코가 말하는 진정한 저항은 각각을 정체성 기능 장소 등으로 묶어 각 개인을 자기 자신으로만 향하게 함으로서 대중을 개별화하려는 모든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주제로 삼는 예술은 철지난 낭만주의적 해법을 따라 개인 및 개인의 세계만을 상찬하고 개인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개인과 상호작용하는 체계와 상호작용하면서 공진화해야 할 것이다.

 

출전; 창작 공간 아르숲 (시민예술 특강-‘코앞의 미술’ 강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