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수직적 존재의 상호반영을 통해 본 창조
이선영(미술평론가)
나무로 채워진 인간의 실루엣과 두상이 있는 주영호의 최근 작품은 나무와 인간이라는 직립해 있는 두 존재의 유비관계를 보여준다. 수직적 존재이며, 가지를 떠올리는 사지를 가진 인간은 나무를 닮았다. 동물의 기관이지만 분지체계를 가진 나뭇잎과 상동적인 구조를 가진 깃털을 거대하게 표현한 작품 [품다]는 공기를 가득 품어 유기체를 보호하는 깃털의 기능을 보여준다. 단독으로 또는 여러 개로 나타나는 잎사귀들이 등장하는 [Plop, Plop] 시리즈는 라 메트리가 [인간-식물]에서 썼듯이, 폐와 비교될 수 있다. 라 메트리는 ‘폐는 우리 인간의 나뭇잎이다...이 수목의 폐가 가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넓이를 확장하기 위함이며, 결과적으로 보다 많은 공기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들어진 나무 잎사귀들은 그것이 놓여있는 주변을 한껏 품으며, 견고한 물질이면서도 여백의 효과를 발휘한다.

잎사귀마다 빼곡한 엽록소를 통해 지상의 모든 생물체가 의지하는 산소를 생산하는 나뭇잎들 위에 하나씩 앉아있는 개구리는 식물과 동물의 의존관계를 알려준다. 작은 개구리에게 거대한 반사표면으로 다가오는 잎 새는 개체가 속한 하나의 우주, 환경이다. 주영호의 작품 속 남자와 여자가 마주 보고 서있듯이 나무와 인간은 서로를 반영한다. 두상만을 특화한 작품 [보다]에서는 끝없이 분기하며 뻗어나가는 나뭇가지가 생각에서 생각을 낳는 인간의 복잡한 사고과정, 그리고 그러한 사고를 가능케 하는 뇌의 복잡한 주름이나 망을 표현한다. 인간이나 나무 모두 따스한 느낌을 주는 소재지만, 재료들은 모두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작가는 이 재료를 쓰는 의미에 대해, ‘현실을 비추는 차가운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를 통해 냉철한 판단과 이성을 지닌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다고 밝힌다. 정제된 물질과 정교한 도구, 그리고 인간의 손 솜씨가 모두 발현되어 있는 주영호의 금속 조각은 ‘인간은 자연을 이해하며 그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모습’(작가)을 반영하고 있다.
주영호의 작품에서 인간의 직립이 인간 고유의 종적 특성이기 보다는 나무와 닮은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발 부분이 매우 강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발 부분은 그자체가 마치 좌대처럼 보이며 안정감을 준다. 그것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동물인 인간에게 나무의 뿌리와도 같은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쫒겨나 추상적인 공간을 배회하도록 운명 지어진 현대인은 뿌리 뽑힌 존재이기도 하다. 직립은 자연은 물론 문명 속에서도 나무와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내재적 유사성을 보여준다. 지상에 서있는 이 두 존재는 지하와 천상을 잇는 역할을 한다. 나무-인간의 중간자적 존재방식은 삼계(지하-지상-천상)를 잇는 질서를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한다. 나뭇가지 실루엣을 가진 두상 [보다]는 그렇게 서 있을 수 있는 인간의 시각을 강조한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얼굴’이라는 단어가 시각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인간이란 우선적으로 짐승보다 적절한 시선을 가진다고 강조한다. 동물의 눈은 ‘그들의 자세로 인해 먹이를 품고 있는 지상에 매여 있기’(피히테) 때문이다.
앞과 위를 주시할 수 있는 인간만의 눈은 만물을 정복하게 했다. 인간으로 하여금 거인과도 같은 거대한 족적을 남기게 한 시선은 매우 인간적이면서 매우 공격적인 것이기도 했다. 나무와 인간은 위를 향해 솟구치며 자라난다. 마치 예술가의 상상력이 뻗어나가듯이. 주영호의 작품에서 하늘을 향하는 나무의 복잡한 분지체계는 인간의 실루엣대로 잘려있다. 이러한 단절은 역설적으로 생략된 연속성, 또는 팽창성을 보여준다. 지상의 모든 것에 삶의 기반을 마련해준 식물은 자연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특히 지상에 기념비적으로 서있는 나무가 그렇다. 그것은 흙과 공기를 뿌리와 줄기로 움켜쥐면서 여러 층으로 나뉜 자연계를 연결한다. 요컨대 나무는 자연공간의 상징으로 손색이 없다.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에서, 자연공간은 모든 것의 근원이자 사회적 과정의 시작이며 모든 독창성의 토대가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주영호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그토록 자연이라는 실재에 뿌리를 대려는 이유를 알려준다.

Plop, Plop-2_스텐레스스틸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자연공간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공간의 역사를 서술하는 앙리 르페브르는 자연이라는 강력한 신화가 이제는 허구로, 부정적인 유토피아로 변함을 말한다. 자연은 기껏해야 다양한 사회들이 공간을 생산하기 위해 생산력을 제공하는 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연이라는 무대가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으며, 자연은 상대적인 것들 가운데서 절대적인 것으로 남는다고 덧붙인다. 실재에 대한 예술의 요구는 자연에 대한 관심을 낳지만, 자연과 예술의 차이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앙리 르페브르가 말하듯이, 자연이 빚어낸 작품과 의도가 개입되는 예술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예술은 특정한 목표(생산해야 할 대상)에 도달하기 위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위를 배치함으로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합리적 과정은 노동도 마찬가지만, 예술과 노동의 차이도 확연하다.
앙리 르페브르가 말하듯이, 예술 작품은 대체 불가능하고 유일한 것을 가리키는 반면, 노동의 생산물은 반복생산가능하며 반복적인 몸짓과 행위의 산물이다. 가령 주영호의 작품 [만지다] 시리즈는 잎사귀 무늬 모양의 가방들을 보여주는데, 가방이라는 물건의 표면들을 채우는 잎사귀들의 반복된 형태는 [Plop, Plop]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거의 물방울의 실루엣처럼 불확정적인 나뭇잎들과 대조된다. [Plop, Plop] 시리즈의 나뭇잎들은 [만지다] 시리즈 보다 훨씬 두텁다. 전자가 자연적 실재감을 보유한다면, 후자는 얇은 껍데기 즉 시뮬라크르에 가깝다. 그의 작품은 자연, 예술, 노동에 있어서의 창조 또는 생산이 가지는 의미의 차이를 생각하게 한다. [공간의 생산]에 의하면 인간의 사회적 실천은 작품을 창조하고 사물을 생산한다. 반면 자연은 어디까지나 창조할 뿐, 생산하지 않는다. 자연은 사회적 인간의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에 자원을 공급한다. 자연은 또한 사용가치를 제공한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최고의 꿀벌과 가장 형편없는 건축가를 구분짓는 것은, 건축가는 자신의 조형물을 현실에서 세우기 전에 먼저 상상으로 그것을 세운다’는 것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자연의 창조력은 의식된 것이 아니다. 앙리 르페브르는 자연공간은 사고를 회피한다고 말한다. [공간의 생산]에 의하면 한 송이의 장미에게는 ‘왜’가 있을 수 없다. 장미는 그냥 핀다. 장미에게는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시인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자연은 인간과 같은 목표에 따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 존재에 의해 창조된 예술은 자연이 아닌, 상징이나 기호 이미지 담론 또는 노동이 생산한 상품 같은 반(反)자연의 계열에 속한다. 주영호의 작품에서 인공성으로 냉랭하게 빛나는 자연은 인간과 자연, 노동과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을 알려준다. 작가는 나무와 마주 서 있는 존재인 인간과 나무를 교묘하게 중첩시키지만, 자연으로부터 생산된 재료인 금속의 연마된 표면은 자연과의 거리를 가늠케 한다. 반짝거리는 금속 표면은 예술적 반영은 물론, 거울 반사처럼 행해지는 반복적인 생산의 과정을 예시한다. 그 거리를 통해 인간은 세계 및 세계의 질서를 반영해 왔다.
출전; 미술과 비평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