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최은영의 평문에 대한 메타 비평; 무거운 과제에 대한 가벼운 답변
이선영(미술평론가)
작품과 비평의 대화는 물론이고, 비평들 간의 대화도 흔치 않은 미술계는 그러한 악조건에 길들여진 부류를 낳았다. 그래서 우리의 미술담론은 지금 여기가 아닌 그렇게도 저 멀리에 있는 나라, 그렇게 저 머나먼 시대들에 관심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여기라는 토대가 확실하지 않으면, 새로운 듯 화려하게 제시된 것들의 시공간적 거리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체화되지 못하고, 그저 뉴스꺼리로 소비될 것이다. 그것이 순간적인 기분전환을 야기하는 한갓된 오락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사람들 간의 대화보다는 책에서 주요 정보를 얻는 나도 그런 부류 중의 하나임을 부정은 못하겠다. 물론 대(大)학자가 아닌 이상, 책들만 가지고 맥락을 만들기는 힘들다. 또한 그렇게 만들어진 추상적 맥락은 텍스트의 일관성은 갖을지언정, 소통의 측면에서 또 다른 벽을 쌓게 될 것이다. 현실의 절박한 요구로부터의 출발이 아닌, 각주의 벽에 둘러싸인 책을 보면 그런 인상을 받는다.

이와 달리 현실에서의 대화들은 자신의 작업이 어디쯤에 와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현실, 또는 대화적 상상력은 주체에게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모르는 것은 무엇이며, 그래서 무엇을 더 추구해야 할지 암시한다. 대화가 부족하다 보니 스스로 맥락을 만들어야 한다. 자기지시적인 근대문화는 고독과 소외로부터 온 것이기도 하다. 그조차도 꾸준하게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각자 홀로 연구하고 글 쓰고 작업하여 맥락을 만들기는 어렵다. 동조든 반발이든 타자와의 대화가 필요한 이유이다. 우리의 대화는 여전히 뜸하지만, 매달 나오는 잡지나 책들, 업데이트 되는 텍스트들을 보면 각자 열심히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욱진 미술관의 기획전 ‘뉴 드로잉 프로젝트’나 그에 대한 애정 어린 평을 쓴 김최은영의 텍스트도 그렇다. 특히 김최은영은 미학 연구자일 뿐 아니라, 기획자로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무게감 있는 기획전에 대한 이상적 필자라고 생각된다.
한편 그러한 필자가 그저그런 글쟁이들과 구별 없이 섞여 있는 것도 현실이다. 어떤 계에 서열이 없다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지만, 민주주의라기보다는 무분별에 가까운 우리의 상황은 비평이 과연 지속가능한 작업인가에 대한 회의감을 준다. 비평이든 아니든 비평이라는 틀을 갖춘 글은 매달 쏟아지고, 거기에 더하여 인터넷 상의 정보들까지, 나날이 변화하는 담론 환경은 볼거리와 읽을거리의 범람을 낳았다. 실제의 노동자와 소비자 관계처럼, 소비자 천국이 낳은 것은 생산자 지옥이다. 경쟁적으로 생산된 상품들처럼, 미술작품의 감상 및 그에 대한 담론들 역시 수많은 선택지 중의 하나로 배열되어 있는 무심하고도 가혹한 현실이 있다. 내가 지금 써야 하는 메타비평은 최초의 사건이 가지는 무게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하다. 막막한 현실에서 작품이라는 실재를 탄생시킨 작가들의 노고가 가장 크고, 그것들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미술관의 실천이 그다음이다.
뒤이어 오는 것은 그에 대한 첫 번째 진지한 관객이자 평자로서의 작업이다. 그리고 단순한 뒷담화, 또는 평문에 대한 또 다른 평문은 이전의 생산자들이 만들어놓은 맥락을 따라가면 되기 때문에, 최초의 작품이나 비평만큼 그렇게 허허벌판에서 시작하지는 않는다. 나의 과제는 어떤 전시에 대한 평이 아니기에, 이러한 난이도의 순서에 따라 김최은영의 텍스트를 따라가면서 나름의 느낌을 가볍게 서술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 가벼운 서술이 가능했던 이유는, 대체로 그동안의 김최은영의 글이 신뢰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신뢰감이 없는 글은 읽지도 않지만, 보는 내내 의혹에 휩싸여 독서에 나를 쉽게 맡기기 힘들다. 그러나 선재하는 텍스트만 따라가서도 안 될 것이다. 퍼블릭 아트의 메타비평 코너는 대개 어떤 전시에 대한 평, 그 평에 대한 평이기 때문에, 최초의 참조대상에 대한 공유가 필요하다. 어떤 메타비평은 최초의 참조대상에 대한 공유가 없이 비평 텍스트의 자자구구만 따라가는 예도 있어 답답했다. 한 줄로 배열된 글자들의 무리 위아래에는 현실이라는 맥락이 존재한다.
그 현실을 부정할 때 우리는 ‘언어의 감옥’에 갇히고 만다.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작품에 대한 작품, 글에 대한 글 일지라도 최초의 현실은 여전히 담론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번 참에 제안컨대, 메타비평이 결국 어떤 필자들 간이 차이를 가늠하는 역할이 있다고 한다면, 발표한달 후에 그에 대한 평을 쓰게 하기 보다는, 한 전시에 대해 두명(또는 그 이상)의 필자의 글을 동시에 게재하는 것이 맥락의 공유라는 점에서 더 용이하고 생산적이지 않을까. 지금같은 방식은 뭐든 단박에 확인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현실과 유리된다. 영광스럽게도 이 코너에 몇 번 글을 쓰고, 나 또한 비평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연재라는 형식은 최초의 대상에 대한 공유를 어렵게 하고, 유일하게 확실히 남아있는 글을 중심으로 담론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쉽지 않다. 좋은 글은 너무나 공감이 가서 쓸 말이 없고, 그렇지 않은 글은 분석은 커녕 읽기도 싫다.
이번 ‘뉴 드로잉 프로젝트’ 전처럼 충분한 기간을 가지고 진행되는 전시도 드물다는 점도 그렇다. 대개 어떤 평을 보고 전시에 가보려 하면 이미 늦다. 실제보다는 희망사항이 과도한 단순한 전시소개 글은 따로 시간을 낼 만큼의 동기부여를 제공하지 않는다. 우선 그 전시에 대한 나의 느낌은 김최은영과 유사하다. 좋았다. 전시가 열린 장욱진 미술관은 번잡하지 않은 곳에 있는 아름다운 미술관이며, 또 그에 걸 맞는 전문 스텝진까지 기대와 신뢰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유명 무명 작가들이 망라된 ‘뉴 드로잉 프로젝트’는 야심차게 진행되었고, 그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연속이라는 가능성으로 열려있기에 더욱 좋았다. 글 마지막 부분에 ‘미술계의 팍팍함’을 뚫고 나온 좋은 전시에 대한 평가까지, 그 전시에 대체로 공감하는 논의의 굵은 줄기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전시에 대한 공유가 안 되어 있는 더 많은 관객과 독자를 생각한다면, 김최은영이 쓴 최초의 진지한 평문에 해당 전시에 대한 정보가 많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은 불만이다.
이번의 텍스트 뿐 아니라, 그 밖의 필자들에 대해서도 제 1의 불만과 거부감이 드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작품 이야기 부족 문제다. 전시된 작품에 대해 일일이 다 언급하지 못해도, 인상 깊었던 작가나 작품들 몇몇에 대한 거론은 전시나 평문에 대한 공유를 더 원활하게 했을 것이다. 김최은영이 이 전시에 대해 결정적으로 그렇지 못했던 이유는 일일이 언급하기에는 너무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임이 분명하다. 반대로 작품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몇 개만 언급해도 된다는 잇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최은영은 작품들 보다는 큐레이터의 기획의도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작품은 훌륭하거나 훌륭하지 않은 기획 의도를 확증해 주거나 반증하는 예가 될 수 있기에 뭔가 아쉽다. 지엽적인 것을 시시콜콜 언급하는 것을 넘어서, 포괄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학문이나 감각이 아니라, 경륜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 우물파기가 거부된, 그래서 뭔가 고일 틈 없이 휙휙 지나가버리는 지나치게 ‘젊은’ 한국의 미술계 풍토에서, 자연스러운 깊이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차선으로 가능한 것이 성실성이다. 현실과 작품 위를 훨훨 날고 있는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경향보다는 단 한 점의 작품이라도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어 있는 평문에 대한 요구는 단지 글 쓰는 스타일의 문제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어떤 평문에 구체적 작품이 등장하는 것은 수많은 글 중에서 바로 그 글을 읽어야만 하는 동기를 제공한다. 글자보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지면의 작품 사진은 일종의 사물로 다가오며, 이 사물은 그에 대한 적절한 말을 요구한다. 모호한 생각이나 느낌이 분명해지는 것도 구체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서다. 요컨대 필자가 보다 일반적인 것을 겨냥하고 있더라도, 그것에 대한 생생한 부각은 하나 또는 여러 작품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다. 그것은 많은 담론들이 교차되는 비평이 대중적일 수 있는 유일한 창구다.
그것은 미술담론이 허구에서 허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부터 출발하며 그자체도 실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구체적인 대상 제시에 있어 비평보다 더 쉽지 않은 역사나 철학과 비교해 보자. 대다수의 현대인이 직접 접해보지 못한 역사적 단편들처럼 여기저기 뚝 뚝 떨어져 있는 대상들을 연결하기는 힘들고, 필자나 독자의 상상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매력적인 그러나 대부분 괴로운 수수께끼가 되고 만다. 직접 보지 않은 전시, 직접 만나지 않은 작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그것들은 역사와 달리 동시대적인 공기를 함께 호흡함으로서 훨씬 이해하기 쉽지만 말이다. 그래서 미술사는 역사의 한 부분, 미학은 철학의 한 부분이 되지만, 비평은 결코 무엇의 한 부분이 될 수 없다. 비평은 역사나 철학만큼 엄격하지는 않지만 자유롭다. 그 자유로움은 자의성이나 편파성도 낳지만, 역사나 철학 같은 인문학은 물론, 과학조차도 담보하기 힘든 ‘객관성’에 매달리는 에너지를 절약하여 주관과 객관 사이의 어떤 중간 영역에 자기 자리를 잡는다.
김최은영의 비평문이 인상적인 점은 매우 이질적인 작가와 작품들이 등장하는 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글이 매우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점이다. 이 전시가 작가의 내면이 가장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드로잉 전시라는 점, 그리고 필자가 이 전시를 해석하는 키워드로 제시한 ‘욕망’은 그러한 자연스러운 흐름과 어울린다. 그러나 전시도 비평도 심지어는 작품제작 그자체도 자연이 아닌 구성이다.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보인다면 그것은 매우 잘 만들어진 텍스트라는 것이다. 물론 다소 이질적인 요소들도 있다. 길지 않은 평문에 삽입된 인용문들이 그것이다. 김최은영의 글에는 논지의 근거를 일일이 밝혀야 할 통상적인 논문만큼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인용문이 등장한다. 이지(李贄)의 동심설(童心說), 덕업유신론(德業儒臣後論), 장언원(張彦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장자(莊子)의 추수(秋水), 요화(姚華)의 곡해일작(曲海一勺) 등등.
하얀 바탕 위에 줄지어 있는 검은 형상들은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나에겐 거의 외계어처럼 보이지만, 필자의 친절한 해설은 전시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 되기에 충분하다. 물론 자신의 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인용은 늘 상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필요하다. 현실에서 대화가 쉽지 않다면, 가상의 대화라도 반영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평문은 다층적인 공명을 낳는 예술작품에 근접한다. 무릇 한가한 독서부터 치열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은 이러한 대화이다. 대화의 부재, 가령 화가의 독백에 더해진 필자의 독백은 괴롭다. 특히 그것이 독선적인 편집자에 의해 재현될 때 더욱 괴롭다. ‘동아시아 미학’들이 등장하는 김최은영의 평문은 여러 겹의 대화를 요구한다. 동양화 자체가 서양화 어법으로 말하면 드로잉이라는 점에서 ‘뉴 드로잉’에 대한 필자의 과감한 해석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출전; 퍼블릭 아트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