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의 『현대미술의 시공간과 존재의 미학』에 부쳐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성호의 평론집 『현대미술의 시공간과 존재의 미학』에는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를 포함하여 꽤 많은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한 해에도 수 천 건이 열리는 전시회를 생각한다면 극히 일부에 해당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양적인 차원에서의 공평함이란 어차피 개인으로서는 불가능한 목표이다. 대신에 필자는 밀도와 강도로 승부수를 던진다. 그는 개별 작가를 다루지만, 꼭 그 작가/작품에만 해당되지 않는 보편적 담론으로 승화시킨다. 물론 여기에서의 보편성이라 함은 작가나 작품 이름만 바꿔도 그럭저럭 다 말이 되는 두리뭉실함이 아니라, 어떤 작가 또는 작품에서 도출한 결론의 논리적 설득력,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이해 가능한 의미를 말한다. 평문의 형태를 띤 많은 글들이 수수께끼 같은 작가의 말이나 작품을 또 다른 수수께끼로 남겨놓는 일은 흔하기에, 비약 또는 독단의 위험을 무릅쓰고 끈질기게 개별적 작품의 보편적 의미를 끌어내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김성호의 평문에는 그러한 끈질김이 있다. 





어떤 평문은 이러한 끈질김이 극단에 이르러, 거의 학술논문에 가까운 긴 논의를 따라가는데 인내력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물론 그렇게 해도 흡족하지 않을 경우, 평문 말미에 앞으로의 연구 과제를 남겨두며 의미를 열어놓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각론이면서도 보편성을 간취하는 것은 개별 비평가가 처한 상대적 위치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김성호는 작품의 보편적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 철학적 논의를 참고한다. 가령 로만 오팔카 론에서는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이, 조덕현 론에서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주의가, 이배 론에서는 연금술이, 윤영화 론에서는 신학이 등장한다. 물론 그러한 연결망은 자의적이지 않다. 필자는 작가노트와 인터뷰에서 그 근거를 찾아내고, 때로는 작품에 분명히 새겨진 그 담론의 흔적에서 추출한다. 그러한 매칭을 통해 독자는 한 작가를 읽으면서 동시에 어떤 철학도 읽게 된다. 양자는 서로를 보충한다. 난해한 철학적 텍스트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대동하며, 그 자체로는 말이 없는 이미지는 철학적 의미의 지원을 받는다. 


미술인들은 이미지로 사유하는 습관이 있다. 현대미술에서 철학적 논의는 필수지만, 말로서 말을 이해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또 다른 개념들을 이해해야 하며, 그 과정이 끝이 없어 보이는 철학적 논의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양자를 매개할 수 있는 필자는 소중하다. 자기만의 경계 안에서의 소소한 성실함에 자족하는 한국의 미술계에 그런 인재가 많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조합이 표피적이 아니라, 꼼꼼한 원본 주석이 동반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학문적 배경 뿐 아니라, 책자의 형태로 출간되는 평문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며, 그는 그 기회를 충분히 살렸다. 베르그송이나 들뢰즈/가타리는 지금 뜨겁게 읽히는 철학자지만, 연금술이나 신학은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그 작가/작품에 꼭 맞는 담론을 찾기 위해 주류/비주류를 가리지 않는다. 


철학이 아닌 경우에도 보편성의 매개 고리는 있는데, 가령 손동진 론에서는 전통과 현대의 문제가, 정충일 론에는 인간 실존의 문제가 심도 깊게 다루어진다. 그 모두 한 작가/작품에 한정되는 담론은 아니다. 그의 평문은 형식에서 형식을, 내용에서 내용을 추출하는 동일성의 원리가 아니라, 형식에서 내용을, 내용에서 형식을 이끌어내는 역동적 논리가 있다. 이러한 역동적 논리에 의해서 최초의 내용이나 형식은 그 다음 단계로 진전될 수 있다. 그것은 미술사나 미학과는 다른 비평만의 융통성 있는 영역이다. 자신의 생각만을 강요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전 방위적으로 연결망을 찾아내고, 설득력 있게 논지를 펼치는 대목은 이 평론집이 작가와 이론가 모두에게 두루 어필할 수 있는 요소라고 생각된다. 김성호의 작업은 작가의 그것만큼이나 강도가 세다. 그의 글은 비평이 단순히 작품 이후에 딸려오는 꼬리표 같은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것은 작품을 다시 탄생하게 할 수도 있는 또 다른 작품이다. 간혹 나올 수 있는 이러한 ‘작품’을 통해서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비평 무용론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앞만 보고 달려왔던 한국 사회만큼 비평이 필요한 곳도 없다. 미술에 국한시켜 보자면, 간만에 회심의 역작을 모은 비중 있는 전시부터 캐주얼한 분위기로 진행하는 전시까지, 매달 총천연색으로 나오는 두툼한 미술잡지들이 있지만, 그 모두를, 아니 그중 얼마의 전시라도 제대로 다루기에는 역부족이다. 대부분의 전시들이 전시 주최 측과 해당 작가, 그리고 그를 아는 지인들의 추억 속에 남겨질 뿐이다. 21세기에 들어서야 디지털 아카이브로 저장, 검색되어 그나마 최소한의 흔적들이 남게 됐다. 한류, 성형, 화장품 등으로 ‘세계적’ 수준의 ‘문화적’ 경쟁력을 획득한, 표피와 외면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역사의 억압은 유례없다. 역사란 자연과 함께 실재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전시와 함께 남는 기록물은 후속 연구자들을 위한 정식 도록으로 남지 않는다 하더라도, 심도 깊은 작품 분석이 함께 하는 담론은 작품 이미지와 함께 두고두고 회자되곤 한다. 현대미술에서 담론과 함께 하지 않는 이미지는 가볍게 떠돌고 소비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반벙어리와 다름없이 묻혀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분명히 모월 모일 발표된 작품이지만, 또 다른 발굴을 기다리는 잠재적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비평적 담론은 작품이 짧은 전시기간을 떠나도 그 의미를 지속, 확장시킬 수 있는 매개 고리가 된다. 비평적 담론이 낱낱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도록이나 수많은 정보의 홍수와 함께 도매금으로 취급되곤 하는 디지털 형태의 기록을 넘어서, 책자의 형태로 다시 탄생하는 것은 소중한 기억을 실재화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다. 학문적 배경 또한 탄탄하지만, 미술잡지의 편집장, 지역의 유서 깊은 비엔날레 감독 등,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왔던 김성호의 비평집이 반가운 이유이다. 


그는 여기에 『현대미술의 시공간과 존재의 미학』이라는 육중한 제목을 붙였다. 모 미술정보지에 날렵하고 감각적인 몇 줄 비평을 매달 순발력 있게 쏟아내곤 했으며, 평소에도 학자풍의 엄숙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기에 의외다 싶다. 그러나 그 안에 실린 글들의 무게는 제목보다 더 묵직한 것이어서, 니체 식의 새로움의 창조를 위한 망각이 아닌, 말 그대로 망각 그 자체를 살고 있는 우리의 미술문화 풍토에 돌을 매달고 생각 좀 하자고 청하는 듯하다. 아직도 팔랑거리는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존재’하면 묵직한 바위나 뿌리 깊은 나무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가 다시 꺼내든 존재라는 단어가 어떤 곳보다도 강력한 시뮬라크르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문화 풍토에 역행하는 개념이기에, 고풍스러우면서도 도발적으로 들려온다. 물론 그는 곧이어 출간될 『기억, 상상, 허구의 시공간과 현대미술』에서 실재의 또 다른 면모를 논의할 예정이지만 말이다. 


이 책에 실린 국내외 작가들에 대한 글은 논문 스타일의 텍스트부터 한 전시에 붙이는 평문 스타일까지 다양한 계열을 이루고 있었지만, 길던 짧던 단순한 평문을 넘어서 작가론, 또는 작품론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자족성을 가진다. 자족적인 것들만이 서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평론집을 통해 새삼 깨달은 김성호의 비평적 태도는 작품을 매우 자세히 읽는다는 점이다. 실증주의적인 각론에 치중하는 미술사가도 그렇게 하지만, 대개 미술사가의 꼼꼼함은 대담한 미학적 결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철학의 한 예로 작품을 취급하곤 하는 미학자는 그런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가령 미시적 차원과 거시적 차원의 연결망은 평문 「로만 오팔카, 지속(durée)과 삶의 시공간」에서 두드러진다. 김성호는 오팔카의 작품 속 시간성을 탐구하면서 오팔카의 시간성(temporalité) 탐구는 결국 초시간성(intemporalité)을 지향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보는데, 시간성, 초시간성 등의 개념은 형이상학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적 결론을 내리기 위해 그는 작가가 주기적으로 화면 가득히 써놓은 깨알 같은 숫자를 하나하나 읽었다는 것이다. 그는 숫자를 쓰는 동안 간격이 없이 붙어있는 숫자들 때문에 이미 써넣은 수를 다시 써넣거나 건너뛰게 되는 실수들을 찾아내고, 망각이나 집중력 상실 등의 여러 가지 이유들로 초래된 실수에서 틀린 수를 지우지 않고 틀리기 전의 수를 취해 다시 그 다음 수부터 써나간 것에서 시간을 대면한 작가의식을 읽는다. 작가의 태도는 극단적인 금욕을 수행하는 윤리의 차원에 이른다고 본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를 작품과 작가를 세부 항목까지 진지하게 대하는 비평의 윤리와도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자세히 읽기는 일견 비슷한 양식을 보이는 동시대 국내외 작가간의 비교에서 돋보인다. 비교는 미술사의 중요한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비평 역시 그러하다. 차이를 감식해내는 것은 동일성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며, 그 어느 시대보다 세계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비평의 중요한 과제이다. 


가령 김성호는 2000년 프랑스 주드폼 국립미술관에서 있었던 조덕현의 전시를 다루는 평문 「조덕현, 유목주의(Nomadism)와 부재의 시공간」에서 부재에 대한 깊은 자각, 즉 지금 여기 없음, 상실에 대한 집착이라는 점에서 볼탕스키의 작품과 같은 문맥을 가진다고 본다. 동시에 그는 조덕현에게는 볼탕스키의 세계관에서 읽기 힘든 과거, 현재, 미래가 계속 순환을 하는 연결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볼탕스키의 부재 이미지는 폭력적이고 암울하고 묵시록적이라면, 조덕현에게 있어 부재의 이미지는 죽음을 상징하면서도 결코 묵시록적이지 않는 개인적 회한과 애착의 내음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성호의 평문에는 자세히 보고 읽기의 차원이 있는가 하면, 보다 거시적인 종교적 예지가 번뜩이는 작품 해석도 돋보인다. 『현대미술의 시공간과 존재의 미학』에는 예술을 대하는 근본적 태도와 타자가 만나는 접점이 있다. 종교는 철학이나 미학, 미술사보다도 더 근본적인 차원에 있는 담론이지만, 현대에 와서 사적인 영역으로 폄하, 억압되는 경향이 있다. 현대에 와서 타자화 된 사상적 전통은 적극 불러들일 필요가 있다. 현대가 제시한 기준은 현대 그 자체의 개념과 함께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감성이든 확장된 종교의 개념이든, 이제는 잊혀져 낯설어진 형이상학적 교리의 차원이든 말이다. 물론 그것은 어떤 윤리적 당위가 아니라, 논리적 설득력이라는 차원에서 그래야 하며, 김성호의 비평적 텍스트가 충족시켜주고 있는 점이 그것이다. 가령 그는 「이배, 죽음 이후의 탄생과 존재의 시공간」에서 이배가 사용하는 숯이라는 재료에서 죽음 이후의 탄생'이라는 존재론적 미학을 어떻게 탐구하고 있는지를 살핀다. 어원적으로 '주검으로부터 시작된' 이미지는 '죽음/삶', '부재/존재'라는 양가적 의미가 실상은 종이 앞뒷면의 차원임을 강조하면서, 이배의 연금술적 미학이 죽음으로부터 삶으로 이동하는 질적 변환이라고 해석한다. 즉 그의 작품은 죽은 것들을 보존하고 소생시킴으로서 '죽음 이후의 탄생'이라 부름직한 존재론적 미학으로 정초된다는 것이다. 「정충일, 순환, 인간과 신의 시공간」에서는. 띄어쓰기를 의도적으로 배반하는 ‘물과물’이라는 작명에서, 물의 두 개념이 이원화된 분리의 개념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며 일원적 사유로부터 기원하고 있는 것임을 논한다. 즉 양자는 하나의 ‘근원적 물’로부터 생성된다고 보는데, 물의 두 개념은 ‘물(하늘의 물)’과 ‘물(땅의 물)’이 피조(被造)되는 태초의 창조적 사건으로부터 비로소 존재하게 된 것임과 동시에 그것(들)이 분리되기 전에는 애초에 ‘하나의 물’로 존재했었음을 말한다. 


김성호는 이것을 이원론적 희랍신화로 오염되기 이전의 히브리 구약 성서의 순환 개념을 동양의 순환 개념과 같은 일원론적 사유와 만나게 하는 지점이라고 해석한다. 「윤영화, 유산, 역사와 피조된 인간의 시공간」에서 전시부제, ‘유산: 남겨진 것과 남겨질 것에 대한 기억과 사색’의 첫 문장을 “작가 윤영화에게 창작의 화두는 무엇일까”로 시작하면서, 그의 작품을 신학적으로 해석한다. 자연이 신의 영역이라면 문화는 인간의 영역이라고 보면서, 유산의 기원은 기독교 신화에서 원(原)인간인 아담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아담의 원죄는 그것은 밀턴이『실낙원』에서 말하는 죄와 죽음의 근원임과 동시에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논하는 인간이 이성과 자유의지로 실현한 문화의 기원이 된다. 그는 여기에서 오늘, 여기의 문화로부터 천착하는 ‘성(聖) 예술(L'Art sacré)'이라는 참조 점을 본다. 성(聖) 예술에 천착하는 윤영화의 작업은 오늘날 이미지의 홍수 속에 가려진 보이지 않는 성(聖)을 드러내는 소명이라는 것이다. 


김성호가 각별하게 생각하는 작가론, 「이탈, 신의 사랑과 인간 평화의 시공간」에서,〈인간의 분류는 신을 처형한 이후에 가능하다〉(2010-2011년)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단 이탈의 문제작을 분석한다. 그는 ‘욕망하는 기계’(들뢰즈)나 ‘벌거벗은 생명’(아감벤) 같은 동시대 철학적인 주제와 조응하는 이탈의 작품을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맥락화한다. 그는 십자가형의 틀 위에서 끊임없이 좌측의 거품생성기로부터 발생하는 거품에 자신의 몸을 스스로 오염시키고 다시 우측의 맑은 물에 씻는 일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작품에 대해, ‘신이 죽었을 때(혹은 없을 때)’에나 가능할 것 같은 상황들이 지천으로 발생하고 있는 오늘날 현실에서 인간을 ‘있는 자/없는 자’, ‘지배자/피지배자’ ‘다수자/소수자’ 등으로 위계화시키지 말자는 작가의 비판적 주장을 읽는다. 인간 사회에서 평등은 자유만큼이나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평등은 보다 상위의 관념 또는 존재, 즉 신을 가정해야 한다. 신 아래에 인간들은 평등할 수 있다. 한편 신과 인간은 차이가 있다. 신은 인간에게 절대적인 타자인 것이다. 만약에 신이 죽었다면 인간은 평등할 수 없다. 


또한 성/속의 차이가 없다면 오염은 정화될 수도 없다. 진정한 평등도, 진정한 차이도 없는 시대, 그것은 르네 지라르가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지적한, 현대가 당면한 진정한 위기를 말한다. 현대를 지배하는 속은 성이라는 메타적 차원으로서만 제대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의 독특한 해석과 연결될 수 있는 작품 묘사에서도 필자의 종교적 감성은 빛난다. 그는 「손몽주, 표류, 기억의 시공간」에서 부산의 홍티포로부터 다대포해수욕장을 다니며 채집한 표류목들을 사용한 설치작업을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을 감행하는 모세가 기적을 일으킨 홍해의 물길처럼” 보인다고 묘사한다. “어떻게 보면, 높낮이가 다르게 공중에 매달린 까닭에 천상으로 오르는 길에 놓인 디딤돌이거나 거꾸로 신의 강림을 예비한 구름다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인간과 신이 지상계와 천상계를 오르내리는 신비의 여행길인지도 모른다...” 현대의 존재론은 목적지가 설정되지 않은 표류의 길이라는 역설적 결론과 연결된 이러한 대목들은 예술과 종교의 끈질긴 연결망을 생각하게 하며, 종교의 라틴어 어원 ‘렐레제레(re-legere)’가 말하듯이, ‘다시 잇고’, ‘다시 읽는’ 종교의 과업이, 작품을 비롯한 다양한 기원을 가진 것들을 연결하는 비평가의 과제와 다를 바 없음을 알려준다. 

  

출전;  사문난적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