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스튜디오를 겸한 전시 [장소와 각주] 전에 출품된 이예승의 [어떤 리스트](2016)는 꽉 짜여 흘러가는 일상 속의 여백이 발견된다. 물론 듣기에 편치 않은 배경음이 암시하듯이, 그 여백은 서정적이기 보다는 기괴하다.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정보혁명시대 현대인의 일상과 문화를 채우는 것은 자극적인 코드들이다. 아크 형태의 스크린에 끝없이 흘러가는 이미지는 산해경(山海經)의 괴물부터 컴퓨터의 회로도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둥근 스크린은 이 모든 것을 담아내는 원초적 그릇(코라)같은 것이 된다. 이곳으로 모든 것이 수렴되고 이곳으로부터 모든 것이 발산될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 그동안 사용했던 작업의 소스들을 주섬주섬 담아놓았다. 빈틈없는 정리가 아니라 던져 놓듯 모아 놓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은 병치이지 유기적 조직이 아니다. 아크 그 안에 들어간 관객의 그림자는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이미지와 뒤섞인다.

금천예술공장 설치 전경, 아크 형태의 스크린, 디지털 프린트, 일상 오브제, 가변설치, 500x500cm, 2016

거대한 스탠드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스크린 안팎에서 볼 수 있는 조형적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예승의 근 몇 년간의 작품에는 한쪽이 뚫린 아크 모양의 스크린과 그 안에 몰아넣은 듯한 기계들이 발견된다. 이 열려있는 구조 안에는 테이블이나 조명, 스피커와 컨트롤 박스 등과 그 기계들을 잇는 선들이 얽혀 있으며 굴곡진 스크린에 흘러가는 영상들만큼이나 느슨하게 배치되어 있다. 다른 벽면에는 관객이 마우스를 작동하여 드로잉을 할 수 있고, 그것이 또 다른 신호가 되어 영상의 흐름을 바꾸곤 하지만, 관객이 그것을 자기의 의지대로 정확하게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a라는 신호를 보내서 b라는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관객은 스크린과 등지고 서 있으며, 자신의 무의식적인 드로잉이 야기한 자극이 이와 연동된 시스템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지 못한다. 드로잉과 스크린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는 있지만, 명확히 예측되지는 않는다.
나비효과처럼 관계는 있지만, 명확히 결정될 수 없는 과정이다. 이 부조리한 예술 기계들에 깔려 있는 것은 역설과 배리의 과학이며, 이는 엄격한 과학의 법칙보다는 유희적인 규칙을 강조한다. 그것은 근대시대의 패러다임인 결정론을 거부하는 불확정성의 원리나 통계학적 진리를 말한다. 여기에서 우연의 역할은 필연만큼이나 크다. 현대 사회는 더욱 촘촘하게 체계화되고 있기에, 우연은 그것이 재앙으로 다가오든 자유로 다가오든 그 여파가 크다. 필연 속 우연이 사건을 만들어 낸다. 근 몇 년간의 이예승의 작업 중에서 가장 느슨해 보이는 이 작품에서 동원된 자료들을 완벽히 짜 맞추려는 연출자로서의 역할은 지양되었다. 그 점에서 [어떤 리스트]는 잠시 쉬어가는 듯한 작품이다. 통상적으로 기계들이 동원되는 작품에는 실시간으로 송수신하는 신호들이 꽉 짜인 망을 이루어야한다. 기계들을 마치 캔버스와 물감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기획전의 주제에 맞게 본문의 보충 역할을 하는 각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여러 해 동안 열정적으로 대형 영상 설치 작업에 몰두해 해왔던 작가가 애용해왔던 각종 소스들이 날 것 그자체로 공개된다. 요즘 영감을 받고 있는 동양의 고전부터 작업 때 사용했던 여러 데이터들과 회로도, 심지어는 인건비 지급 영수증까지 느슨하게 흘러가는 각종 자료들은 각각 자기의 존재를 주장하며 공존한다. 그것들이 조합되는 방식에 따라 작품도 달라질 것이다. 한 작품에서 각주인 것이 다른 작품에서는 본문일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 무엇이 전경화 될 것인지는 그때그때의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해체주의의 주장처럼 궁극적인 요인은 없고 계열들만 존재하며, 각각의 요소들은 대리보충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작품 [어떤 리스트]는 그러한 작업의 과정 자체를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 각주를 넘어 그자체가 몸통이 된다. 또한 그것은 작업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오픈스튜디오의 의미와도 부응한다. 실은 중심(본문)과 주변(각주)을 구별할 수 있는 엄격한 기준은 없다. 서로의 자리는 항상 뒤바뀔 수 있으며, 그것이 텍스트의 다양성을 낳는 원천이다.
출전; 금천예술공장 2016 오픈스튜디오 연계 전문가 자문 프로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