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는 다시 시작되야할 문명
이선영(미술평론가)
무인지경(無人之境)의 사막이나 빙하를 배경으로 하는 김상현의 ‘낯선 풍경(Strange landscape)’ 시리즈는 ‘세계는 인간이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레비 스트로스)라는 예언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사라져가는 원시문명을 바라보는 인류학자의 예지가 담겨있는 책 [슬픈 열대]의 마지막 문장으로 기억된다. 거기에는 또한 인간이 추동하는 역사보다는 구조를 중시했던 학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 어떤 문명이라도 그것이 끝나는 과정은 비슷할 것이다. 김상현의 낯선 풍경 시리즈에 나오는 사막이나 극지방은 극한의 지역을 대변하며, 지구가 사막화되고 극지방의 얼음이 녹는다면 그것은 재앙이 될 것이다. 2014년에 발표된 ‘낯선 풍경’ 시리즈에는 인간 대신에 동물이 등장하곤 하지만, 인간의 역사를 먼저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던 동물의 수난은 이 초현실주의적 광경에 감정이입을 가능하게 한다.

100F 1 낯선풍경(Strange landscape) 162.2x130.3cm Oil On Canvas 2014
작품 [낯선 풍경 1]에는 수직으로 쪼개져 가는 빙하 위에 서있는 동물 한 마리가 서있다. 극지방에 살지 않는 동물이 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초현실주의의 한 수법이 아니라면, 풍요와 재앙을 동시에 안겨준 세계화 시대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동물이 건너편으로 뛰기에는 간극이 너무 벌어져 있다. 그것은 죽음 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막다른 낭떠러지에 서있는 것이다. 빙하를 배경으로 자유의 여신상이 실루엣으로 표현된 작품 [낯선 풍경 3]에서 빙하 한 켠에서 얼룩말이 바다를 두렵게 내려다본다. 세계도시의 중심을 상징하는 조각상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유의 불빛을 밝힌다. 해변 가에 반쯤 파묻혀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 악전고투 끝에 탈출하고자 했던 혹성이 결국 지구였다는 SF 영화의 장면이 떠오른다. 김상현의 작품에서 자유의 여신상은 반듯하게 서 있기는 하다. 그러나 밝은 배경과 대조되어 그림자 같은 실루엣으로 처리된 자유의 여신상은 불 꺼진 진보의 신화를 은유한다.
노을 지는 하늘 저편에 원폭구름이 피어오르는 작품 [낯선 풍경 2]에서 전경은 선인장과 모래 언덕이 있는 사막을 배경으로 유적지가 빈 장소를 지킨다. 이 유적은 관광객들로 북적이곤 하는 피사의 사탑인데, 원래 기울기보다 약간 복원된 듯하다. 우리의 지각과 기억을 위반하는 사탑은 정상이 비정상이 되고 그 역도 사실인 낯선 풍경을 이룬다. 그 옆에 (아마도 세월호 처럼 복원력을 잃어)좌초된 녹슨 배,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낙타의 무리들은 인간의 노예를 벗어난 동물들의 새로운 여정이다. 김상현의 작품에서 갈라지는 빙하나 사막 저편에서 피어오르는 원자폭탄 구름은 종말에 이르는 재난의 말미 정도를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낯선 풍경은 재난 중의 혼란보다는, 혼란이 지나간 이후의 상태를 말한다. 재난과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분위기는 서정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평화와는 관계없는 잔잔함이다. 스스로 종말을 앞당긴 인간의 온갖 모순에 착종된 역사를 생각하건대, 예외가 아니라 순리에 따른 결과다.

100F 2 낯선풍경(Strange landscape) 162.2x130.3cm Oil On Canvas 2014
인간이 과학기술 혁명과 자본주의를 통해서 자연에 영향을 준 이후, 자연의 가장 큰 적대자는 바로 인간 자신 아니었나. 김상현의 풍경에는 하늘 부분의 표현이 미묘하다. 다양한 빛깔에 물들어 있는 광대한 하늘은 저물어가는 문명의 표정을 멜랑콜리하게 담아낸다. 지상의 모든 사건들을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빈 하늘은 그림으로서 가능한 풍부한 색채 실험이 가능 한 자연스러운 공간이다. 2015년에 유화가 아닌 혼합매체로 제작된 [color] 시리즈는 서사보다는 추상적 조형요소를 전면에 내세우며, 평면을 넘어서 설치로 확장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자연/인공과 같은 대조어법이 발견된다. 작품 [color I]에서 비정형 형상들은 그리드 구조 안에 휘몰아치고 전시장에는 그리드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드 덩어리 아래에는 거울이 깔려있어 그리드 구조에 내재된 복제의 메커니즘을 또 다른 차원으로 확장한다.
작품 [color Ⅱ]에서 비정형 형상들은 틀 안에서 똬리를 튼 채 집합되어 있고, 단면은 표면과는 다른 색을 보여준다. 작품 [color Ⅲ]에서 색 벽돌 같은 이미지들이 벽을 이루고 이 벽면들이 일종의 연극적 무대를 형성한다. 작품 [color Ⅳ]과 [color Ⅴ]는 사각 틀 속의 카오스 패턴들이 춤춘다. 이 형상들은 녹는 것인가 형성되는 것인가. 지어지는 것인가 무너지는 것인가. 최근 제작된 설치작업들은 고정된 형태(또는 이야기)가 아니라, 과정을 가리킨다. 장구한 인류사를 무대로 한 이전의 서사적 이미지와 비교한다면, 형상들은 질료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문명의 말미라는 관점에서는 해체지만, 시작이라는 관점에서는 발생이다. 그의 작품에서 해체나 발생은 그리드 표현되는 엄격한 구조 속에서 진행된다. 구조 속에서 휘몰아치는 유동적 흐름은 질서와 무질서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의 흐름이 또 다른 흐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선적인 연속성이 아니라 공시적 구조가 있다.

color Ⅰ Mixed media, Installation, 2015
언어와 제도를 비롯해서 구조를 중시하는 이들은 문명화 되지 못한 민족은 단순히 야만적인 민족이 아니라, 문자가 없는 민족으로 수정해서 이해한다. 문법을 따르며 줄지어 서 있는 문자는 선적이다. 그것이 선사시대를 벗어나 역사를 시작했다. 구술성은 문자성으로, 공동체주의는 개인주의로 변화했다. 김상현의 작품에서 동적인 사회를 특징짓는 ‘과열된(hot) 역사’(레비 스트로스)는 더 이상 변화의 궤적을 가늠할 수 없는 상태(cool)로 변화한다. 설사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그것을 감지할 지적 생명체는 부재하다. 그것은 단지 변화일 뿐, 변화에 대한 목적론적 방향이 확실한 진보나 발전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자본이 추동하는 세계화의 그늘을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본 [오래된 미래]에서, 진보란 오직 한가지의 형태만 취할 수 있는 냉혹한 과정이라고 비판한다. 하나의 모델에 의존하는 진보는 자본 및 에너지 집약적 생활방식의 낭비와 비도덕성, 그리고 사람들을 서로서로 갈라놓는 그런 종류의 개발만을 지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보와 묵시록과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문명사를 표현한 김상현의 [낯선 풍경] 시리즈가 진보로 상징되는 선적 역사의 말미를 보여준다. 선적 역사가 시작되기 전 또는 그것이 끝난 후에는 시간은 부재하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샘솟고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각각의 시간의 흐름은 모종의 틀에 의해 구분되어 있다. 차이는 뭉뚱그려진다. 전체적으로 보면, 각각이 비슷한 시각 상을 이루면서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사가 있는 회화에서 추상으로 어법을 바꾸면서 생겨난 결과이기도 하다. 추상은 어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 보다는 한 눈에 들어오며, 읽기와 이해보다는 감성과 지각에 직접 호소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은 형태소들이 집합된 면들이 전시장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배치되면서 다시 생겨난다. 관객은 벽에 걸린 작품을 보는 만큼이나 그 사이를 거닐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지각할 수 있다. 이렇게 체험된 시간성 속에서 또 다른 의미가 발생한다.
출전; 미술과 비평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