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복제 시대의 몸

  

이선영(미술평론가)

  

속하고 싶은, 또는 벗어나고 싶은 몸


계층화된 인간 사회에서 몸과 그에 관련된 담론은 중립적이지 않고 권력과 연동된다. 지배적 권력이야 말로 자신의 정당성을 투명한 중립성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권력에 지배를 받는 측은 투명성과 중립성을 거부한다. 흑인 대통령이 나온 마당에 여전히 불거지고 있는 흑백갈등이나 특정 분쟁 지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어 테러 등은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불평등에서 야기되는 문제이지만, 그러한 차별을 낳는 가시적인 징표는 몸의 차이다. 골목마다 깔린 편의점이 내건 모토 ‘beauty & health’ 처럼, 일상생활에서도 성형이나 다이어트, 건강과 탐식 등 몸에 관련된 사항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그러한 관심은 역설적으로 안전의 위협을 반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지 않게 된다. 20세기 초반에 비해 평균수명은 두 배 가까이 늘었지만 여러 매체들을 통해 재현된 몸들은 더욱 불안하다. 



교통사고에도 끄덕없는 인간의 모습 (호주 빅토리아주 교통사고위원회)


몸의 불안은 편재하는 위험으로부터 온다. 위험은 불평등, 즉 차이가 아닌 차별로부터 온다.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고 그것이 가시화됨으로서 야기된 상대적 또는 절대적 박탈감은 ‘위험 사회’를 낳았다. 이러한 위험에의 자각은 몸을 현대의 문화 예술 담론에서 주요 항목으로 만들었다. 일견 누구한테나 자연적으로 주어진 듯한 자명한 몸을 새삼스럽게 말하려는 이들은 당대의 상징적 질서가 규정하는 몸을 문제시한다. 가령 백인 남성 기독교인은 흑인 여성 이슬람교도와 달리 현대화된 세계에서 훨씬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후자와 달리, 굳이 몸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몸은 표준이기 때문이다. 표준은 다른 이들이 통과해야 할 지배적 규범으로, 상징적 우주를 지배하는 언어이다. 그러나 표준이 아닌 자들, 즉 표준에 맞춰야 하는 이들에게 표준은 더 이상 투명하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몸을 지배적 표준에 맞추려는 노력은 미용성형 수술의 역사에서 선명하다. 


샌더 길먼은 [성형수술의 역사]에서 신체를 아름답게 개조하는 근대 수술의 역사에서 첫대목은 인종화 된 얼굴에 대한 수정의 역사라고 밝힌다. 즉 19세기에서 현재에 이르는 근대 미용성형 수술의 역사가 인종적 차이의 징표로 보이는 것을 고치는 얼굴 수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백인으로 간주된 이상형들은 아름다움과 매력뿐만 아니라 누가 용인 받을만한 사람이며 누가 신뢰할만한 사람인가를 알려주는 표시로 간주되었다. 지금도 아시아계 사람들은 ‘납작한 얼굴과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키 작은 사람들’로 정형화 되어 있으며, 서구에서 ‘우둔함, 수동성, 감정부족’과 동일시되는 ‘밋밋한’ 얼굴을 바꾸기 위해 쌍꺼풀 수술을 하고 콧대를 높이고 코끝을 수정한다. 명백하게 어떤 인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작은 얼굴과 하얀 피부’ 등, ‘보편화’된 ‘미인’의 기준이 있다. 샌더 길먼에 의하면 외형을 고치려는 욕망은 자신이 동일시하고 싶거나 동일시해야 하는 집단의 일원처럼 보이는 것에 있다. 


동일성과 달리 이질성은 눈에 띈다. 이러한 이질성을 부정이 아닌 긍정의 가치—가령 흑인 민권운동의 모토가 된 ‘검은 것이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 같은—가 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개 주변적 존재로서의 소수인종은 다른 사람처럼 보여서 눈에 띄지 않고 싶어 한다. ‘그들’처럼 ‘자연스럽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이다. 미용성형수술은 인간이 어느 집단에 속하고 싶어 하는지, 또는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성형을 통한 행복추구는 배제와 포함의 명확한 범주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뜻한다. 몸을 말하려는 자들은 대개 몸에 대한 지배적 담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소수이다. 소수의 입장이 다수가 되어감에 따라 소수자의 입장은 점점 보편성을 가지게 되었다. 몸은 이성의 투명성에 대응하는 자연의 불투명성으로 간주되어 왔다. 자연을 특정한 방향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복해온 과학기술은 몸의 불투명성, 즉 마지막 남은 어두운 대륙을 계몽의 빛 아래에 환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지식은 권력이고, 권력은 이익을 낳는다. 20세기에 이미 일어난 정보혁명과 결합된 생명공학, 그리고 21세기의 지식정보 사회에서 몸에 대한 담론은 정치적 지배만큼이나 막대한 이익을 낳는 사업이 되었다. 그러나 몸은 단순히 생물학이나 미학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미술은 시선-지식-권력이 몸을 재현해온 방식들을 보여준다. 당대의 지배적 시선에 의해 재현되어온 몸은 미술의 역사부터 제국주의 시대의 인상학이나 우생학, 그리고 다이어트와 미용성형수술의 역사까지 두루 관철된다. 몸의 담론은 전(前) 근대시대의 공포나 통제에서 근대적 규율과 훈육을 거쳐, 현대(포스트모던)의 자기조절과 욕망 등으로 점차 무게 중심을 바꿔왔지만, 권력의 작동방식이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근대 계몽주의는 물론 정보혁명과 더불어 편재하게 된 미시 권력, 즉 생체 통제 권력의 망은 다양한 이미지의 역사에 드리워져 있다.

   

이원론적 세계관에서의 몸의 재현


하나, 또는 여럿의 세계를 둘로 나누는 이원론적 사고는 몸을 정신의 아래에 놓여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따르면 몸은 물질이고 자연이다. 만약 그것에 어떤 성이 부여된다면 그것은 여성이다. 그것은 정복의 대상이면서도 또 완전히 정복할 수 없는 이질적 존재이다. ‘정신’ 앞에 있는 ‘몸’의 위상은 어떠했는가. 수전 보르도의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에 의하면, 플라톤이 생각한 몸은 우리의 인식에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즉 몸의 믿을 수 없는 감각과 변덕스러운 정념이 끊임없이 우리를 속여서 일시적인 환영에 불과한 것을 영원한 실재로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이돈]에서 정념은 철학자가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지만, [향연]에서 정념은 그러한 추구를 유발한다. 이원론적 사고는 직관적으로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래서 니이체를 비롯해 플라톤적 사고에 도전을 꾀한 철학자들은 몸/이성의 관계를 거꾸로 뒤집어서, 몸이 이성이며 영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신을 통해 몸을 초월하려는 사고는 여전하여, 생각하는 주체와 객체(대상)를 나눈 데카르트로부터 17세기 이후 기계론적 과학에 이르기까지 몸은 통제와 조절의 영역이 되어왔다. 이때 주체가 객체를 재현하는 시각의 힘은 강하게 작동한다. 몸은 보고 보여 진다는 사실 그 하나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회가 강제하는 규율화를 넘어서 스스로 감시하고 조정하는 권력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유일한 밑천인 육체를 겨냥한다. 전근대적 공개 처형이나 고문부터 사적영역에서 각자 면밀하게 관리해야할 개인의 몸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지배적 시선은 어떤 육체가 정상인지 규정하며 이러한 규정들은 내면화된다. 권력은 억압이 아니라 쾌락의 장이 되기도 한다. 사도매저키즘같은 성적 하위문화나 지배적 규범에 따라 몸을 정형화하는 노력은 쾌락을 자아낸다. 스펙터클의 시대에 공적으로 전시되는 몸들은 자발적 기아나 수술 등, 고통에서 끌어내는 자학적 아름다움이 팽배해 있다. 풍요의 시대에도 먹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미모와 날씬함에 대한 욕망과 강박관념은 어제 오늘 일의 문제는 아니다. 그 역시 이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오랜 역사를 가진다. 캐롤 M. 코니한은 [음식과 몸의 인류학]에서 서양의 유대-기독교적 사고는 이원론적 절대주의로, 절대적인 선과 악, 절대적인 강자와 약자, 절대적인 믿음과 불신 등의 분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본다. 유대-기독교적 태도는 선과 미덕 등을 유지하는 종교적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죄와 미덕, 벌과 은총, 타락과 구원 등을 비교 하면서, 폭넓은 인간의 가능성 대신에 파멸 혹은 완전히 반대되는 완벽함을 추구한다. 몸에 대한 정신의 통제력을 규정하는 주요한 두 가지 방법은 단식이나 순결이다. 캐롤 M. 코니한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성을 단단히 통제하였고 ‘식욕은 성의 지표’로 여겨졌다. 정신분석학이 아니더라도 입(식욕)과 성기(성욕)는 곧잘 연결되곤 했다. 빅토리아 시대는 그러한 강박관념이 강했던 때로 기록된다. 그 시대의 여자들은 식욕을 저속하고 여성답지 않고 비정신적이고 부도덕한 것으로 생각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수태고지](1849-1850)


가부장적 세계관에서 음식은 하류계층, 고된 노동, 대식, 그리고 육체적 추악함으로 연관된 것이다. 현대에 만연한 다이어트 강박관념을 볼 때 음식과 관련된 욕망을 체계적으로 억제하는 것을 정신과 금욕주의의 승리로 보기에는 그 대가가 너무 컸다. 자연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듯한 비정상적인 체형을 모델로, 굶어가면서 만든 날씬한 몸, 감각적 본성과의 그 힘겹고 끝없는 투쟁이 자기통제와 조절의 가장 큰 성과인가. 그것은 몸과 여성적 특성에 대한 부정, 더 나아가서는 삶에 대한 부정이다. 캐롤 M. 코니한은 거식증의 특징인 지나친 날씬함을 추구한 자발적 기아는 특정 형식의 정신적 노예를 만든다고 강조한다. [음식과 몸의 인류학]에는 흥미로운 연구가 인용되어 있다. ‘(미국)여자들이 중대한 권리를 요구할 때마다 그만큼의 마른 체형을 요구하였다’(체르닌). 날씬함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낭비되는 심신의 에너지를 생각할 때, 말라빠진 아이 같은 무성의 존재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이상적 전범으로서의 고전적 미학


미술에서 몸이 재현되는 가장 오래되고 일반적인 방식은 누드이다. 비정상적으로 마른 몸이 상찬되는 요즘 기준에 따르면 그러한 누드 상들은 풍만해 보인다.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에 의하면, 누드란 무방비한 신체(naked)가 아니라, 균형 잡힌 건강한 육체, 즉 재구성된 육체의 이미지이다. 그리스인들이 창안한 예술 형식인  누드는 비례를 중시했다. 비례는 자연이 아닌 신성한 세계를 모방한 관념으로, 예술적 완벽성과 거리감—예술을 특징짓는 ‘무사심성’--을 주었다. 이러한 관점은 몸을 비롯한 명확한 참조대상이 사라진 근대 형식주의 미학(칸트, 그린버그)에서도 발견된다. 현대예술에서 재현주의가 쇠락함과 동시에 누드의 미학은 약화 되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예술가들은 무의식적으로 누드로부터 그들의 척도감각이나 비례체계, 그리고 기본적인 형태를 끌어냈다. 케네스 클라크의 벌거벗은 몸과 누드의 구별은 누드가 단지 벌거벗은 몸뚱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걸쳤음을 암시한다. 

뒤러, [아담과 이브](1507)



1936 베를린 올림픽 포스터


누드는 시대를 초월하고자 하지만, 그것이 문화적인 규칙인 한 역사적이다. 누드는 서구를 고대와 등치시키며 필요할 때마다 고대의 부활을 추동했던 고전주의 미학들의 참조점일 따름이다. 몸의 재현에는 규범이 따르고 당대의 지배적 시선이 관철된다. 누드는 겉보기와 달리 보이지 않는 두터운 그물망으로 칭칭 감겨져 있는 것이다. 니콜라스 미르조예프는 [바디스케이프]에서 재현의 과정에서 신체는 그 자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로 나타나기에 신체는 하나의 대상이기보다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시각적 기호가 교환되는 장소로서의 몸은 정치적이다. 정치적 몸은 세계 대전에서의 패배의 분열로부터 남성 신체를 재구축 하고자 했던 나치의 예에서 전형적이다. 게오르그 부쓰만은 [나찌 조각]에서 그들이 조각이 고대 그리이스-로마 시대의 고전적 작품과 관련된다고 본다. [나찌 조각]에 의하면, 잘 손질되고 발달된 근육을 가진 남성상들은 초인적인 형태를 한 이상적인 타입이다. 


그들은 확신성, 긍지, 자의식, 명료성, 일관성 등 새로운 독일의 개념과 국방의 의지를 형태화 하였다. 부쓰만에 의하면 남성상은 대체로 실물보다 큰 크기의 결의로 가득 찬 긴장된 포즈로 공격적인 성향을 나타내며, 그러한 전사를 낳는 여성은 우아하고 헌신적이며 순응하는 포즈가 많이 나타난다. 그녀의 모델은 오래된 전통을 가지는 성모상이다. 우베 그로쓰만은 [나찌 회화에 표현된 여성상]에서, 아이에 둘러싸인 행복한 어머니와 ‘건강한 신체에 대한 기쁨’으로 가득 찬 여성들의 몸매의 표현을 예로 든다. 나찌가 ‘우량종 출생’이라고 불러서 가열시킨 결혼과 모성에 대한 권유는 다음과 같은 선동에 잘 나타나 있다; ‘여성들 역시 전투지에서 싸운다. 그들은 아이를 출산함으로서 말하자면 우리민족을 존속하게 하는 투쟁에서 싸운다’(히틀러) 종족을 유지 재생산하는 여성은 신성한 본능을 가진다고 간주된다. 


전쟁 중 남성은 전쟁의 중요한 작전을 수행하고, 여성은 ‘고향 전선’에서 ‘민족의 어머니’라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가장 독일적인 예술을 주창한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뒤러를 게르만적 양식의 본질적인 정초자’(샌더 길먼)로 적극 활용하는 등, 근대 제국주의가 고전주의적 규범을 자주 호출한 것은 흥미롭다. 샌더 길먼은 1930년대에 이미 세계 각국의 독재 정부들은 완벽한 인체 형태와 통일된 체격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음을 밝힌다. 인종에 대한 이데올로기가 독재체제와 결합되었을 때의 역사적 악몽을 인간은 완전히 이전시대의 것으로 만들었는가. 세계 곳곳에서 터지는 ‘왜래 인종’과 관련된 사건들을 그렇지 않음을 알려준다. 전시 상황이 일상적인 경쟁의 단계에도 몸의 상황은 여전하다. 그것은 성형이나 다이어트, 화장법이나 섭식 방식, 요컨대 소비의 방식을 통해 관철된다. 


성형수술이 시작된 것도 근대였는데 고전주의 미술이 전범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근대의 의사는 신체의 해부학적 아름다움에 대한 편람을 출간할 때 고전주의를 참조한 규범적 신체를 제시했다. 가령 여성의 완벽한 가슴에 대한 모델로는 여성의 가슴을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을, 완벽한 남성 토르소로는 고전기 그리스의 조각상을 사용하는 식이다. 고전적 완벽함을 이상적인 신체의 아름다움으로 제시하는 의사는 이목구비와 몸의 미를 창조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질 만도 했다. 샌더 길먼은 cosmetic, 혹은 beauty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도 ‘아름다운’이라는 의미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의사업계는 미적인(aesthetic)이라는 고전적 표현을 사용했다고 한다. ‘미적인’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고전적 분위기는 이 분야의 정통성과 전문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미용실 종사자들도 처음엔 자신을 cosmetician이라고 부르다가 슬그머니 esthetician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과학기술과 연동되는 생체 정치학적 통제 권력


미용성형은 정신에 작용하기 위해 가시적인 신체를 교정하는 수단으로 정의된다. 샌더 길먼은 미용성형 수술과 근대성의 등장을 연관시킨다. 그것은 그 의학이 발전한 곳이 대도시라는 것 뿐 아니라 계몽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변형가능성은 르네상스의 약속이었으며 계몽주의 시대에는 정치적 강령이었다. 샌더 길먼은 근대 미용성형외과 문화의 초석을 제공한 것은 누구든 행복을 얻기 위해 자신을 개조할 수 있다는 근대 계몽주의의 이념이라고 지적한다. 계몽주의의 약속, 즉 당신도 우리가 될 것이며, 우리는 모두 행복해질 것이다. 미용 성형 수술을 가장 중요한 목적인 행복은 스스로를 변형시킬 수 있는 개인의 자율권과 관련된다. 그러나 그러한 자율성이 당대의 유행과 이에 따라 시술이 가능한 기술력, 그리고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능력에 따른다는 것이 문제이다. 끝없이 변해야 한다는 근대의 주문은 몸에도 들이닥쳤다. ‘자기 자신이 되라’와 ‘자신을 변화시켜라’ 또는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라’는 강령들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한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구호는 근대세계의 약속인 동시에 저주인 것이다. 변화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 가령 아름다움은 여성으로 젠더화 되어 있다. 사회가 보수화될수록 여성의 창조력과 경쟁력은 종족의 재생산과 그것을 용이하게 하는 미모로 가늠된다. 몸의 차이가 권력의 차이와 연동되는 몸의 이미지들은 매우 구태의연한 것 같지만, 지역을 넘어 전 세계적인 경쟁과 전쟁이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이분법적 모델이다. 수전 보르도는 [참을 수 없는 몸의 무거움]에서, 보다 심층적으로 이원론과 젠더의 관계를 묻는다. 그녀에 의하면 이원론적 도식은 젠더화 된다. 보부아르의 말대로 ‘육체의 고유한 모든 속성이 여성에게 덧씌워진다’ 활동적인 영혼과 소극적인 육체라는 이원론은 젠더화된 것이다. 이는 젠더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이원론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가장 강력하다. 원초적인 물질로서의 여성과 대조적으로 남성은 자신을 ‘순수 이데아, 하나이며 모든 것인 절대 정신 같은 불가피한 것으로’ 상정된다. 


자신이 비롯된 모태와의 절연은 여성보다 남성이 더욱 강력하다. 유아기의 혼돈스러운 육체적인 상태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나, 오염되지 않은 인간성은 남성에게 속하는 것이 되었다’ 이분법의 모델이 작동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영역은 과학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뫼비우스 띠로서의 몸]에서, 철학이 정신과 몸을 대비시킬 경우에 남성을 정신, 여성을 몸으로 설정한다고 본다. 수동적인 대상인 몸은 기계화 된다. 주디 와츠맨도 [페미니즘과 기술]에서 17세기에 들어와서 몸은 기계로, 의사는 기술자나 기계공으로 바라보는 데카르트 식 모델이 부상하여 생명 의료과학의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말한다. 주디 와츠맨에 의하면, 과학은 중립적이지 않다. 사회전반의 지배적인 사회관계들이 과학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는 스스로 발전하는 기술혁신의 산물이라기보다, 자본소유주와 경영진이 지배를 위한 투쟁에서 의도적으로 사용한 중요한 무기였다. 기술 발달 과정은 다양한 사회적 이해관계에 의해 사회적으로 구조화되고 문화적으로 유형화된다. 


영화 [브라질](1985)에서 성형수술 장면


생명공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단순히 도구화 대상화되는 육체를 넘어 인간의 형질설계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규명된 유전자를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유전자를 설계하고 기관들을 부품처럼 교체할 수 있는 신체부품 시대도 가까이 다가왔다. 젊음과 장수에 대한 인간의 오래된 욕망은 외형의 변화를 넘어서 유전자나 세포의 수준에서 결정되어 간다. [성형수술의 역사]는 이러한 방식의 하나로 클로닝의 역할을 주목한다. 인류라는 종이 더욱 건강해지기 위해서 완벽한 인간의 복사물을 복제하여 각각의 것이 새로운 생명주기를 반복적으로 시작함으로서 영원한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생명을 기계적으로 복제한다는 생각은 예술적 상상을 고무시켜왔다. 몸과 권력을 매개하는 생명공학은 많은 디스토피아적 상상을 낳았다. 가령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새로운 개체로 대체되면서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는 계급이 존재하는 세상을 그린다. [멋진 신세계]는 경제적 지위 뿐 아니라 생명 공학적으로 만들어진 신체적 지적 형질을 기준으로 계급을 분리하는 세계를 표현한다. 유전자에 따라 계급이 나눠지고 강화되는 세계는 근대가 계몽과 과학기술에서 유토피아를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예술적 서사의 몸통


육체는 단순히 생물학적인 덩어리가 아니라, 구성되고 해체된다. 그것을 텍스트로 지식-권력의 요구에 의해 재편집된다. 인간 사회 속에서 재현되는 몸은 동물적이거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의미가 직조되는 곳, 더 정확히는 장(場)이다. 텍스트로서의 육체란 몸이 텍스트처럼 간격과 차이로서의 흔적을 드러낸다. 텍스트로서의 몸은 백지상태가 아니다. 육체가 텍스트라면 텍스트 또한 육체이다. 피터 부룩스는 [육체와 예술]에서 육체는 의미의 원천이 되는 동시에 중심이고 육체를 서술적 의미의 주매개로 삼지 않고는 이야기의 서술이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피터 부룩스는 프로이트, 멜라니 클라인, 자크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자를 따라서 육체는 상징화의 장소를 제공하고 궁극적으로 언어자체의 장소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육체가 정신에 반대되는 타자이며 또한 무의미의 영역에 속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육체가 정신의 물질적 기반이라는 점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 [study after Velazquez I] (1950)


기호학적 의미론적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재현은 육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한편 언어는 육체를 원초적 지시대상으로 하나로 하는 상징체계, 즉 물질적 실체가 있는 언어로 거듭나려고 한다. 그러나 육체는 단지 사회 언어적 구성물, 즉 특정한 담론적 관습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만 간주될 수 없다. 사회 문화적 육체는 언어적 구성물, 즉 이데올로기의 산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물질적 육체를 전(前)문화적이며 전언어적인 것이다. 가령 고통이나 육체의 종말인 죽음 또한 단순한 담론적 구성물이 아니다. 몸이 생물학적 본질이 아니라, 문화적 각인에 의해 구성되고 생산되는 것을 강조한 나머지, 마치 몸이라는 것이 인간이 택하는 의미대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도 오류이다. 몸의 물질성은 남아 있다. 몸은 실재론적 사고의 바탕이다. 몸의 물질성은 끝내 정복되지 않는 영역을 남겨둘 것이며 물샐틈없어 보이는 체계에 대항하는 저항의 원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이전시대보다 훨씬 가변적이고 유연해진 것은 사실이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유목적 주체]에서 들뢰즈를 따라 신체를 고도로 구성된 사회적 상징적 힘들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으로 본다. 신체는 힘들의 유희요 강도들의 표면이자 원본 없는 순수한 시뮬라크르이다. 몸은 존재가 아니라 되기의 장이다. [유목적 주체]는 니이체로부터 차용한 들뢰즈의 되기라는 개념이 차이의 적극성에 대한 긍정이며 변형의 복수적이고 항구적인 과정을 의미한다. 목적론적 질서나 고정된 정체성들은 복수적인 되기의 흐름을 위해 폐기된다고 본다. 유목이나 리좀같은 개념 또한 차이를 색다르게 사유하기 위한 참조이다. 유목과 리좀은 욕망을 만나 수많은 타자들과 자아를 연계하는 것이다. 육체를 텍스트같은 각인양식으로 보는 것은 단순히 몸을 비물질화한다기 보다는, 몸과 권력의 상호작용을 탐색할 때 유용하다.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특정한 유형의 몸으로 만들어내는 각인양식은 몸은 만연된 권력의 요청에 적응하게 된다고 본다. 그래서 몸은 문화적인 요청에 적합한 몸이 되거나 부적절한 몸이 된다. 그것은 미셀 푸코가 ‘자아 생산의 테크닉’이라 불렀던 것이다. 몸이 훈육체계의 그물망에 걸려든다는 것은 한주체가 순응적이든 아니면 전복적이든 간에 그 주체의 사회적인 효율성의 전제조건이 된다. 푸코에게 몸은 권력의 대상이며 표적이자 도구이며 권력을 작동시키는 가장 거대한 투자의 장이다. 몸은 다양한 문화적인 요청에 따라 다양하게 이용될 수 있다. 권력의 요청에 부응/저촉되는 몸의 문화적 각인 효과를 생각할 때, 재현의 역사는 중요하다. 다이어트와 성형은 일상 속에서 매순간 확인되는 재현의 정치학으로서의 몸의 실상을 보여준다. 물론 몸은 완전히 통제될 수 없으며 예측 불가능한 면이 있다. 이렇듯 코드화될 수 없는 부분이 예술과 몸이 만나는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출전; 제16회 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세미나 '가상의 정치'(미디어 극장 아이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