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회 서울국제 뉴미디어 페스티벌의 글로컬 구애전(Glocal Propose) 작품들을 보고
이선영(미술평론가)
뜨거운 폭염이 계속되고 있는 요즈음 같은 시기에는 영화관의 인기가 높아진다고 한다. 시원한 실내의 푹신한 의자에 푹 파묻혀서 많은 자본과 기술, 노동력이 투자되어 생산된 화려한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진 이들에게 쾌적한 휴식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올해 16회를 맞는 서울 국제 뉴미디어 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상영작들, 특히 홍대 인근 여러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영상이나 영상 설치 작품들은 쾌적한 소비로서의 문화와는 거리가 있다. 일단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꼼꼼히 챙겨 보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야 하고, 전시된 작품들 역시 관객의 상호 작용을 요구하곤 한다. 영상으로만 볼 수 있는 작품도 애써 생각할 거리가 많다. 감각의 촉수 역시 곤두세워야 한다. 인터넷을 비롯한 미디어 환경은 항목별로 나열된 선택사항을 순조롭게 소비할 수 있는 눈과 손가락 운동 외에 다른 몸의 활동을 축소시킨다.

그러나 그렇게 보편화된 미디어 문화는 관념적으로만 자극적이거나 냉소적인 유머 등으로 잠시의 관심을 끌고 사라질 것들을 늘려나갈 뿐이다. 정치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소비된다. 이 가상들이 자극과 권태가 반복 되는 우리 일상을 채우는 것들이다. 가상은 자본의 날개를 달고서 실재를 식민화한다. 이러한 일방적 흐름에 역행하여 전신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은 소비문화를 넘어선 예술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몸의)변모만이 (정치적)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대규모 흥행을 전제로 투자되는 주류 영상문화에 대한 대안적인 성격을 띄는 축제는 다소간의 불편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몸의 상황은 사고와 감수성에서도 마찬가지로 관철된다. 대안의 문화는 미디어 혁명에 의해 몸의 편리를 위해 잃어버린 것들을 찾고 있다. 몸은 점차 확장되고 있는 가상의 문화가 아직 완전히 어쩌지 못하는 실재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기술이든 정치든 몸은 아직 완전히 재현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또한 그만큼 맹목의 영역이다.
몸이 진정 안팎으로 재현 가능, 즉 앎을 통한 소유와 지배가 가능 하다면 인간은 신의 영역을 넘보게 될 것이다. 소유와 지배는 경쟁과 전쟁만을 고무한다. 그리고 경쟁과 전쟁만이 자본의 이익을 가능케 한다. 미디어 혁명을 낳았던 기술들이 군사기술과 관련되어 발전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상업주의 역시 소리 없는 전쟁일 뿐이다. 그러한 소유와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예술은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도 새로울 수 있는 몸과 대화해 왔다. 또한 축제라는 형식은 몸들 간의 대화를 고무한다. 아트스페이스 오, 갤러리 메이, 미디어극장 아이공 등 홍대 인근 3개 전시장에서 열린 글로컬 구애전에 출품된 11개 영상-설치 작품들은 매우 다양했지만, 미디어 혁명과 더불어 확장되어가는 가상과 길항관계에 있는 실재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호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코드화될 수 없는 것들이 점차 퇴출되고 있는 가상의 시대에, 실재는 억압되는 것이면서도 반복적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계의 지대에서 곧잘 발생한다. 미술도 영화도 ‘아닌’이 아니라, 미술이며 영화인 독특한 지점들에서 소통의 실험을 지향하는 뉴미디어 페스티벌은 서로를 배제한 채 멀어져 가는 눈(의식, 기술)과 몸(무의식, 예술)을 뒤섞어 왔다.

김바론, 송이랑, 김형준, [벼룩 서커스], 10min, interactive video installation, 2015년. 미디어극장 아이공. 뉴미디어 아트 전시제 아이공상 수상.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우리의 몸을 의식하게 하는 작품 군이다. 작품 [breathscape #1](이지선)은 숨 쉬는 사람의 배로 만들어진 풍경으로, 몸과 대지라는 실재를 연결시켰다. 작품 [오필리아](조이경)는 유명한 그림을 참조 점으로 해서 익사와 표류 사이를 떠도는 가혹한 현대를 심미화 된 몸으로 표현한다. 퍼포먼스 형식으로도 보여준 작품 [electric waves](송주관)는 가상공간의 에너지의 흐름을 몸의 리듬과 교차시킨다. 피아노 건반을 직접 두들기지 않아도 연주할 수 있는 작품 [piano in orbit](박선우, 박채린)은 몸의 작동 범위를 원격화 한다. 서커스의 부분 장면들을 만지면 반응 하는 작품 [벼룩 서커스](김바론, 송이랑, 김형준)의 인터페이스는 촉각적이다. 이 작품이 작동할 때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놀라움을 선사하는 신기한 몸 기술을 가능케 하는 것이 고통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들 작품들은 눈이 즐거운 만큼이나 패턴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패턴, 또는 작가의 비전이 순조롭게 펼쳐질 수 있는 보다 진전된 기술력 또한 요구된다.
그 다음 주목할 만한 작품군은 매끄럽게 육체를 반영해줄 것을 약속하는 사이버 거울을 문제 삼는 것들이다. 이들 작품에서 세상을 보여주는 ‘창’은 도처에 균열이 가있다. 특히 영화인이 아닌 조형 예술가들의 영상은 거칠 수밖에 없는데, 이 단점을 오히려 매체의 물질성을 강조하는 장점으로 전화하는 것이다. 작품 [surface](유소영)는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에 있는 투명한 막을 ‘오염’시켜 불투명하게 만든다. 유명한 영화의 장면을 프린트한 필름이 둔탁한 소음을 내면서 돌아가는 작품 [측정의 메커니즘](변재규)은 영화가 단순한 현실 반영이 아니라, 구성(해체)의 매체임을 일종의 조형영화의 어법으로 표현한다. 작품 [reality in the jar series](이상욱)는 매체를 통해서 인지적 확장을 꾀했던 영상의 역사에 자신의 작품을 포함시킨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실험이 한 단계 씩 확장될수록 주체의 중심적 위치가 흔들림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매체가 몸만큼이나 불투명하다는 사실은 모더니즘 이후 상식이 된 상황이므로 그다지 새로운 점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불투명성이 순응인지 저항인지의 문제도 아직 대답되지 않고 있다.

강현구, [사운드 드로잉-북아현동 앙상블], 4min, two channel video & sound installation, 2015년. 뉴미디어 아트 전시제 최고구애상, 관객상 수상.
시간의 흐름을 타고 전개되는 영상은 서사를 내포하게 되는데, 그 서사의 근본적 바탕이 되는 것은 의식과 논리이기 보다는 무의식과 몸이다. 서사의 주체가 계몽적 어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카메라는 작가가 보여 주고자(또는 말하고자)하는 것 외에, 그렇지 못한 것들도 더불어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작품 [drift klang #1,2,3](김령문)은 작가가 부여한 어떤 상징물이 끝없이 흘러가고 부유하는 과정이 있지만, 내적 서사의 비중이 너무 큰 나머지 소통의 문제를 야기한다. 작품 [오래된 자막](이소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빈 화면은 눈을 심심하게 하며, 그 대신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주체를 중심에 놓는 보기가 아니라 타자의 소리에 귀기울일수록. 그 작품이 현대사회에 결핍된 것으로 암시하는 인간적 관계가 가능할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삶의 결이 축적된 자리들이 파괴되고 추상적인 공간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선율로 만들고 이를 시각화한 작품 [사운드 드로잉-북아현동 앙상블](강현구)은 재개발지 풍경을 비판과 고발 일색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공감각적인 그의 작품은 비극성과 서정성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것은 단순한 ‘네거티브’의 재현이 아니라, ‘포지티브’의 생성이 정치와 다른 예술의 몫임을 알려준다.
출전; 대안영상문화발전소 아이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