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화된 언어로서의 예술작품
이선영(미술평론가)
동양화를 전공하는 젊은이들의 관심사는 자연과 인간, 일상과 매체 같이 광범한 분야에 걸쳐 있었고, 매체도 캔버스부터 디지털 미디어까지 특정과를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그것은 그들이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실험하는 단계에 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가능성들이 현실화되어야 하는 시간들이 점차 가까워 옴은 기대이자 두려움이기도 할 것이다. 졸업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되지 않고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습득했던 지식과 경험을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 그것은 광범위한 가능성이지만 단지 가능성으로만 머무는 추상적 단계를 벗어나서 하나씩 구체화 되어야 함을 말한다. 구체화를 통해 영역은 좁아지지만 밀도와 강도를 높일 수 있다. 예술 또는 예술에 대한 담론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머나먼 이야기가 아니다. 허수가 많은 큰 이야기도 아니다. 나오고 나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예술은 제대로 나오기 까지 끈질기게 보살펴야 하는 그 무엇일 뿐이다. 작품은 시행착오를 포함한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다.
인간과 예술이 비롯된 자연은 가장 자연스러운 대상일 것이다. 자연은 그 다양성으로 인해 예술의 귀감이 되어준다. 이지민, 민선혜, 임가람, 박경희, 전혜진의 작품과 발표에는 자연이 중심에 있다. 이지민은 바다를 통해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했다. 수건에 먹을 찍어서 표현하는 기법 때문에 물을 다소건 걸쭉한 느낌이다. 검은 빛이 가세하면서 생명력의 의미는 다소간 변형된다. 그것은 원초적 기원으로서의 맑고 깨끗함 대신에 생명이 번성하는데 필요한 또 다른 생명의 죽음을 연상시킨다. 삶에는 죽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민선혜의 작은 드로잉 작품들의 선들은 무엇으로도 변모할 수 있을 것처럼 출렁거린다. 그러나 발아하는 듯한 생명력이 본격적인 회화 작품으로 옮아오면 단절감이 두드러진다. 드로잉과 달리 회화는 보다 구성적이다. 구성은 곧 해체이다. 민선혜의 회화에는 유기체가 훼손되었을 때의 불안한 경험이 반영된다. 절단면은 기계와 마찬가지로 다른 무엇과 접속될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임가람은 검은 배경 속에 심해어를 그린다. 시리즈로도 발전시킬 계획이 있는 심해어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볼 필요가 없어 눈은 퇴화되어 있고 생존을 위한 아가리만 거대하다. 신기한 모습이지만, 때로 친숙한 즉 자기 이익에만 급급한 맹목(盲目)적 현대 사회에 대한 비유처럼 보인다. 유기체는 환경의 반영이다. 볼 수도 없고 보일 필요도 없는 존재들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은 모두 무채색이다. 아직 신기한 대상을 보여주는 단계에 머물러있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먹은 빛 한 오라기도 빠져 나갈 수 없는 심해의 환경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제공할 것이다. 박경희는 바닷가에서 수집한 유리조각들을 보여준다. 깨진 병조각이 닳아서 보석처럼 변모한 것들이다. 그림 하나에 한 개씩 안치되어 있는 그것들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과정이 소유와 관계됨을 알려준다. 그림은 보이는 것을 저장하는 시각적 창고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빛 속에서 그 단편들을 만났을 때의 찬란한 느낌을 강조함으로서 소유는 향유로 고양된다. 전혜진의 풍경은 붓이 아닌 칫솔로 그려졌다. 붓질이 형태를 지향함에 비해 완전한 제어가 힘든 칫솔질은 화면의 우연성을 증가시키고 재현 대상의 단단함을 와해시킨다. 얇은 커튼처럼 드리워진 얼룩들에 내재한 촉각성은 멀리서 바라본 시점을 지양하고 시시각각으로 체험되는 과정을 표현한다. 자연 속에서의 지각과정은 작업과정과도 공유된다.
김은지, 정유진, 남유진, 최우경의 작품 속의 인간은 모래알처럼 흩어진 모습이다. 현대예술은 근대의 영웅적 주체가 소외된 개인으로 와해를 보여주곤 하였다. 김은지의 작품에서 인간은 매우 작다. 인간을 담은 중성적 공간은 무한대로 뻗어나갈 듯하다. 작품 속 인간들은 집단으로 나타나지만 사회적이지도 않다. 그저 뿔뿔이 흩어져 있는 원자들일 뿐이다. 그들의 그림자는 대부분 삭제되어 있어 더욱 비실재적이며, 평평한 화면은 그들을 삶의 구체적인 자리가 아닌 추상적인 공간 속에 메달아 놓는다. 그들은 장소에 뿌리내리지 못하며 잠시 배치될 뿐이다. 수놓아진 정유진의 작품 속 인간들도 매우 작다. 실은 인간과 인간을 엮어준다. 그러나 정보사회의 기대치와 달리 네트워크는 매우 취약하다. 어떤 줄은 연결되지 못하고 아래로 길게 늘여 뜨려져 있기도 하며, 앞뒤로 보여 질 수 있는 작품에서 뒷면은 앞과 다르다.
네크워크라는 동적 시스템을 표현하기에는 다소간 정적인 표현수단은 정보사회의 장밋빛 기대와 달리 소통에 허수가 많음을 알려준다. 번쩍거리는 인터페이스의 시대, 보자기처럼 변화무쌍한 공간관계의 가능성을 내재하는 실과 천이라는 매체는 구식으로 보여지 않는다. 남유진은 투명한 낚시 줄을 촘촘하게 심어 익명적인 현대의 대중을 표현했다. 그것들은 하나의 개체이기 보다 물성으로 다가올 뿐이다. 점묘로 표현된 평면은 반복적 수행을 통해 정신을 비워낸다. 과일 칵테일 통조림이 더 이상 각각의 과일로 구별되는 형태나 향기, 맛이 없이 오직 질감의 차이만을 가지게 되듯, 반복은 차이를 결여한다. 현대의 대중들이 그렇다. 최우경은 시선이 마주치지 않는 개인을 작은 화면들에 담는다. 화면이라는 단위구조가 많아질수록 조합 방식에 따라 가능한 관계망도 다양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감춰져있다. 그것은 화면 속 개인들이 어떤 관계를 맺든 표피적일 것임을 예시한다.
이아모, 임지원, 김지은, 조혜인의 작품에서 인간이라는 추상적 존재는 구체적인 몸뚱이로 현재화된다. 인간은 과도한 희망사항이 투사된 관념이 되었지만 몸은 현재적이다. 이아모는 빈곤국에서 볼 수 있는, 기아선상의 아이들의 등같은 피골이 상접한 몸 이미지를 통해 결핍을 표현한다. 회화 외에 실리콘으로 만든 작은 입체는 간신히 숨을 쉬고 있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선진국에서는 과도한 다이어트를 통한 또 다른 결핍감이 편재한다. 살아있는 시체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과잉의 몸과 마찬가지로 괴물이다. 메마른 등에서 솟아나는 커다란 가시들은 과도한 결핍이 두려움에 가득한 공격성으로 변모한다. 임지원은 인체로 풍경을 만든다. 인간이라는 소우주와 자연이라는 대우주가 만나는 경계에서 풍요로운 상상이 자라난다. 인체만으로 이루어진 작품에서는 경계 사이의 긴장이 사라지면서 한쪽 측면만 강화된다.
무의식은 의식을, 몸은 정신을 불러들인다. 경계 위의 관계 속에서 각각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점에서 몸은 안팎으로 탐구될 필요가 있다. 김지은의 작품에서 정신적인 압박은 몸의 압박으로 전이된다. 억눌림과 무력감이 몸의 통증을 낳아 작품 속 인체는 붉은 열기 휩싸인 채 몸살을 앓는다. 몸의 외곽선은 두텁게 강조되어 몸에 유폐된 정신의 상황을 표현한다. 몸은 한 번 더 사각형 안에 가두어짐으로서 병적 열기가 빠져나갈 구멍은 사라진다. 조혜인의 작품에서 몸은 부분적으로, 그것도 흐릿하게 표현된다. 생명체의 항상성을 가능케 하는 외곽선은 사라지고 중성적 공간에 풀려나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과정이 붓질의 과정과 겹쳐진다. 하얀 바탕에 놓인 형태는 탈색되어 바탕으로 사라질 듯하다. 구체적 배경이 삭제됨으로서 몸은 재현을 벗어난다. 죽음은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의 주조음은 새로움과 진보지만,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배경음은 기계적 일상이다. 새로움이 차이라면 일상은 반복이다. 아방가르드라는 것이 존재했던 근대와 달리, 오늘날 새로움의 자리는 출시되는 상품들이 차지한다. 과학기술 시스템에서 명백한 통일만이 (생산력의) 진보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러한 일방적 흐름과 길항 관계에 놓인다. 이소영, 박이슬, 강진영, 한지나, 남소현은 일상에서 새로움을 길어 올리고자 한다. 이소영은 달동네와 고층 아파트가 공존하는 초현실적이면서도 흔한 풍경을 그린다. 다 칠해지지 않은 미완성 작품은 생성과 파괴를 반복하는 (재)개발공화국의 면면을 전달한다. 배경의 고층 아파트 부분은 비워둔 채 달동네만 칠해진 생생한 단편은 유기적 전체의 허구성과 그 허구의 잔인함을 예시한다. 박이슬은 익숙했던 공간이 낯설어지는 순간을 연필과 먹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낯설어진 대상을 원래의 자리에서 끌어내 화면의 전경에 불러 세운다. 스케일과 규모의 변모로 인해 일상은 그 일상성을 박탈당한다. 그러나 곧 그것들은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예술은 순간이고 삶은 지속이기 때문이다.
강진영의 작품에서도 낯설어진 일상은 화면의 주인공으로 서 있다. 작품 속 비둘기는 마치 바닥에 채이는 시멘트 덩어리처럼 이질적 물성을 보여주고, 가발 쓴 마네킹과 영업시간 이전 아직 포장되어 있는 포장마차는 갑작스레 마주한 인물 같은 느낌이다. 이질적인 것이 공존하는 장소에서 도시의 산책자는 초현실주의적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참신하게 구사된 조형어법은 그러한 이질성을 극대화시킬 것이다. 남소현의 작품 속 기억의 풍경은 어눌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정확한 역설적인 표현에 실려 나온다. 작품 속 서사를 이끌어갈 인물은 없거나 최소화되어 있다. 풍경 전체가 인물의 (무)의식의 장이다. 한지나는 일상의 특징인 반복을 표현한다. 테이프를 붙였다 떼었다 하면서 남겨진 흔적은 마치 불꽃처럼 그 어느 것도 똑같지 않은 형태를 남긴다. 반복은 차이를 낳는다. 그러나 그 차이는 다시 전체화 되곤 한다. 그것은 모더니즘적 추상의 궤적에서도 발견된다.
작업을 하는 이에게 매체는 몸의 연장으로, 좀 더 효율적인 방식을 위해 매순간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서원영의 작품은 평면으로 칠해있기도 하고 칠해진 평면이 찢겨 있기도 하다. 화면은 보여지고 해독되어야할 그 무엇이 그려진 것이 아니라, 프레임에 팽팽하게 당겨진 평면임을 일깨운다. 그러나 매체의 자기지시성에 대한 최초의 각성이 지난 후, 반복되는 과정은 장식화 될 위험성이 있다. 두터운 프레임 속의 빈 화면같은 모습이 있는 안재진의 작품은 금색과 원색임 만나는 화려함으로 눈길을 끈다. 뭔가 읽어야할 내용은 프레임에 있고 안은 비어있는 작품은 안팎의 관계를 전도시킨다. 그것은 내용보다 형식이, 아니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된 현대미술의 맥락 속에 놓일 수 있다. 대상을 실시간으로 찍어서 변형해서 출력하는 강지우의 작품은 시간차와 변형을 통해서 방금 지나간 과거를 보여준다. 이러한 전자거울은 실제의 거울 만큼이나 균열과 간극이 있다. 아날로그 거울은 실제가 아닌 상상을 고무시키고, 디지털 거울은 미세한 시차 속의 변화를 강조한다. 거울의 즉각적인 자기반사는 우리의 몸을 의식하게 하며, 전자 매체는 인간적 시선이 간과하곤 하는 무의식을 포착하기도 한다.
출전; 성균관대학교 동양화과 크리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