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화 된 역사
이선영(미술평론가)
헤이리의 요나루키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진혁의 ‘over there’ 전에서, 무한 증식하는 도시 이미지는 환상적이다. 그러나 작품 속 풍경은 상상이 아닌 실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방학이 지날 때 마다 못 보던 건물이 하나씩 생겨날 정도의 (재)개발 광풍 속에서 자란 세대다. 서울 외곽에 있는 작업실 저편에는 지금도 아파트들이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서울은 아직도 확장하는 중이다. 무엇인가 무너진 자리에서 생명체처럼 몸통을 키우고 있는 시멘트 덩어리들은 실제의 생명체 같은 다양성이 없을 뿐이다. 도시화는 세계화처럼 동일성의 확장이다. 전 국민의 반 이상이 수도권에 거주하며, 또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극도의 쏠림 현상이 있는 대한민국의 현재, 어느 순간 정해진 방향성은 되돌릴 수 없는 듯하다. 진보, 또는 발전의 결정적인 단점은 그 불가역성에 있다. 더 이상 증식될 수 없을 만큼 끝까지 간 것들은 언젠가는 파국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진혁의 작품에는 진보와 파국의 끝에 다시 시작되는 순환이 있다.

over there 장지, 압축목탄, 아크릴 100x100cm 2013
동영상 작품은 이러한 순환을 33초라는 짧은 주기로 압축한다. 시간의 흐름이 내재 된 그의 작품에는 모종의 서사가 있지만, 서사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기하학적 구조이다. 지상에 우뚝 선 그 존재들은 인간을 연상시킨다. 교통체증으로 주차장이 된 길 위의 차들이 있는 이전작품이 인간 없이도 인간의 움직임을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누구보다 빨리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동차는 누구도 빨리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을 낳았듯이, 누구보다 높이 있기 위해 만들어진 마천루들은 비슷한 높이로 서있는 서로를 바라보게 했다. 여기에서 반사, 복제, 생산은 동일한 계열의 관념이다. 자동차에서 마천루로의 변화는 수평적 차원에서 수직적 차원으로의 변주를 보여주지만, 인간 없는 구조를 통해 도시의 서사를 펼치는 점은 같다. 마천루들은 대도시에서 떠밀려 다니는 대중처럼 너무도 촘촘하게 서 있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비롯되었을 대지에 깊이 뿌리 내리지 않으며, 끼웠다 뽑았다 할 수 있을 만큼 취약하다.
이진혁이 그린 예전의 도시 풍경을 보면, 아래를 허공처럼 비워놓은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그만큼 붕 떠 있는 현실을 표현한다. 또한 그것은 결코 채울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이기도 하다. 이 빈 공간 사이로 흐르는 물감 자국들은 거시적 구조에 감춰져 있는 인간의 희로애락일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수직수평으로 나뉜 추상적 공간 속 잠시 좌표 화 된다. 여기에서 한 인간의 위치는 그 어떤 좌표계에서 보다 명확히 규정된다. 그의 이전 작품에서 구글 지도를 참조로 한 작품 또한 차원을 달리하는 좌표이다. 이러한 추상적 좌표들은 인간 삶의 조건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투명성이 소비적 일상을 특징짓는 뻔한 삶으로 귀결되기는 너무나 쉽다. 전통의 어둠을 몰아낸 근대의 계몽주의에서 투명성은 잠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했을 따름이다. 관료제적 모눈 눈금은 스스로를 감시하는 미세한 감옥이 된다. 사이버스페이스에도 전형적인 조망시점은 주시된 대상에 신속하게 다가가서 그것을 파악하고 파괴할 수 있는 공격적 관점을 포함한다.

Over There 장지 아크릴 압축목탄 172x244cm 2014

over there 장지, 압축목탄, 아크릴 144x144cm 2013
이러한 폭탄 눈의 시점은 전쟁 같은 경쟁이 편재하는 사회에 걸 맞는 구조이다. 어둡고 칙칙한 도시를 형상화한 작품 [over there](2013)는 빌딩을 연상시키는 길쭉한 기하학적 형태들이 빼곡하게 공간을 채운다. 건축을 단순한 형태로 구성한 이 전시의 ‘over there’ 시리즈가 시작된 때가 2013년이다. 마치 그림자처럼 겹쳐진 표현은 공간감을 암시하지만, 나머지 공간도 곧 잠식될 것이다. 다양한 빌딩의 입체적 형태들이 단순화된 2014년 작품은 가족 유사성을 가진 형태들의 집합체로 수직적 밀도는 여전하다. 장지에 아크릴과 압축 목탄으로 형상화한 작품은 마치 먹을 구사할 때처럼 넓은 무채색의 계열을 보여준다. 그것은 단순한 무채색이기 보다는 ‘만 가지 색을 내포하고 있다’는 먹처럼 많은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것은 도시에 서식하는 비둘기가 그러하듯이 어떤 생태계에 걸 맞는 색감이다. 이진혁의 ‘빌딩 숲’이 그러하다.
깍아 지른 빌딩 틈새가 마치 속도감 있게 내려오는 단두대 같은 2013년의 도시풍경은 자연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도시 역시 위험한 장소임을 암시한다. 빌딩 위의 빈 공간이 극지방의 얼음이 녹아 무너져 내리는 듯한 2016년 작품은 묵시록적 비전을 보여주며,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빌딩 숲이 있는 2014년 작품은 문명의 황혼을 그린다. 싱글채널 작품 [A DAY-증식]은 도시가 발생하고 성장하고 소멸하며 다시 시작되는 과정이다. 실험 모형처럼 매끈한 3D 이미지는 도시 문명의 생멸 과정을 가속화한다. 발전된 기술이 필요한 마천루는 기술지향적인 이상향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에서 마천루는 선적 진보의 상징이다. 진보는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영원한 조건처럼 당연시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영원회귀의 시간; 원형과 반복]에서 말하듯이, 선적인 진보로서의 역사 관념은 특정 지역과 시대의 산물이다.


A day 증식 digital print 65x45cm 2016
엘리아데에 의하면, 17세기부터 역사에 대한 선적이고 진보주의적인 관념이 점점 강하게 대두하면서 무한한 진보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았고, 19세기에 이르러 진화론이 득세하면서 대중화 되었다. 근대를 거치면서 역사주의의 폐해가 드러난 지금은 진보가 상수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이진혁의 작품에서 선적으로 나아가는 시간은 퇴행을 암시하기도 한다. 3D영상을 디지털 프린트로 평면화한 작품들이 그렇다. 이 작품은 배치를 통해 뚜렷한 이미지에서 망점이 많은 이미지로 변화하는 과정을 강조한다. 물질과 에너지가 집약되었을 인공 구조물들의 엔트로피는 점차 늘어나고 덩어리들은 먼지로 변화한다. 구조는 해체된다. 새로운 구조는 이전의 잔해들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자연적 인공적 재해에 의해 사막화되고 있는 생태계를 비유한다. 이미 생태계의 전 사다리에 걸쳐 편재하는 미세먼지들은 이미 상당히 진척된 문명의 먼지화 과정을 보여준다. 하기야 먼지로부터 탄생한 우주가 먼지로 되돌아가는 것은 이상하지 않으리라.
‘over there’라는 전시부제는 오아시스 같은 희망을 연상시키지만, 작품들을 보면 역설적 표현이다. ‘저곳’, ‘저 너머’에는 지금 여기에는 없는 희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가 요즘 사용하는 압축목탄은 어두침침한 도시를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과열된 도시를 표현하기 위에 붉은 먹을 썼던 이전 작품과도 같은 맥락이다. 이진혁에게 먹에서 컴퓨터에 이르는 다양한 표현 수단은 작품 내용과 관련될 뿐, 고정되어 있지 않다. 모노톤의 평면성이 두드러진 그의 도시풍경은 가상적이면서도 현실의 경험과 분석에서 비롯된 실재감이 특징이다. 지난 세기말에 급부상한 포스트모더니즘 덕에 모든 것이 가상화 되었지만, 생명만큼은 아직 실재계에 존재한다. 이진혁의 동영상 작품 [A DAY-증식]은 아예 생명체가 발생하는 듯한 모양새다. 둥근 구에 선이 생기면서 구조체로 성장하는 이 작품은 배아(胚芽)의 발생 장면을 떠올린다. 미분화된 덩어리에서 연쇄적인 과정을 거쳐 기관으로 분화하는 이미지는 33초 분량으로 빠르게 지나가지만, 관객이 형태의 발생/소멸의 경로를 파악하기에는 충분하다.

A day 증식 digital print 55x150cm 2016

A day 증식 digital print 61x80cm 2016
마누엘 데란다는 [강도의 철학과 잠재성의 철학]에서, 이러한 배발생(embryogenesis)을 두 과정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는 세포들의 이동, 접힘, 함입을 통한 유기체들의 공간적 구조화 아래 진행되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중성세포들의 완전하게 특화된 근육, 뼈, 혈액, 신경, 그리고 여타 세포 유형들로의 질적인 분화 아래 진행되는 과정이다. 점진적 분화를 겪는 위상학적 공간인 작품 속 도시는 하나의 세포로부터 시작하여 유기적 구조체로 성장한다. 하얗게 탈색된 구조체는 세부들이 생략되어 있지만, 세부는 운동의 과정에 내포되어 있다. 세부와 세부간의 유기적 관계가 없다면 운동과 성장은 불가능하다. 때가되어 솔방울이 벌어지는 것처럼 꽉 찬 구조는 대상 뿐 아니라, 공간의 생산 또한 보여준다. 위성사진을 참조로 한 이전 작품에서 발견되듯, 사각형 건물은 수직 수평으로 나뉜 공간의 산물이다. 동양화의 여백을 생각나게 하는 하얀색 구조는 대상이 공간으로부터 생산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앙리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에서 공간이 사회와 더불어 변화한다고 하면서 공간의 역사를 서술한다. 앙리 르페브르에 의하면 공간의 개념은 정신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사회적인 것, 역사적인 것을 연결한다. [공간의 생산]은 발견(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공간, 대륙, 우주 등의 발견), 생산(각각의 사회에 고유한 공간적 조직), 창조(풍경, 기념물성과 장식을 겸비한 도시 등의 작품)로 이어지는 복잡한 과정을 재구성한다. 이진혁의 도시-공간은 기계적이고 중성적인 색채로 단순화되었지만, 생산된 공간을 통해 지금 사회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상시적으로 (재)개발 중인 한국에서, 공간이 그저 무엇인가를 담는 중성적인 용기(容器)가 아니라, 사회적 생산물임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작가는 공간의 생산을 이끄는 권력을 이야기한다. 그 권력은 공간을 소비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 소비자 또한 공간에 의해 소비될 것이다.

A day 증식 digital print 90x110cm 2016

A day 증식 digital print 90x110cm 2016
생산물로서의 공간은 결국 소수로 집중하기 마련인 이익 재편의 가장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작가는 그렇게 계획적으로 생산된 공간을 재현한다. 이러한 인공적 생산물에 생멸하는 자연의 주기를 부여하는 것은 자연이 더 이상 생산을 위한 원료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가 말하듯이, 자연공간은 모든 것의 근원이자 사회적 과정의 시작이며, 모든 독창성의 토대가 된다. 그래서 자연공간이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워의 빽빽함을 상징하는 차들이 사라진 자리에 풀이 얼룩덜룩 남아있는 이진혁의 이전 작품들에서 알 수 있듯, 문명은 자연에 포함된다. 그것은 문명의 시간을 가속화시켰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시간이 가속화되는 것만큼 공간도 거시화 된다. 구조가 전면화 된 그의 작품 속에서 인간은 찾기 힘들지만, 구조는 인간을 말한다. 그 속의 인간은 익명적이고 집단적이다. 스스로의 동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한 구조를 변화시키기에 무력한 존재들이다.
철학에서 인간 대신에 구조의 힘을 강조한 사조가 구조주의이다. 구조의 재생산이 아닌 구조의 변혁을 주장하는 문예 비평가 테리 이글튼은 [이데올로기 개론]에서, 후기 자본주의 체제는 담론적 정당화에 호소할 필요 없이 완전히 스스로 작용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인간 주체도 단지 그것의 순종적 효과에 불과한 통제적이며 병합적인 논리에 의해 자본주의 체제는 자신의 재생산을 확보한다. 여기에서 정치는 설교나 원리의 문제라기보다 기술적 관리와 통제의 문제이며, 내용이라기보다는 형식이다. 비판적 지식인인 테리 이글튼은 공리성과 기술공학이 지배하는 선진 자본주의의 조건이 의미 있는 사회생활을 표백하며, 사용가치를 교환가치의 공허한 형식주의에 종속시킨다고 본다. 그리고 만사가 자율적으로 작용한다는 이러한 구조적 관점으로부터 모든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비관주의가 나타난다고 비판한다. 구조들 속에서 사라진 인간들이 암시된 이진혁의 작품에도 비관적인 느낌, 즉 파괴될 숙명에 놓인 공상 과학영화의 도시처럼 음울하고 기괴한 분위기가 존재한다.

over there 장지 아크릴 압축목탄 50x50cm 2016

Over There 장지 아크릴 압축목탄 120x120cm 2014
그러나 그가 희망 또는 변화를 예시하는 대목은 구조를 발생과 성장, 소멸이 있는 역동적 과정으로 변모시키는 부분이다. 시간성이라는 축 위에 놓인 구조는 변화한다. 과거 작품에서 수평성을 잠식하던 구조(자동차들)가 이제 수직성으로 향한다. 수직성은 진보를 상징한다. 그러나 진보는 또한 파괴였다. 진보를 발전주의로 획일적으로 이해한 한국에서 더욱 그러했다. 모더니스트들은 새로운 것과 전대미문의 것을 추구함으로서 ‘창조적 파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근대적 과정은 시공간을 압축함으로서 포스트모던 조건을 낳았다. 이진혁의 작품에서 진보 또는 발전의 한계는 묵시록적인 도시풍경을 낳았다. 여기에서 수직선은 영원한 수직선이 아니다. 선은 서서히 기울어지는 곡선에 포함된다. 문명이 자연에 포함되듯이 말이다. 단기적인 전망 속에서 도시문명은 눈부신 발전이거나 종말일 뿐이다.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도시문명은 자연의 주기를 따른다. 자연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순환 과정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