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갈된 언어를 갱신하는 침묵의 기표
이선영(미술평론가)
나란히 찍혀진 3개의 점으로 표기되는 문장기호인 말없음표, 그리고 1년 365일 중 휴일을 제외한 날 수인 251이 결합된 ‘251_ellipsis’ 전은 일상적 직업의 시간과 그 외의 시간 즉 작업의 시간을 맞세운다. 교직에 몸담고 있는 이영희의 251일은 말없음표와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교육은 말에서 말로 전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사회에서 교육은 간접 대면의 방식도 발전시키고 있지만, 여전히 그 중심은 인간 간의 직접적 언어 소통에 중심을 둔다. 이때 확신에 가득한 정확한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논리 정연하게 펼쳐져야 한다. 말의 명료한 구사는 모든 재현적 활동의 기반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러한 재현적 활동만을 생산으로 간주한다. 생산자로서의 주체가 되기 위해 인간은 지배적 말을 자기화해야 한다. 이러한 위계관계 속에서 침묵 속에 있는 것들은 곤경에 처해진다. 대표적으로 자연이 그러하다. 생물학적 존재를 사회적 주체로 만드는 것은 주체 앞에 선재하는 상징적 우주의 지배적 언어를 체득함으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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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그 중심에 있다. 말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말은 경쟁력이다. 그리고 경쟁력 있는 말 또한 권력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하나 또는 몇 개의 지배적 언어가 군림하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지금도 소수 민족의 언어는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정치가들의 전직이 말과 관련된 경우가 많은 것에도 이유가 있다. 이러한 공적영역에서 침묵은 어색함, 서툼, 착오, 망각 등으로 논리의 균열을 야기하는 것이므로 억제, 배제되어야 한다. 말중심주의(Logocentrism) 사회에서 말은 공적영역을 차지한다. 그러나 대부분 홀로 ‘끄적거리는’ 작업의 시간은 그림자 노동(shadow work)으로, 대부분 사회적 피드백이 없는 고독한 시간이다. ‘우리도 그들만큼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예술이 공적 영역의 어법을 흉내 낼 때 적지 않은 부작용들이 발생하곤 했다. 이러한 분열은 개인의 시간을 유용하지만 공허한 영역과 충만하지만 고독한 영역으로 나눈다. 작가는 그 시간에 스스로와 대화한다. 누구와의 협업과도 거리가 있는 이영희의 작품들이 독백이 아니라, 대화의 방식을 고수한다.
비록 자신과의 대화가 말없음표로 가득 채워져 있을지라도 말이다. 자신과 대화를 시도하는 작가는 바로 ‘자신이면서 동시에 당신이며 당신인 동시에 그녀인 youngheelee가 되어야’ 했다. 크로키와 영상 작품 등 잠재적 현실적 움직임이 있는 이영희의 작품은 자신과 대화했던 시간을 재연한다. 영상은 통상적인 비율이 아니라 A4 종이의 비율을 갖춤으로서, 단순히 보여지기 보다는 읽혀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영희의 작품에서 기호는 물질화, 육체화 되어 있기에 투명하게 읽히지 않는다. 대신에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말없음표는 이러한 불투명성을 대면하게 하는 기호이다. 말과 말사이의 틈이 침묵이다. ‘틈’이라는 개념은 2011년과 2013년 개인전에도 전면 화된 바 있다. 지금은 자연의 틈보다는 언어의 틈에 주목한다. 움직이는 이미지인 영상에는 소리가 잠재해 있다. 그러나 작가는 소리를 없애고 최대한 시각적으로 소리를 들려준다. 그림은 물론 영상작품도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일인칭을 넘어선 제2, 제3의 가상적 주체들 간의 대화로 아우성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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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음표의 시간에 있었던 자기 안 타자와의 대화는 새로운 말을 가능하게 한다. 침묵은 무능과 불모의 시간이기 보다는 고갈된 말을 충전시키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영희 뿐 아니라, 공적 직책을 가진 이들의 ‘251’일은 때로 말을 위한 말, 말에서 말을 낳을 뿐인 공허함을 피하기 힘들다. 정보기술로 소통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현재, 말은 충전되거나 갱신되지 못하고 그렇게 기계적으로 돌고 돌아갈 뿐이다. 이러한 말들의 공전 속에서는 의미는커녕 단순한 정보조차도 건지기 힘들다. 대안의 소통을 꾀하는 예술 또한 이러한 공회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이영희의 대화는 고갈된 말에 다시 생명을 부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령 영상 작품에는 상장 같은 공식문서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패턴화 된 형태가 다시 생명을 얻어 자라고 꽃피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생명을 얻었기에 죽기도 한다. 그것들은 죽지도 살지도 않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고 소멸한다. 생명의 이면인 죽음의 이미지가 있는 이영희의 작품은 몇 년 전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과 밀접하다.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기도 하지만, 아직도 그 전모가 다 안 밝혀져 그 재현 불가능한 사건은 2014년 김중업 박물관에서 열렸던 ‘마침내 말없음표’ 전과 ‘말없음표’라는 개념으로 이어졌다. 1층 전시장에 설치된 영상작품은 액자 같은 틀에 끼워져 있어 맞은편에 있는 액자 작품과의 연관을 암시한다. 상호간에 가느다란 연결망을 가진 작품들은 여기에서 암시된 것이 저기에서 명확해지고, 저기에서 암시된 것이 여기에서 명확해지기도 한다. 영상은 문자나 문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드로잉이 함께한다. 영상작품은 액자에 끼워진 그림을 원화로 한 애니메이션 같은 모습이다. 영상은 정지된 이미지에 움직임을 부여했으며, 움직임은 일련의 서사를 동반한다. 3개의 영상은 시간차를 두고 반복해서 돌아가므로, 관객은 한 지점에서 30여분 분량의 작품을 전부 볼 수도 있고, 지나가면서 볼 수도 있다. 같은 전시장에는 영상을 책으로 만든 한정판도 몇 권 비치되어 있어서, 관객은 반복과 차이의 관계를 가지는 작품을 여러 버전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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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대화하듯이 타자와 대화하는 이영희의 대화법에서 한 번에 이루어지는 결정타는 없다. 해체주의 식으로, 비어있는 중심을 향한 끝없는 보충과 대리가 있을 뿐이다. 지하 1층에는 배접이 된 광목천에 그린 작품들이 걸리는데, 위로 날아오르는 이미지가 지하공간과 어울린다. 작품 속 식물 문양은 그 아래에 뿌리가 달려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드러나 있는데, 그 뿌리는 동시에 여체의 국부 같은 모습이다. 식물이 고정된 패턴을 벗어나 로켓이 발사되는 모습처럼 승천하는 모습은 ‘뿌리를 달고 날아오르는 대지’의 이미지이다. 여러 작품이 연속적으로 움직임의 환영을 주지만, 식물 형태 안팎에 동감을 나타내는 선들이 휘감겨 있어서 작품 하나하나도 움직임의 느낌이 있다. 살구 색 배경의 작품은 따스한 살의 느낌이 더 강하다. 누드 크로키 작품은 인체의 생명력 표현에 주력한다. 첨가된 녹색계열은 몸을 대지와 구름을 닮은 변화무쌍한 현실계에 위치시킨다. 몸의 틈새들에서 자라나는 털들이 식물처럼 보인다. 몸체와 그 틈새들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들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린다.
때로 육신은 죽음이 엄습하듯 검정 얼룩 망들과 중첩되기도 한다. 글자가 인쇄된 종이이면서 동시에 피부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 표면은 뽀얀 분홍빛 피부부터 검버섯에 잠식된 피부까지 여러 계열이 감지된다. 시작과 종점 그리고 삶과 죽음이 연결된 순환구조 속에서 접힘은 또 다른 펼침을 낳을 것이다. 상장 가장자리의 꽃무늬 패턴은 자기 자리를 벗어나 종횡으로 움직이고, 상이란 단어 역시 중심을 벗어난다. ‘이하여백’이라는 단어가 화면 전체를 채우는 작품은 중심과 주변이 자리를 수시로 바꾸는 역설의 장에서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림이 그려진 바탕은 아무 바탕처리가 되지 않은 광목으로, 한국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관장하는 천이다. 피부 위의 점처럼 자연 섬유에 남아있는 작은 얼룩들은 제멋대로 배열된 말없음표처럼 보인다. 드로잉의 성격을 가지는 이영희의 그림은 자연에 약간 더 추가하는 방식이다. 그 위에 비상하는 자수 문양과 꿈틀거리는 누드 이미지가 얹혀지며 영상은 여기에 시간의 흐름을 가속시키고, 서사를 첨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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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날아오르려는 식물문양은 탄생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또는 그 이후에도 욕망으로 고동치는 육체와 리듬을 맞춘다. 육체의 틈으로부터 식물이 자라고, 대지로부터 벗어나 요동치면서 위로 솟구치는 식물은 또한 동물적이다. 이영희의 작품에서 식물과 동물은 호환성을 가진다. 그 모두는 생물학적 욕구를 넘어서, 언어적으로 욕망한다. 욕구와 달리 욕망은 끝이 없다. 작가 인터뷰 형식처럼 제시된 영상은 그림, 책, 텍스트 등을 종합하는 일종의 영화이다. 미술 전시장에서는 보기에 다소 긴 30여분 분량의 영상이지만, 작가는 1년 12달을 상징하는, 12개로 나뉜 장면의 어느 대목에서 봐도 상관없도록 유연하게 배치했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그 누구도 ‘세상을 순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뒤죽박죽인 것들에 질서를 제공하는 것이 언어이다. 언어가 처음부터 질서정연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가능성의 가닥 중에서 몇 개가 필연화 되어 구조화 되었을 뿐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의 주장처럼 언어는 자의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나머지 배제된 가닥들을 염두에 두며 현실과는 다른 텍스트를 짠다. 텍스트는 예술과 세계를 연관시킨다. 마침표의 점 3개는 동그란 기호의 형태를 잃고 번지면서 또는 싹을 틔우면서 펼쳐지고/접혀진다. 전시장 한발자국만 나가면 매끄럽고 화려한 볼거리가 넘쳐 남을 생각해 보면, 영상은 갱지나 광목에 그려진 드로잉만큼이나 소박하다. 이영희의 작품에서 은폐되어야할 단점들은 적나라하게 가리켜지고 있으며, 그 어둑한 틈에서 이미지와 언어가 발생/발화된다. 말줄임표에는 말 이전과 이후의 더 많은 상황이 압축되어 있다. 작가는 작업이라는 침묵의 시간에 재현되기 힘든 이 전후의 상황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막막한 맥락에서 즉각적인 메시지의 소통을 원하는 ‘__줄 요약’ 식의 관점을 통하지 않는다. 정보는 줄여질 수 있지만, 예술은 단지 반복될 수 있을 뿐이다.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자신과의 대화는 영상만큼이나 매끄럽지 않다. 영상은 ‘느리고 무거운 발걸음’이란 단어로 시작된다.


작가에 의하면 이 인터뷰는 ‘생각이야말로 자신과의 대화이며 그러므로 생각하는 사람은 일인칭인 동시에 이인칭이 된다’는 야콥 그림의 말을 단서로 출발한다. ‘가려진 말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막스 피카르트) 말이다. 여기에서 말의 주체는 사라지고 미지의 주체로 수렴되는 말들만이 번성한다. 작가가 기호와 이미지를 동원하여 무한히 번식시키는 이 증식된 말 속에 작가는 있으면서도 없다. ‘자신 속으로의 침몰, 당신 속으로의 침몰, 자신인 동시에 당신인 당신 속으로의 침몰, 당신인 동시에 그녀인 그녀 속으로의 침몰, 자신인 동시에 당신이며 당신인 동시에 그녀인 그녀 속으로의 침몰...’이라는 문장은 말하는 주체가 여럿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이러한 분열은 다른 번호로 표기된 수많은 이영희와 다른 번호로 표기된 수많은 말없음표의 대면을 낳는다. 이 두 계열이 부유하면서, 일련의 형태를 만들고 때로 이미지와 결합하기도 한다. #1 ‘가려진 말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부터 #12 ‘침몰’에 이르는 장면들은 기승전결을 갖추며 어떤 목적과 핵심으로 이끄는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시대상의 부재인 이미지와 메시지가 없는 침묵이 끝없이 덧붙여지는 식으로 배열된다. 작가가 치밀한 구성작업을 통해 완성한, 염두에 둔 순서는 있지만, 그것들이 무작위적으로 보이는 것은, 12장면 모두에 침묵과 침몰의 분위기가 감돌기 때문이다. 글자와 기호들이 겹치고 무늬 화 되면서 가독성은 떨어지기에 관객은 정확히 읽기 힘들다. 바람에 나부끼는 종이처럼 바탕 면 자체가 움직일 때도 있다. 글자들이 흔들리는 일도 빈번하다. 작가는 영상을 깃발처럼 생각한다고 말한다. 나부끼는 깃발의 글자를 읽기는 힘들 것이다. 문장들은 이동하고 겹쳐지고 반전되며, 심지어는 중심을 잃고 기우뚱 한 채 움직이기도 한다. 수평면 아래로 기울어진 문자열은 복원력을 잃고 침몰하기도 한다. 이영희의 침묵은 완전한 침묵이 아니라 아직 말이 안 되는 상태, 기호들이 정확히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떠도는 순간을 말한다. 최초에는 지시대상과 그 이후에는 기의와 분리된 기표들은 카오스가 코스모스를 향하듯이 그렇게 정확한 자기 자리를 찾으려고 빈 공간을 배회한다. 의미를 위한 최대한의 가능성은 무의미로 귀결될 수도 있다.


작품의 여러 구성요소들이 안정되게 자리를 잡는 순간은 거의 없다. 세 개의 점만이 가끔 수평면에 자리하면서 말과 이미지가 발화/발생되는 점으로 작용할 뿐이다. 숫자와 문자, 기호 등이 조합된 문장은 부침을 거듭한다. 이영희의 작품에는 의미의 순간보다 그러한 순간을 가능케 하는 모색의 순간이 더 많다. 화면 위와 아래로의 움직임 뿐 아니라, 표면과 심층 사이의 움직임은 침묵 아래의 분주한 물밑 과정들을 보여준다. 씌여진 곳에 거듭해서 씌여지는 고대의 양피지 문서같이, 명멸하는 기호들은 여러 층위를 통과한다. 통과하면서 망실되거나 덧붙여지는 것들은 메시지 전달의 투명성과 경제성을 거스른다. 문양의 일부가 물방울/눈물처럼 변하는 장면에서는 격한 감정이 표출되기도 한다. 물속을 떠도는 듯한 꽃들은 피지도 못한 채 수장된 아이들을 떠올린다. 검은 밤처럼 바탕 면이 어둡게 변하기도 하면서 그곳은 또 하나의 세계임을 암시한다. 이때 광목의 점들은 밤하늘의 별이 된다. 그 안에서는 바람도 불어서 바탕 면은 좌우로 흔들리고, 기본 색 보정 기호로 나타나는 화면의 노이즈는 극대화된다.
#8 ‘더듬거림’의 장은 가장 많이 흔들리고 교란된다. 어두운 밤의 끝에 새벽이 오듯이 카오스는 코스모스를 예견하는 것일까. 말없음표 기호로부터 발생하는 많은 이미지와 이야기들은 의미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차지하는 무의미의 위치를 알려준다. ‘마침내 말없음표’(2014)전에 이어진 이 전시는 말없음표(ellipsis, 침묵)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된 전시다. 작가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시작할 때 매우 조심스럽게 통상적인 에티켓 문구들을 사용하며, 조금은 머뭇거리고 수시로 느린 어투로 더듬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형식을 띈 영상작품은 이 머뭇거리고 더듬는 부분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서, 자신을 대상화한다. 이 이상한 인터뷰는 말보다 말아닌 것으로 작가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한다. 영상에 드러나는 등장인물은 1-251명의 youngheelee이며 그녀들은 떠도는 말과 이미지의 조합 속에서 순간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물속에 떠도는 입자들처럼 안정된 순간은 없다. 카오스가 코스모스의 기원이듯이, 확실성의 기원은 불확실성이고, 의미의 기원은 무의미이며, 말의 기원은 침묵이다.


이영희가 전시 주제로 삼은 ‘말없음표’는 ‘말/없음/표’ 라는 세 항목 모두에 부재를 내포한다. 이 세 겹의 부재를 묶어줄 수 있는 것은 주체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이영희는 이 전시에서 자신을 251개로 분열시켜 그들을 타자처럼 바라보고 대화하고 분석한다. 물론 이런 게임을 제안하고 실행하는 주체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내용을 분명하게 말하는 주체는 없다고 봐야 한다. 전시부제로 말없음표를 내세운 작가는 말이 아닌 말 주변의 것들을 더욱 많이 탐색한다. 말이 낳는 말보다는, 말아닌 것이 낳는 말이 더 풍요롭다. 우리를 있던 곳에 고정시키는 동어반복은 거부되어야 한다. A에서 A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B, C, D...가 나올 수 있는 것이 일상적 소통이 아닌 예술적 소통의 가능성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선생님으로서의 이영희가 아닌 작가로서의 이영희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대안의 소통을 시도하는 모든 작가의 욕망이다. 작가는 왜 분명히 말하지 않고 말없음표에 숨는가.
주체는 무엇보다도 언어적 주체를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나의 포기는 현대 미학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가령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작가는 ‘나’라고 말하기를 포기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자신에 따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것에 따라 현재의 우리가 된다. 주체는 미지의 것에 열려 있는 것이다. 작업은 작가는 물론 독자를 변모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 251명의 이영희는 개별적 속성이 제거되어 있으며, 다중적이며 익명적인 화자의 웅얼거림은 혼란스럽다. 이영희는 더 많은 이영희를 위해 하나의 이영희를 포기한다. 예술가가 이러한 부재의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는 단순한 자기부정이나 자학이 아니다. 본질적 자아가 아니라 미지의 자아를 생성하고 만나기 위한 것이다. 예술은 자신에 이르는 여러 말 걸기를 통해서 미치지 않고서도 낯선 자기를 만나는 방식 아닐까. 미지의 자아는 미지의 작품의 짝패이기도 하다. 말없음표는 작품 속의 몸이나 자연에 내재된 많은 균열을 표현하는 것이다.


기호와 지시대상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 사이에는 불연속이 있다. 이러한 불연속 때문에 작가는 의미를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바르트가 말했듯이, 작가는 의미를 말하지 않고, 의미가 있는 장소를 말할 뿐이다. 말해진 것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으로 관심을 돌리는 이영희의 작품에서 의미의 장은 육체나 자연으로 가득 차 있다. 명확한 외곽선을 가지지 않아서인지 오염, 전염, 침범의 이미지가 대세다. 그것은 손상된 말에 해당되는 지시대상의 이미지이다. 간극과 균열이 가득한 그것들은 자연스럽지 않다. 사실은 그것이 자연의 진면목이지만 상식과 교조주의는 자연을 자명한 실체를 가진 것으로 본다. 그것이 자연을 앎으로서 소유하고 지배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인간은 다수의 인간을 대상화 도구화하고, 그것이 인간사의 많은 비극을 낳았다. 이영희의 작품에서 말 대신에 전경화 되는 것은 자연이다. 약동하는 생명의 덩어리로 나타난 인간의 육체 또한 자연에 속한다.
이러한 자연은 언어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작가는 그 둘을 계속 만나게 한다. 이러한 시도는 언어와 자연이 일치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코드로 환원된 현대의 언어는 자연으로부터 더 멀어졌지만, 근대 여명기의 철학자 루소는 [언어의 기원]에서 언어의 기원을 자연으로 보았다. 계몽주의 시대에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주장한 루소에 따르면, 정념은 이성에 앞서 인간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했다. 그러나 자연을 이성과 대조시키는 문명에서 자연은 모든 기원이 그러하듯이 순수하기도 하지만 조야하기도 하다. 자연화 된 언어는 퇴행적이다. 말없음표가 남발되는 문장에서 보여지 듯 이영희의 더듬거리는 어투는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또는 뭔가 잘못한 아이 같은 면모도 있다. 말이 방해받을 때 또는 제거되었을 때 더 드러나는 것은 몸과 무의식이다. 말의 주체가 아닌 대상인 육체는 말이 없다. 그러나 탄생 당시부터 위반적이었던 정신분석학은 말의 기원에 정신이 아닌 육체를 놓는다.

피터 부룩스는 [육체와 예술]에서 정신분석학을 따라 육체는 정신적 갈등이 각인 되는 장소임과 동시에 인간 상징의 원천이라고 본다. 비슷한 맥락에서 롤랑 바르트는 상징적 장이 오직 하나의 물체로 채워져 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 물체가 상징적 장에 통일성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이 물체는 바로 인간의 육체이다. 이영희의 작품 역시 상징적 장과 육체를 중첩시킨다. 여기에서 육체는 욕망을 낳는 장소이자 이야기의 원천이다. 피터 부룩스에 의하면 이야기들을 통해 육체는 의미생성의 장소, 즉 이야기가 각인 되는 장소가 되며, 동시에 그 자체가 하나의 기표, 즉 서술적 플롯과 의미산출에 있어 일차적 요소가 된다. 그러나 언어와 육체는 근접하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피터 부룩스는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육체, 다시 말하면 의미가 각인 된 곳으로서의 육체를 강조하면서도 육체는 지성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물 이상의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육체란 우리의 지성,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세계를 재창조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결코 포함될 수 없는 하나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육체는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물질적 육체는 전(前)문화적이며 전(前)언어적인 것이다. 모든 것을 가상화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석이 있지만, 육체의 실재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의 기술 과학은 계속 도전 중이지만, 아직 생명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 모든 것이 언어화되지는 않는다. 쾌락의 감각 특히 고통의 감각은 언어 외적인 감각이다. 이영희의 ‘말없음표’를 추동했던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악할 만한 사건이 바로 고통 그 자체의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사회는 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덮어버리려 한다. 집단적 망각을 통해 그 고통을 다시 반복한다. 작가를 뒤흔들었던 세월 호 사건은 수도 없이 회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자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을 위한 것이다. 소비사회에서는 비밀보다는 떠벌림이 모든 것을 더 빨리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더듬어진 말, 생략된 말에는 소비를 통한 소통을 지연시키는 긍정적 힘이 있다. 이 힘은 침묵 속에 침몰한 것을 다시 떠오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