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와 메시지의 스모그 안에서

  

이선영(미술평론가)

  

곧 사회로 나갈 젊은이들의 작품에 대한 18명의 설명에 대한 나의 짧은 코멘트는 오랫동안 그들의 작업을 지켜본 이의 관점도 아니고, 완성되어 있는 어떤 전시/작품에 대한 리뷰도 아니다. 8시간여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화를 통해, 동시대 젊은이들의 작업이 현실과 예술 그리고 작가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상이다. 그들의 작품은 크게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의 문제, (여)성, 일상 속의 대중문화, 회화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주제들은 사진, 영상, 설치, 회화 작업으로 나타났으며, 한 작업에서 다른 형식들이 섞이기도 했다. 젊은이로서의 앞서는 의욕 또한 문어발 같은 확장을 추동했을 것이다. 한 매체만으로는 모자라는 부분들의 보충이 남발되면 본질이 흐려진다. 물론 ‘본질’은 실재보다 가상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오늘날 도전받는 관념이다. 


그러나 미디어와 메시지가 폭주할수록 작품의 진의에 도달하는 거리 단축은 작업의 중요한 기술이 된다. 독자나 관객은 오래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것이 소비자 앞에 놓여 진 생산물의 신세가 된 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저 또 다른 절망과 희망을 낳는 새로운 역사적 조건일 뿐이다. 미디어와 메시지의 스모그 속에서 만난 빛나는 작품과의 추후적 대화는 매혹 이후의 일이다. 깊이가 생성되는 조건은 매혹이다. 정보 사회의 인간이 피상적이라는 관점은 피상적이다. 정보망이 넓은 만큼이나 깊이 침투할 가능성이 있다. 인터페이스로 대변되는 표면들도 거듭되어 중첩되면 깊이가 생겨나며, 그것이 몰입을 자아낸다. 한 화면에 많은 것을 압축할 수 있는 회화의 가능성은 아직 풍부하다. 회화적 과정에서 중요한 물질과 육체는 아직 완전히 코드화되지 않았다. ‘회화과’라고 해서 회화가 주류일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지만, 영상으로 작업을 하면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회화로 작업을 하면 왜 회화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점은 흥미로웠다. 


때로는 지나치게 까다로울 정도로, 그래서 보이지 않는 유령에 저당 잡혀 있는 것 같은 자유롭지 못한 모습으로 말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작업의 조건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 회화가 그저 자명하게 주어진 것이 아님을 의식하는 점은 대체로 발전적이다. 회화처럼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일수록 이러한 자의식은 더욱 필요하다. 한편 ‘아무 생각 없이’ 끌어다 쓰는 영상도 백년이 넘는 전통으로 그 자체의 역사를 쌓아가고 있다. 회화 앞에서의 5분과 영상 앞에서의 5분은 다른 시간이다. 우리 주변에 영상이 편재하다보니 그에 대한 대중의 심미안도 까다롭다. 그것들은 연필이나 붓보다 더 가까이 있으며, 누구나 활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상이 회화보다 더 쉽게 현실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가정에 불과하다. 도구는 투명해서 거기에 내용을 담기만 하면 된다는 가정은 매체 활용의 측면에서 보자면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도구를 초보적으로 사용한다면 그에 실려 오는 메시지 또한 평범할 수 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이다.  

    

공공영역에서의 작업-황경태, 신정애, 이은솔

    

황경태는 (재)개발 광풍에 의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단상을 영상에 담는다. 인적 없는 폐허에는 떠나간 자들의 흔적만이 스산하게 남아있다. 그는 서식지를 침해받아 도시로 내려온 멧돼지들이 사살되는 장면이나 약육강식의 생태계를 통해 자연의 법칙과 사회의 규칙이 유사함을 주장한다. 신정애는 사람이 살았던 공간이지만 지금은 아닌 공간을 무대삼아 그 속에서 자신의 상상을 펼친다. 방 한가운데 뚫린 창밖에 보이는 풍경, 즉 소실점 위치의 고층 아파트들은 여기의 미래모습일 것이다. 그녀가 찾아낸 황학동의 터무늬진 공간은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교가 된다. 이은솔은 시위 현장이라든가 정치적 메시지가 새겨진 현수막 등을 소재로 하여 색, 특히 한국 사회의 정치문화를 잘 설명하는 ‘레드’에 대한 담론의 장을 마련한다. 빨강 뿐 아니라, 파랑과 녹색, 그리고 진달래색까지, 보기만 해도 눈이 따가운 그들의 색은 실제로는 자기 색깔이 없기에 내세워진 선명성이다.

    

사적영역의 문제-조윤신, 장윤희, 박준희

    

조윤신은 벽면을 상장으로 도배한다. 그녀는 반복적 행위로 인해 다소간 지루한 시간의 흐름을 공간화 한다. 왼쪽 화면은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이 계속 찍혀진다. 영상 매체가 가지는 자기 반사성이나 반복적 시간성은 집안에서 장녀로서의 기대치에 대한 압박을 냉소적으로 표현한다. 장윤희는 집을 닭 공장과 비교했다. 너른 마당을 왔다갔다 하면서 모이를 쪼아 먹는 닭이 아니라,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고기가 되기 위해 순차적으로 가공되는 닭의 모습은 코드로 재단된 자연의 모습이다. 그것은 자연에서 일어난 일이 인간에게도 일어남을 암시한다. 박준희가 그린 토끼굴같은 이미지는 올 초에 죽은 반려 동물과 관련된다. 평소에는 사랑스럽게 마주보았던 토끼는 사물처럼 다른 시점으로 보여진다. 토끼 앞의 작은 공간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공기와 빛을 머금고 있다. 자궁처럼 묘사된 공간 안의 토끼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갔다.   

  

여/성-손수민, 최한슬, 구지원, 이푸른

    

손수민은 만남부터 이별에 이르는 남녀 남녀관계를 상황극처럼 연출했다. 두 연인은 마주보고서 공놀이를 한다. 서로 간에 오가는 통통 튀는 공들은 시트콤 드라마나 카톡 대화 같이 발랄하다. 이런 저런 상황 속에서 배치되는 다양한 크기와 색의 공들은 경쾌하긴 하지만 그다지 섬세하지 않은 언어인 셈이다. 최한슬이 활용하는 오브제인 분홍 고무장갑이나 수갑은 결혼이나 가족에 대한 여성의 부정적 관점을 표현한다. 그 사물들은 명료하다 못해 다소간 단순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기호화된 메시지들은 그만큼의 전달력이 없다. 평평한 기호가 사물만큼의 전달력을 가지려면 좀 더 입체적인 맥락의 제시가 요구된다. 


구지원은 마치 일기처럼 독백이 깔린 영상을 보여준다. 영상은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불편한 자세로 계속 화장하는 자신을 담고 있다. 영상 옆에는 고속버스에서 내려 구입했을만한 ‘패스트 패션’들이 몸은 빠져나간 채 덩그러니 놓여있다. ‘인 서울’에 대한 로망은 특히 여성의 경우 외모관리와 밀접하다. 이푸른이 진한 립스틱을 바른 채 바나나를 껍질 채 우걱우걱 씹어 먹는 장면은 유머러스하면서도 공격적이다. 거기에는 ‘과일은 껍질 채 먹어야 좋다’는 영양학적 이유 외에, 먹는 행위와 성적인 행위의 유사성이 있다. 브래지어에 대한 인터뷰는 성적 환상의 집적체에 대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일상 속 대중문화-배선영, 심예진, 이지은, 김소진


배선영은 사진을 통해 돌연히 다가오는 현실을 포착하려 한다. 사진을 찍다보면 의도하지 않은 부분이 함께 묻어나오는 경우가 있다. 사진은, 영상도 마찬가지지만 시각적 무의식을 길어 올린다. 재미와 의미를 담은 우연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지 않기에 좀 더 많이 찍고 치밀한 분류화가 필요하다. 심예진은 만화를 포함한 영화의 장면을 짧은 리듬으로 편집한다. 아래의 자막은 유명한 영화 책자의 내용으로, 기계적으로 읽혀진다. 뮤직 비디오같은 리듬으로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장면들은 무의미의 집적체로, 교과서적인 책의 선형적 논리 및 의미와 대조된다. 


이지은은 악몽을 길몽으로 걸러준다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부적을 차용하여 싸이코 드라마를 만든다. 유령처럼 변장한 그녀는 올가미처럼 내려뜨린 구조물로 가득한 폐쇄된 무대를 전전하면서 비명을 지른다. 그것은 행위자에게는 카타르시스를 주지만 관객에게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심리적 배설 과정을 생각하게 한다. 김소진은 버려진 천들을 이어서 인체를 만든다. 등신대 크기의 허수아비같은 존재들은 의자에 묶여 있다. 의자는 사회적 자리를 상징하면서, 인간을 구속하는 배후의 체계로 다가온다.  짜깁기된 존재들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러한 부자유가 인간자체를 형성해왔다는 현실적, 그리고 역사적 사고가 있다.  

    

그리고 회화-박정우, 김은수, 안효빈, 양예원

    

박정우는 마스킹 테이프를 벗기면 하얀 캔버스가 드러나거나 캔버스의 올을 제거한 화면 등을 통해 ‘회화가 구성되는 조건’을 탐구한다. 모더니즘을 통해 익히 알려진 회화의 조건으로서의 평면성은 역사주의 미술사의 중요한 대목이다. 계통발생을 되풀이하는 개체발생의 과정은 기성 담론들의 재현이 아닌 생성을 요구한다. 김은수는 ‘가상현실에서 깨어난 사람이 회화를 한다면?’ 하는 가정을 회화로 푼다. 알고 보면 회화도 가상현실이었으니, 이 가정은 다소간 동어반복적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보사회의 개막과 함께 본격적인 가상현실 문화 속에서 자랐던 세대의 자의식이 깔려있다. 이러한 가정의 결과는 그림의 물리적이고 촉각적인 측면의 강조이다. 


안효빈은 방치되어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공간의 사진을 찍고, 이것을 드로잉으로 표현한다. 사진과 병렬된 그림은 매우 작다. 상상이 가미된 그림은 사진과 일대일 관계는 없다. 지시대상은 있지만, 그것은 언제 어디에 도착할지 모르는 막막한 여행의 출발점이 되어줄 뿐이다. 양예원은 성모상이나 미국의 대선 주자 같은 전래의, 그리고 최근의 아이콘을 그린다. 그것들을 그리는 이유는 거기에 아무런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내용에 괄호를 치고 나면 그리는 과정만이 전면에 놓인다. 신앙심 없는 그녀에게 이런저런 아이콘들은 ‘평면 위에 물감이 얹어지는 느낌’을 즐기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출전; 성균관 대학교 서양화과 크리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