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혀진 세계 안에서의 다차원 여행

  

이선영(미술평론가)

  


 두터운 금속판을 잘라서 용접하여 만든 인체상은 하나의 판으로 접은 형태처럼, 유연한 굴곡면을 지닌다. 절단된 판과 판 사이를 연결하는 말끔한 기술적 처리는 스테인레스스틸 판이 가지는 고유한 물리적 속성을 극복한다. 주변의 사물을 되비추는 현란한 금속 반사면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구조물처럼 보이지만, 전화를 받거나 턱을 괴고 있거나 몸을 구부려 누운 모습, 걷는 상태 등 구체적인 형태를 알아볼 수 있다. 대부분 높이 30cm 내외의 크지 않은 형태들이지만, 속이 꽉 찬 금속의 묵직한 밀도감과 더불어 기념비적인 속성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반쯤 추상화된 구상조각이나, 그자체로 자족적인 장식적인 조형물보다는, 접힌 면으로 이루어진 유기체나 고차원적인 공간 등을 비유하는 축소모델로 보인다. 이전의 작품이 형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 전시의 작품은 접혀진 공간이 주제이다. 


접기라는 주제는 어떤 형태가 놓인 중성적인 공간보다는, 형태이자 공간인 또다른 차원에 주목하는 것이다. 형태가 하나의 정점(定占)으로부터 펼쳐지는 질서의 체계를 중시한다면, 평면의 변주를 주제로 하는 이번 전시는 하나의 점 밖에 있는 수많은 점을 전제로 한다. 물성을 극복한 듯 보이는 금속판의 급격한 구부러짐은 고정된 재현보다는 변형 및 변환에 관련된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닫혀지고 완전한 체계로서 성립되었던 옛기하학으로부터 탈피를 보여준다. 현대의 기하학은 양적이고 절대적이기 보다는, 질적이며 상대적이다. 그것은 닮은꼴similarity에 대한 이전의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질량이 큰 물체 옆에서 공간이 휘어지듯이, 따뜻한 물체 옆에서는 기하학이 변한다. 철학자 한스 라이헨바하는 [시간과 공간의 철학]에서 한 물체의 기하학적 형태는 절대적인 경험의 자료가 아니라, 미리 존재하는 좌표적 정의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어떤 특정한 정의에 의하면, 일상적인 차원에서는 같은 구조가 때로 평면, 구 혹은 휘어진 표면 등으로 불리울 수 있다. 


인식론상의 구성주의자들은 인간의 인식 역시 존재론적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결정한 합의에 근거한다고 본다. 그들은 인간의 지각과 인지를 구성적인 체계로 간주한다. 요컨대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우리의 구성능력의 결과이다. 인간은 세계라는 성질을 가진 것을 구축함으로서 살아간다. 조각가는 잘려진 금속판들을 다시 조립하는 가운데 세계를 해석한다. 여기에서 소통은 보이는 것 그대로, 또는 실재의 전달이 아니라, 구조의 구축이다. 그것은 체험적 요소들을 조율하여 구축한 것이자, 일종의 모델이다. 용접으로 금속판을 구성하여 이룩한 형태는 다소간 기계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다. 미술사에서 구성주의 미학은 기계의 힘을 쟁취하여 이 세계를 다시 창조한 인간, 기계로 자연의 혼돈을 정복하고 새로운 인간적 질서를 건설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거기에는 주체가 되었던 인간 역시 강력하게 변형시키는 메카니즘이 관통한다. 


오세문의 작품은 이러한 질서의 체계를 통해 신의 자질을 이어받은 영웅적인 인간 형태가 남아있지만, 금속과 기하학의 조우로 만들어진 차가운 질서가 두드러진다. 그것은 이전시대의 성스러운 정신의 질서에 의해 규정된 공간을 벗어나 있으며, 중력을 받는 3차원 공간 안에 서 있다. 구조물들은 3차원상에서 중심을 잡고 굳건히 존재하면서, 외부세계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내재적 성질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개념적으로는 일종의 논리적 관계 또는 인공적 다양체를 이룬다. 특히 3차원 공간에서 급격하게 굽는 모양새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시공간과는 달리, 상대적인 시공간에 대한 시각적 비유가 된다. M. 버트하임은 [공간의 역사]에서 뉴턴적 세계상에서 공간은 본질적으로 텅 비어있는 상자, 영원히 뻗어나가는 3차원의 무한한 공간이라고 비유한다. 이에 반해 상대성의 공간은 광대한 얇은 막과도 같다. 공간은 이전에 중립적인 영역이었던 것에서 벗어나, 거대한 우주 드라마의 적극적인 참여자가 된다. 


오세문의 작품에서 접힌 구조물은 공간이자 인간의 형태를 이루는데, 그것은 우주론적 서사를 낳은 역동적인 시공간 개념과 관련된다. 현대물리학의 바탕이 되는 새로운 기하학은 시각화되기가 어려운 개념적 공간이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시각화될 수 있는데, 오세문의 작품이 그러하다. 그의 작품은 공간상에 실재하는 물체로, ‘길이, 폭, 두께, 그리고 지속성’(웰즈)이라는 네가지 차원을 가진다. 4차원에 대한 상상은 이미 19세기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4차원 또는 그 이상의 차원을 가진 공간은 무한히 얇은 종이 사이에 살고 있는 무한히 가늘고 작은 책벌레같은 상황에 놓인다. 버트하임은 위의 책에서 영국의 에드윈 애보트가 1844년에 쓴 소설 [플랫 랜드; 스퀘어의 다차원 여행 로맨스]를 소개한다. 주인공은 ‘플랫랜드’로 알려진 2차원 공간에 살고 있는 ‘스퀘어’이다. 그의 평탄한 삶은 3차원의 대지에 살고 있는 어떤 존재의 방문에 의해 파괴된다. 


2차원적인 냅킨을 3차원 공간에서 대각선으로 접을 수 있는 것처럼, 4차원 공간에서 3차원 공간의 두 부분을 서로 접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4차원 공간에서의 공간접기를 통해 서로 멀리 떨어진 곳도 창밖의 풍경처럼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기묘한 공간은 시간을 관통하는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20세기의 상대성 이론을 예시한 19세기 후반의 수학자 리만은 세계가 2차원적 피조물들이 종이의 평면 위에 살고 있는 애보트의 플랫랜드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그 종이를 구긴다면. 세계에 사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몸이 종이 표면에 속해있기 때문에, 공간의 주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에 의하면 종이 우주에 사는 2차원적 존재들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의 주름을 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힘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은 평평하게 보일지라도, 더 이상 평평한 것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오세문의 작품에서 두터운 판이 힘차게 구부러진 형태의 구조물은 구겨지고 접혀진 우주가 가지는 차원을 변주한다. 그것은 물질 자체가 공간의 주름이라는 생각과 연결된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물질의 근본입자들이 휘어진 공간의 산물이라고 추측한다. 물체는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가 바로 공간인 것이다. 버트하임에 의하면 현대의 물리학자들은 우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것이 거대한 ‘우주의 끈’과 ‘얇은 판’이라고 믿는다. 이것들이 공간구조를 강하게 휘게 한다. 그들은 공간을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판에 종종 비유하는데, 태양과 같은 거대한 덩어리는 우주 공간의 얇은 막을 변형시킨다. 이렇게 움푹 패인 공간이 만곡이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우리는 지구에 의해 생긴 공간 조직의 만곡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인체와 공간이 하나가 된 형태들은 공간뿐 아니라, 유기체 역시 접기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판의 휘어짐으로 연출된 다채로운 인간의 형상들은 접기놀이에서 수많은 존재들이 태어나는 것을 예시한다. 


접기놀이는 하나의 세계로부터 시작하여 서로 차이나는 세계로 변환하며, 점차 복잡해진다. 그것은 다양한 표현과 통일성을 동시에 아우른다. 작가는 판을 일으켜 세우고 접는다. 여기에서 세계는 접힌 곳의 표면 위에 투사된다. 접힌 면은 단순한 장식적 처리가 아니라, 신체에 작용하는 정신적 힘의 강렬함을 표현한다. 들뢰즈는 접기란 어떤 역량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생명체는 진화와 함께 유기체의 전개와 더불어 변형되어가면서 무엇인가를 형성하는 내부의 주름이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것은 ‘조형력’(라이프니츠)이라고 지칭되었다. 이 힘은 덩어리를 유기체로 조직한다. 유기체는 원초적인 주름, 접힌 것, 접기이다. 펼침은 증가함, 자라남이고 또한 접힘은 감소함, 줄어듦, 세계의 외진 곳으로 되돌아옴이다. 차이를 발생시키는 접힘과 펼침의 운동이 존재의 분화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현대의 철학자도 현대의 물리학자처럼 이 세계를 변화하는 곡률, 즉 변곡의 무한한 계열로 간주한다. 다양한 곡률을 가진 우주의 표면이 세계의 사건을 되비추는 거울면과 중첩되는 오세문의 작품 또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