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속의 그림, 그림 속의 현실

남경민 전(2006.12.14--2007.1.14, 영은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파스텔 톤으로 장식된 널찍한 실내에 걸면 잘 어울릴듯한 남경민의 그림은, 매끄럽게 마감된 화사한 화면 여기저기에 숨겨놓은 알레고리와 눈속임으로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산뜻한 팝아트 풍의 감각적인 작품처럼 보이지만, 그림에 대한 메타적인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 거울, 창문, 캔버스 같이 다의적인 상징체계를 가지는 모티브들이 상호 반영되면서 이루는 복잡한 시선의 회로는 미로가 되어 신비와 침묵으로 빠져든다.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이 처음 보게되는 작품 [8개의 병](2005)은 차후에 보여질 많은 작품의 도입부가 된다. 그것은 촛불, 모래시계, 거울, 붓 등이 담긴 병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자신의 작품의 중요한 요소이자 보존하고 싶은 본질이라고 말한다. 그 각각은 빛, 시간, 반영, 회화 등을 상징하면서, 다른 작품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합된다. 부재와 현존이라는 쌍으로 배열된 형식 역시 반영이라는 구조에 내포된 비밀스런 속성을 내포한다.   


작품 [세월](2004)은 하나처럼 보이는 장면에 보이지 않는 심연이 드리워져 있다. 왼쪽에서는 살아있는 식물이 오른쪽에서는 입을 떨군 채 그림으로 보존되어 있다. 마름모 무늬로 분리된 캔버스로 이루어진 양쪽 실내가 연결되어 있고 단지 창문이 열린 차이만 있는 듯 보이지만, 캔버스와 캔버스 사이를 연결하는 물리적 틈만큼이나 깊게 파여진 시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세월]이라 붙여진 제목은 다소간 정적으로 보이는 대칭적인 구도에 내재한 시간의 도약을 암시한다. ‘두개의 방’이라는 전시부제로, 짝패처럼 설정된 두 세계에 내재한 심연과 불일치의 문제는 거울이라는 매개를 통해 구체화된다. 작품 [두개의 의자](2004--2005)는 의자 뒤의 거울이 의자를 반대 방향으로 비추고 있다. [두개의 새장](2005)은 커다란 유리문 뒤로 숲의 풍경이 펼쳐지는 환상적인 장면인데, [두개의 의자]처럼 부조리한 방향으로 반영되는 의자가 보이며, 대형 거울 안의 새장과 밖의 새장도 차이가 있다. 


최근작인 [두개의 공간](2006)에서도 실내의 한 벽면을 차지하는 거대한 거울에서 대칭을 벗어나는 부조리한 광경이 펼쳐진다. 작가에 의하면 거울은 내면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같으면서도 상반되며,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연결통로가 된다. 거울은 창이나 문 등의 모티브로 변주된다. 문 너머에 보이는 또 다른 문은 구름이 떠있는 하늘 풍경같지만, 문틀에 부착되어 막 벗겨지려는 시트지 같은 모습이다. 그것은 창공이 아니라, 창공의 시뮬레이션이다. 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지만 하루 중 어느 때인지 모호하다. 실내 풍경이 대가들의 작업실로 전이된 그림에서도 거울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한다. 작품 [프리다의 작업실](2004--2005년)에서 거울 속의 의자와 밖의 의자가 다르고, 이젤처럼 장치된 거울, 또는 화판의 새와 실제 새의 상태가 다르다. 


대형 거울 안에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실내에는 그녀가 즐겨 입었던 의상이 걸려있다. 거울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창문은 방안을 밝게 비추고, 벽에 드리워진 빛은 벽의 두터운 느낌을 완화한다. 또 하나의 [프리다의 방](2005년)의 어두운 바깥에서 밝은 실내를 바라본 형식이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속의 새가 이젤 위에 앉아있다. 화가의 자의식과 현존을 나타내는 거울, 붓, 빈의자 등이 보인다. 출입문이자 유리창은 밖으로 열려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거처는 지상에 단단히 뿌리박기 보다는 어두운 공간 위에 둥 떠있는 듯하다. 2005년 브레인팩토리에서 열린 전시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아틀리에’ 시리즈를 선보였다. 전시관람 차 들른 남경민의 작업실에 있던 [베르메르에 의한 환영](2004)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북부 유럽의 대가 베르메르의 작품이 그림의 반을 차지하는 구도이다. 대가의 작품이 그림 속의 그림으로 등장하는 남경민의 작품에서 특이한 예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베르메르의 작품이자 작업실이 되기 때문이다. 


베르메르의 방, 또는 베르메르의 그림과 베르메르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인 작가의 작업실이 바닥의 마름모 무늬로 연결되어 있다. 작가의 작업실로 가정된 공간에는 마그리트 등 다른 화가의 작품도 있다. [세잔느의 작업실](2003)은 세잔의 작품과 그의 물건처럼 보이는 것들, 세잔의 초기작업에 많이 드러나는 죽음의 알레고리, 작가의 부재와 현존을 암시하는 빈 의자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 곳곳에 등장하는 병에는 세잔 그림의 모티브인 듯한 정물들이 하나씩 담겨 있다. [고흐의 작업실 창](2004년)은 실외의 빛이 들어오는 화사한 창이 드리워진 정신병동에 있는 창살이 불운한 말년을 보냈던 화가의 상황을 암시한다. 얼마전 사상 최고가로 낙찰되었다는 [가세 박사의 초상]도 걸려있는데, 구도자적인 삶을 상징하는 듯한 양초, 붓, 책 등 반 고흐의 단촐한 물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이제는 역설적 장면이 되었다. 


대가들의 작업실이 포함된 실내 풍경들은 그림이나 일상용품 등이 잘 정돈된 실내가 창밖 너머의 세계와 연결된 구조이다. 많은 작품에서 캔버스이면서 창인 눈속임이 존재한다. 작가는 벽을 감옥이라고 생각하고 창밖의 세계를 이상이나 희망의 세계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화가에게 그림이 가지는 위상을 설정해 준다. 바깥으로 뚫린 창이나 창과 중첩되는 그림은 현실이 아니라, 작가가 보고 싶은 것, 즉 상상의 세계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유폐를 종식시킬 희망의 나라인 것이다. 남경민이 존경하여 자신의 작품 속에 등장시키는 대가들은  반 고흐, 모네, 마그리트, 리히터, 호크니, 몬드리안 등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림을 사랑했던 이들로, 그들 생애에 있어서 그림이 그들의 희망이 되었던 작가들이다. 특히 남경민의 작품의 내용과 형식 면에서 가장 큰 그림자를 드리운 이는 르네 마그리트이다. 


3차원의 현실공간과 2차원 평면과의 모순을 다룬 창문이자 그림인 작품은 마그리트 작품에도 많이 나타난다. 남경민의 작품에서 마그리트가 주제가 된 작품은 2005년 ‘화가의 아틀리에’라는 제목으로 열린 브레인 팩토리에서의 전시 작품인 [마그리트의 작업실](2004년)이나, 2006년 이화익 갤러리에서 선보인 [마그리트에 대한 생각에 잠기다](2006년) 등이 있다. 이 작품에는 병 안에 ‘마그리트의 기억’이라는 책이 있으며,  마그리트의 한 작품이 창틀인지 액자인지 알 수 없는 곳에 붙어있다. 프랑스의 한 평론가가 남경민의 작품을 ‘마그리트의 관념을 호크니의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평가했듯이, 호크니 식의 화사하고 깔끔한 색채 처리 역시, 영향관계 면에서 마그리트와 함께 한 축을 이룬다. [호크니의 (텀벙) 창 안에서 바라보다]에서, 호크니의 그림이 걸린 실내 풍경은 본래 작품의 대상이 되었던 풍경을 호크니의 시선을 따라 내부에서 보는 풍경으로 전환시킨 작품이다. 


거의 6년간을 작업실에 유폐된 채 있었던 작가의 경험은 자연스럽게 작품에 자기반영적인 색채를 부여했다. 작가는 창너머의 현실과 단절된 채 예술 그자체에 매몰되면서, 일종의 예술에 대한 예술을 추구하게 된다. 르네 마그리트가 어떤 이미지는 어떤 사물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미지와 유사하다고 말하였듯이, 예술사 자체가 작품과 작품의 대화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예술을 통해 또다른 예술을 끝없이 지시하는 상황은 역설적이게도 작가가 처한 현실에 대한 반영이기도 했다. 바깥으로 뚫린 창은 있지만 선뜻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현실, 감옥같은 벽에 둘러싸인 화가는 어떤 이상적인 상황을 꿈꾸게 된다. 여기에서 꿈을 가시화하는 유일한 매개체는 바로 그림었다. 신비한 정적이 감도는 실내 장면은 작가의 내면 공간이기도 해서, 수많은 미술사의 대가들이 등장하는 아틀리에 시리즈는 단순히 대가를 인용하는 것을 넘어서, 대가의 세계에 대한 면밀한 탐구이자 대화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가령 남경민은 마그리트 작업실을 그리면서, 자신이 그리는 공간에서 마그리트를 소개한다. 그것은 마그리트의 실제 작업실과는 무관한, 남경민이 생각하는 마그리트로서, 이러한 시공을 초월한 만남을 통해 한 작가를 이해하게 된다. 남경민은 한 작가의 작업실이 그의 사상이고 이데아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존경하는 대가를 만나는 방식은 바로 그의 작업실을 그리는 것이다. 대가의 아틀리에 시리즈는 아는 것과 더불어 알고 싶은 것까지 그린다. 한 작가가 정해지면 그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에 들어가서 여러 소스에서 나온 자료들을 화면 안에 조합한다. 전체적인 톤이 세밀하게 조정된 정밀한 묘사는 꼴라주적인 발상을 숨기기에 충분하다. 남경민의 작품에서 회화라는 양식은 총체적인 분위기를 조정할 수 있게 하는 필연적인 방식이다. 그래서 어디선가 유래한 사물들은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놓여있던 것인양 자연스럽다. 


대가들의 방에는 그의 작품은 물론, 그가 좋아했을 법한 색채나 구도, 물건들을 배치한다. 그것은 고증적인 차원을 가지는 실제의 작업실이 아니라, 남경민이 재구성한 작업실이다. 남경민의 작품에서 실재의 위상이 불확실한 것처럼, 대가의 작업실 풍경은 원본이 불확실한 복제이다. 그것은 이미 재현된 것들의 재현이라는 점에서 시뮬라크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셀 카미유는 미술사 자체를 시뮬라크룸의 역사라고 간주했다. 그에 의하면 시뮬라크라적인 미술의 역사는 실재에 대한 두려움이자 열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방식은 실재가 폐기되고 다시금 환상이 출몰하는 포스트 모던 시대에 걸맞는 방식으로 보인다. 남경민은 자신의 그림이 현실 속의 그림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림은 어차피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탈출구가 되어주는 창과 같다. 남경민의 작품에서 문틈, 거울, 창 같은 형태는 보이지 않는 내면, 희망, 비전을 제시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작품에는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가는 장면이 많다. 남경민의 작품에 많이 나오는 모티브 중의 하나인 창밖의 이상향을 향해 날아오르는 나비들은 작가의 내면이 강하게 투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나비가 ‘예술가로서의 미적 자의식’이자 ‘내면의 의식의 흐름’이라고 밝힌다. 실내풍경 또는 대가의 작업실 등에서 종종 나타나는 도상인 나비는 그 뜬금없는 맥락으로 인해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것은 자유로운 영혼, 화려한 고독 같은 이미지와 동시에 부질없는 환영이라는 이미지가 존재한다. 유폐와 고독은 창이라는 장치를 통해 희망으로 전이된다. 가령 나비들은 바깥을 향한다. 바깥은 이상향이면서도 풍경 그자체만 주제가 된 경우는 없다. 그녀의 작품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나 실내에서 본 자연이다. 창밖의 세계로 모험하려하지 않고 실내에서 풍경을 동경할 뿐이다. 


그것은 실재가 아닌 환영일 뿐이다. 환영phantasia은 ‘부재하거나 불가능한 사물을 영혼의 빛으로 비추어 우리자신에게 재현해 보이고 기억하고 상상하고 꿈꾸는 능력’(D. 서머스)이다. 작가는 현실 속의 그림과 그림 속의 현실 사이에 놓여진 모순과 갈등을 교묘한 눈속임으로 봉합한다. 창과 함께 자주 등장하면서 복잡한 시선관계를 유도한 것이 거울 반사상이다. 남경민의 작품에서 현실은 반사상을 통해 드러난다. S.M 보네는 [거울의 역사]에서 거울의 반사상이 상image과 닮음resenblance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말한다. 반사상은 시각 외의 다른 감각으로는 알 수 없으며, 특히 감각적 실재의 근원이 되는 촉각으로는 접할 수 없다. 거울은 시각을 연장하고 직접적으로는 가질 수 없는 상들을 제공하면서 보이는 것, 외관, 실재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유의 도구인 거울이 또한 사유의 모델로 주어진 것이다.  


반사상에 대한 의식이며 의식의 반사상인 거울의 상은 여전히 환상이다. 하지만 환상이라고 언제나 거짓은 아니다. 환상은 심리적 현실의 유용한 순간이 될 수 있다. 거울은 주체가 원래의 모습을 감추고 자신의 환영과 관계를 맺는 전이의 장소이며, 잠재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남경민의 작품에서도 거울은 현실과 상상의 엄격한 구분을 거부한다. 정밀하게 재현된 하나의 사물은 또다른 사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서 이미지는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1의 참조이라는 고정된 틀을 벗어나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어 나아간다. 그것은 개인의 소외를 부추키는 강압적이고 독단적인 현실과 물질의 세계로부터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방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