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 전 ; 인공 자연, 퍼즐로 짜맞추어지다
(2006.10.21--10.27, 포천 반월아트홀)
이선영(미술평론가)
컴퓨터 결과물을 중심으로 한 금속공예 전이라는 타이틀이 붙었지만, 전통적인 조각 작품이 놓인 전시장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금속 주물로 뜬 구상적 조각품과 더불어 놓여있는 작은 모형들이 인간의 손이 아니라, 컴퓨터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되면, 관객은 ‘디지털 공예’라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다. 탁구공같은 구로부터 뻗쳐나오는 다리 한짝은 자연적인 씨앗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틀로부터 만들어지는 생명체의 새로운 상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기계로부터나 가능할 완벽한 구, 인공적 구성물에 대한 비유로 표현된 짜맞추어지는 퍼즐은 또 다른 자연에 대한 모태가 된다. 작가는 이 전시에 사용된 기법을, 공예의 새로운 분야인 래피드 프로토타이핑(Rapid Prototyping)이라고 설명한다.
디자인이나 공예업계에서 장신구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 생긴 프로그램 라이노를 이용해서 3D로 디자인을 하고, 이를 RP(rapid prototype)라는 프린터에 걸어 플라스틱에 가까운 형상을 출력한다. 결과물은 조각처럼 보이지만, 깎는 것이 아니고 분말을 쌓아가면서 만들며, 그것을 경화시켜서 형상이 얻어진다. 기존의 공예작업이 손으로 이루어진다면, 컴퓨터로 만들어지는 이 방식은 코드를 선택하는 손가락 작업에 의한 결과물인 셈이다. 손이 재료와 밀착하며, 우연이라는 요소가 개입되는 끈적한 그 무엇이라면, 시각적인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은 알고리즘과 명료한 계산에 의한 결과물을 추구한다. 생산된 최종 형태가 사실적 형태를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철저히 분절화 되어 있고 추상적인 것이다.
전시된 작품에서 주물작업이 손적인 것이라면, 플라스틱 출력 작업은 손가락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손가락/ 손’라는 대조항을 통해, 광학적 공간과 촉각적 공간을 비유한 바 있다. 광학적 공간의 주인공인 눈은 코드를 통해 손을 종속시킨다. 손은 손가락으로 축소된다. 다시말해 손은 순수한 시각적 형태에 상응하는 단위들을 선택하기 위해서만 개입한다. 손이 종속될수록, 시각은 이상적인 광학적 공간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형들을 광학적 코드에 맞게 포착하는 경향이 있다. 광학적 공간은 시각적인 공간이다. 미술은 시각성과 촉각성의 패러다임을 교차시켜온 역사였지만, 미술이 시각성과 보다 근접할 때 과학과의 관계는 보다 밀접하게 유지되었다. 가령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 근대의 사진, 현대의 전자매체에 의한 하이퍼 리얼한 시각 환경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손적인 것’을 ‘손가락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은, 복잡하고 섬세하지만 대량생산을 위해 모든 것이 매뉴얼화 되어야 하는 현대의 디자인 작업에 필수적일 것이다. 사실 3차원적인 형태를 프린터로 뽑을 수 있다는 것은 나노 물리학과 생명 공학의 시대에 놀랄만한 일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품 하나가 만들어지는데 20 시간이 넘고, 기기 대여의 어려움 등으로 시연 과정은 생략된 채, 2차원과 3차원 출력물만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특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창백한 모델보다는 주물로 제작된 ‘조각품’들이 전시의 컨셉을 전달하는데 있어 더 효과적라는 것은 시사적이다. 이 전시는 결과물이나 과정보다는 자연 및 예술에 있어서 원형/모사의 모델을 벗어난 시뮬레이션 모델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려는 시도로 주목할 만하다.
원형/모사의 이원적 관계는 자연/인공의 대립항으로 전이되곤 한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물질과 생명의 차이를, 그것은 운동의 과정이 닫혀있는가 열려 있는가의 차이로 본다. 요컨대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는 것들이며, 모든 운동들은 미리 예정되어 있고 이론적으로 계산이 가능하다. 미래의 모든 사건들은 과거의 사건 속에 내포되어있다. 반대로 생명의 경우 미래의 모든 문은 열려있다. 생명은 그자체에 내재하는 힘에 따라 스스로 운동한다고 간주되며 생명은 자연과 동일시된다. 생명은 물질로부터 나오고, 생명의 흐름은 그것이 통과하는 물질세계의 지형을 전제한다. 유기체들 자체가 물질의 조각을 요소로 하는 패턴이지만, 생명의 재료가 모여있다고 생명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의 발생은 그것을 구성하는 재료들을 새로운 전체로 통합되는 것에 의해 가능하다.
이병훈의 작품은 구성요소들의 형식과 구조를 통해 새로운 형태가 생산된다는 점에서 유기체를 포함한 실재의 양상을 지닌다. 알을 박차고 나오는 듯한 형태는 살아서 성장하는 유기체로서의 비유가 된다. 그러나 모태를 이루는 형상이 발생하는 개체에 비해 작으며 인공적으로 잘 짜여진 구조라는 점은 자연적인 생성보다는 계획과 제작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자연적’이란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반면 인공품은 그 질료가 무엇이든 일종의 조립물이다. 이병훈의 작품은 컴퓨터라는 매체를 매개로 하여 만들어진 형태로, 구조를 형성하는 자의 의도가 명료하가 투사된다. 그것은 인간이 재구성한 것의 구조가 미리 규정된 어떤 목적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이다.
컴퓨터라는 미디어가 그렇듯이 그것은 작동상 폐쇄되어 있으며 자기 지시적이고 순환적이다. 구성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그것은 인공생명의 양상을 가지고 있는데, 조작적인 단위로서 그 체계와 구조적으로 접속되어 있는 어떤 매체medium안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새로운 개체가 발생하는 틀거리는 짜맞추어지고 있는 듯한 퍼즐조각으로 이루어졌다. 퍼즐 조각은 마치 유전인자들 몇개가 한조를 이루는 염색체 문자들의 배열처럼, 생명의 기본 설계도같이 보인다. 그것은 엄격한 형식체계를 실현시킨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뭉뚱그려진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합의와 소통에 근거한 것이다. 어디선가 쪼갠 조각들이 다시 조립되는 가운데 실험적으로 가정된 것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구성주의처럼 순수한 합리적 모델이다.
기하학적으로 동일한 단위로 구성된 그것은 정보의 단위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이병훈의 작품은 사이버네틱스에 대한 비유가 된다. 어떤 퍼즐을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의해 형질이 설계되며 탄생하기도 전에 개체의 미래가 정해진다. 과학은 인간중심주의에 의해 발전된 것이지만 결국은 인간주의적 지평을 벗어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인간 이후post human의 시대의 예술과 디자인에 대한 밑그림을 그린다. 모든 것을 정보로 재구성함으로서 물질/생명 같은 전통적인 이분법을 무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기능한다. 알에서 태어나기 보다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형상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병훈의 작품--특히 플라스틱 출력물이 아니라, 주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그러한데--은 정보사회에서 펼쳐질 강제적 통제와 자율적인 조절의 문제를 예시한다.
체계에서 자유가 커지는 만큼 통제도 커지며, 그 역도 사실이다. 기술지상주의가 보다 확장되고 있는 현대에, 예술가는 통제-자유의 체계에서 자유의 몫을 늘리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알고리즘과 코드에 의해 만들어지는 실재의 세계는 예술에서도 새로운 자유와 통제를 가져다줄 것이다. 코드화에서 통제와 동일성만을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창조의 개념 자체가 새로운 코드와 조합을 발견하여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내는 것이 될 수 있다. 가령 노래방 기계의 출현은 평범한 악단들을 무대에서 사라지게 했지만, 신디사이저 같은 새로운 기계로 미래적인 음악을 만들 수 있다. 신디사이저가 기존 악기를 흉내내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음향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것처럼, 아직은 출발점에 서있는, 컴퓨터 프로세스에 의존하는 디지털 공예의 방식 역시, 단순히 기계화가 아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출전; 경기문화재단(지원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