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하는 자연과 창조된 자연의 만남

 --이상용의 1990년대 이후 작품을 중심으로--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상용의 근작 중, 가장 큰 작품이 아틀리에의 한 가운데 놓여있다. 출토유물같이 생긴 항아리가 추상적으로 처리된 깊숙한 배경 위에 떠있는 작품이다. 바탕면은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지만, 중성적인 배경이 아니라, 오래 묵은 공기와 분위기에 잠겨있다. 명암 및 색상의 대조에 의해 겹겹이 칠해진 바탕면은 낡은 항아리가 속해 있었을 심연의 시공간을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이상용의 많은 그림이 극사실적으로 그려진 전경의 대상과 흐릿한 배경막처럼 처리된 바탕면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바탕면은 전경의 대상을 대상이게끔 하는, 또는 대상을 낳게 한 기저면 내부의 힘들이 아우성치는 장(場)처럼 보인다. 엄격하게 결정된 형태와 바다같이 출렁이는 비결정적인 힘의 역학관계 속에서, 화면은 그것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균형을 향한다. 


이상용의 작품은 자연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사생으로 치우치기 보다는 여백을 중시한다. 여백 또는 바탕은 자연의 보편적인 형상을 창조하는 심층적 율동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전경의 대상은 불분명한 바탕면에서 끄집어 내어진 형상처럼 보인다. 그의 그림에서 바탕과 대상은, 형상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학의 관계를 가진다. 가시적인 자연적 대상의 배후에는 대상의 보이지 않는 주형인, 운동하고 있는 형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폴란드의 미학자 타타르키비츠는 ‘자연이란 표현은 자연적 과정과 그 과정의 산물을 동시에 가리킨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어, 자연이란 표현은 사물의 질료와 형상, 말하자면 사물의 본질--자연을 이끄는 힘--을 함께 가리킨다고 지적한다. 


고대부터 자연은 한편으로는 가시적인 사물의 총합을 의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의 생성과 자연법칙, 또는 자연적 사물의 생성원리, 그것들을 생성시킨 힘과 같은 뜻이었다. 그리하여 창조하는 자연과 창조된 자연이 구별된다. 그것은 자연적 사물의 총합에 대한 명칭이자, 자연을 이끄는 힘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의 이중성은 근대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이중성은 자연을 모델로 하는 이상용의 작품에도 두드러지는데, 겹겹이 발라지고 지워져 형성된 심연의 색덩어리가 창조하는 자연과 가깝다면, 전면의 사실적 오브제는 창조된 자연과 비교할 만하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종교로까지 이어지곤 하는 이상용의 작품은 자연이란 명칭을 신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생산하는 자연과 동일시한다. 생산하는 자연은 창조주이며, 생산된 자연은 곧 피조물이다.  


강조할 주제를 앞에 내세우고 배경을 아웃 포커스로 처리하는 방식은 1996년의 개인전인 [자연, 그 생성의 律]에서도 나타난다. ‘사랑의 계절’이라는 제목들이 붙은 작품에는 주로 숲의 풍경이 담겨있는데, 화면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굵은 나무 줄기와 더불어 조화롭게 구성된 잔가지가 전경에 배치되어 있고, 배경은 희미한 지평선 위에 얹혀진 사계절의 여운이 담겨있다. 마치 부조처럼 보일 정도로 두툼하게 쌓인 색채로 이루어진 고목은 자연의 과도한 존재감이 부각되어 있다. 오래된 자연은 출토유물이나 옹기, 토기, 망태기 등과 같은 향토적 대상으로 전이되곤 한다. 향토적 기물들은 시간의 겹이 쌓인 사물로, 식물과 결합되어 따뜻한 느낌의 정물화를 낳는다. 감상을 자아내는 나목과 낙엽의 반열에 놓여있는 유물들은 태어나고 소멸하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자연적, 문화적 유전인자를 표현한다. 


대상과 배경 모두에 공히 적용되는 시간의 겹은 여러겹 칠해진 화면에 의해 성취된다. 유럽 여행에서 본 고대 벽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파피루스](2001)를 비롯하여, 스톤 모델링을 이용한 두터운 마티에르는 2005년 몽고에서의 개인전인 [life]에서도 이어진다. 이국의 벽화에서 영감을 얻었으나, 곧 한국적인 형상으로 재탄생한다. 그의 작품은 워낙 여러겹 칠해지기 때문에 그림의 실중량이 무겁고, 뭐라 결정할 수 없는 색채감이 특징이다. 몽고의 전시에서의 작품은 두터운 질감의 바탕면에 돌, 잎 등의 모티브가 그려졌다. 마치 회색빛 담과 낙엽이 결합되어 있는듯한 형국이다. 2001년의 작품 ‘생명’ 시리즈는 심미적 요소가 극대화된 화려한 정물화. 꽃, 나뭇가지, 돌 등의 모티브가 서정적이다. 


이상용의 작품에는 [life-]로 시작되는 제목이 많다. 앙리 포시옹이 [형태의 삶]에서 말했듯이, 삶은 본질적으로 온갖 형태의 창조자로 작용한다. 삶은 형태이며, 형태는 삶의 방식이다. 형태는 공간과 재료의 구성이며, 그려진 것들은 덩어리들 간의 균형, 명암의 변화, 색조, 터치, 얼룩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형태는 공간 속에 있는 정신의 어떤 움직임을 번역하면서 자신이 흘러나온 삶과 뒤섞인다. 매체와 형태는 하나가 된다. 형태는 단순한 명암이나 색채를 넘어서 충만함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이상용의 작품은 잔혹하고 추한 면이 없지 않은,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극히 짧은 순간에 언뜻 드러낼 뿐인 자연과 인생에서 긍정적인 면에 주목한다. 달콤하고 아름답기만 한 그것들은 미적인 기만일 수도 있지만, 한정된 조건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가지는 희망 사항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예술이 부정과 절망 뿐 아니라, 긍정과 희망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용의 작품에서 창조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예술보다 더 근원적인 범주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심성과 닿아있다. 1993년에 작성된 작가 노트에는 ‘틈만 있으면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해질녘까지 산야를 누비고’ 다니던 소년이 ‘자연에 대한 경이를 느끼고 하나님의 창조에 수없이 감탄하곤’ 했음을 고백한다. 그는 ‘나뭇결 하나에도 같은 것이 없는 완벽한 창조’에서 ‘생명의 숨결’을 느낀다.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에서 하늘 위에 있는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부터 대지를 향해 창조되는 듯한 투명한 나무들이나 조약돌은 이러한 세계관이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그는 햇빛에 비추어진 날아다니는 먼지나 작은 돌멩이, 씨앗 하나에도 생명을 느낀다고 말한다. 


전능한 존재의 이념에 의해 조화롭게 창조된 세계라는 상은 풍경과 기하학적인 선의 결합으로도 나타난다. 자연 질서 내부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형상들에 대한 신념은 우주가 숨겨진 형상들로 가득 차 있다는 플라톤적인 생각과 관련된다. 그러나 이상용의 작품에서 추상적 요소는 추상 그자체로 자족적으로 고립되는 경우는 없다. 그의 작품에서는 기하학도 풍경과 같은 법칙을 따른다. 풍경과 같은 원근감을 가지는 사각형이나 화면을 평면적으로 뒤덮는 나무판 등이 그려진 작품이 그러하다. 1996년 작품 ‘결, 그 생성’은 나무판으로 된 평면이 창문처럼 잘리고 그 뒤로 보이는 나무나 꽃이 그려져 있다. 지평선을 향해 뚫린 창문으로서의 그림과 평면으로서의 그림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다. 


1993년의 작품 [인간의 대지]는 햇빛이 가득한 들판에 나무 테이블, 차 한잔을 그린 작품이다. 몇 개의 나뭇잎이 뒹구는 바탕면에 그려진 사다리꼴의 선이나, 숲과 들판에 서있는 나무들 위에 걸쳐있는 기하학적인 선은 풍경과 같은 원근감을 지닌다. 이상용은 추상적 본질이나 지엽적 현상에만 치우치는 것을 피하고, 본질과 형태를 이어주는 끈을 중요시힌다. 자연에 바탕을 둔 낭만주의 미학이 그러하듯, 태초 이래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본질은 스스로 형성해내면서 하나의 형태를 얻어가는데 있다. 자연은 스스로 조직하는 성질, 즉 자기 구성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림도 자연과 유사한 실재성을 가질 수 있다. 여기에서 있음의 형식은 자연의 절대적 동일성을 인식하는데서 실현된다. 


출전; 미술과 비평 2006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