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흥순 전 ; 분단국가를 무대로 한 재현의 정치학

(2006. 10.18--11.7, 서울 대안공간 풀, 10.20--10.26, 성남시 태평동 1673번지 상가)

  

이선영(미술평론가)

 



 이 전시는 고집스럽게 최후의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한국 사회의 씁쓸한 풍경을 다룬다. 2002년 월드컵 축제와 정치적, 종교적 광신도들의 집회가 좌우로 나란히 상영되는가 하면, 거대하게 움직이는 집단의 물결 한켠에 개인의 쓸쓸한 죽음이 그려진다. 임흥순의 작품은 ‘예술’ 나부랭이 보다는 압도적인 현실 그자체가 전면에 나와있다. 예술로 뭔가를 따로 조작할 필요가 없을만큼 이미 충분히 조작된 현실을 그대로 옮겨오고자 한 것이다. 그림이 아니라, 영상과 사진작품으로 재현된 이미지는 현실을 지시하고 해석하는 다큐멘타리적인 속성이 있다. 다소간 느슨해 보이는 이미지에는 국가, 개인, 권력, 이데올로기, 재현 등의 문제가 얽혀있다. 그것은 분단 국가를 무대로 한 재현의 정치학을 보여준다.


가장 큰 화면으로 영사되는 작품 [환영]은 짧은 암전 사이로 요란한 헬리콥터 소리와 풍경이 교차 편집되어 있다. 빠르게 이동하면서, 상하로 정신없이 도약하는 시점으로 인해 사물과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 뚜렷한 서사구조가 없는 흐릿한 화면 전체를 주도하는 헬기 조차도 화면 바깥으로 튕겨나가곤 한다. 헬기가 사라지면서 ‘제 51회 현충일’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는 현충사 앞의 평온한 휴일풍경이 펼쳐진다. 급박해 보이는 점프 컷과 관조적인 시선 아래 펼쳐지는 상반된 풍경을 연결시키는 것은 역사적 상상력이다. 짧은 시간 동안 성취된 경제적 진보는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얼마 전의 역사를 덮어두기에 충분한 듯하다.  


그러나 외적인 풍요가 한국사회 저류에 흐르는 모순과 갈등을 완전히 봉합하지는 못한다. 두대의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좌익과 우익의 제전은 봉합된 균열 사이로 분출되는 힘들이다. 먼저 왼편이다. 작품 [승리의 의지]는 덜그덕 거리는 기계적 배경음을 깔고 흐른다. 태극 물결 속의 군중은 2002년 월드컵 때의 붉은 악마들이다. 태극기 의상, 폴리스 라인을 벗어나는 일탈 장면들은 얼마 전의 과거를 먼 과거처럼 흑백 화면으로 처리한다. 시청앞 광장을 무대로 한 군중 장면은 87년 6월 시민항쟁의 모습과 겹쳐진다. 장면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암전은 시간적인 도약을 이룬다. 오른 쪽 화면은 옛노래 ‘매기의 추억’을 배경음으로 천천히 돌아간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북한 동포를 구출하자’ 등의 현수막이 보이고, 만세를 부르며 북한기를 찢는 장면, 극우 단체의 깃발들도 보인다. 여기에도 태극기 물결과 흥분한 군중들, 카메라맨이 등장한다. 


소리없이 멀찍이서 보면 광기에 찬 무리들이라는 공통성이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그들은  어떤 강한 신념에 찬 이들이다. 이 작품에서 시각의 맹목성을 보충해주는 것은 소리이다. 왼편은 기계음이 오른편은 옛노래가 흘러나온다. 전시부제이기도 한 노래 ‘매기의 추억’은 원래 미국에서 만들어진 번안곡으로, 마치 원래부터 우리의 곡조였던 양 추억이 돼버린 음악이다. 관객은 양쪽의 음향에서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필연성, 그리고 감상과 기만이 복합된 낡은 정서 사이의 대조를 감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품 [잘 가시오]는 광장이 아니라, 사적인 공간에서 전개된다. 같은 공간이지만 노란 장판이 깔린 장소는 전시장 모퉁이를 개인적인 무대로 변모시킨다. 허름한 방 한켠의 텔레비전처럼 배치한 모니터에서 부친의 장례 과정이 흘러나온다. 장례업자가 종이와 천으로 시신을 싸는 장면, 조문객과 나누는 대화 등으로 이루어졌다. 


다른 영상작품처럼 중간중간 암전이 된 가운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진다. 그러나 삶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은 극적인 클라이맥스 없이 무심한 기계적 시선으로 흘러간다. 엄숙한 의식이나 회환에 찬 기억이라기 보다는, 시신이 물리적, 심리적으로 처리되는 과정에 가깝다. 무릇 재현이란 뚜렷한 방점이 찍혀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삶, 또는 죽음의 재현 방식은 불경스럽기까지 하다. 또다른 방에 걸린 대형 디지털 프린트 작품 [기념비]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각이 세워진 작품이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민족 중흥’의 지도자 박정희, 월드컵 영웅 히딩크, ‘정치 테러’의 희생양으로 간주된 야당 지도자, ‘구국의 은인’ 맥아더, 씩씩한 해병대, 군인들, 광신도, 경찰, 특정 정파의 지지자 등이다. 


영웅적 인물들은 거리의 초상화, 카메라 앵글에서 과감하게 삭제된 조상, 기념 사진 스타일 등으로 고정된다. 여기서도 재현의 방식은 두가지가 혼재한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처럼, 집단의 자기 동일성이 강조되는 한편, 중심이 아닌 주변부에 맞추어진 시선이 그렇다. 가령 동상의 좌대만 보이고 그 아래의 사소한 인물, 주요 행사보다는 그 뒤에 있는 어수선한 광경들에 포커스가 맞추어진 장면 등이 그러하다.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라는 현실이 반영된 임흥순의 작품은 또다른 편에서 광적인 보수주의를 고발하는 뜨거운 정치적 시선과 그 모든 것을 허상들simulacres로 간주하는 냉소적인 시선이 공존한다. 재현에는 사회의 물질적 조건이 새겨지기 마련이다. 국가라는 무대의 배우인 등장인물들, 무대에 더불어 등장하는 정치적 모토들은 서로 경합하는 입장들을 재현하고 있다. 


애초부터 국가는 재현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플라톤은 [국가Politeia]에서 동굴의 비유를 들어 하나의 완전무결한 형상(본질)의 세계와 이를 모방한 세계, 즉 현상의 세계로 구별하였다. 태고의 인간들은 동굴밖 실체의 그림자들이 투영된 벽면을 볼 뿐이라는 플라톤식의 투영은 이후 예술적 재현과 인식의 모델로 간주되었다. 이데아적 원형에 해당되는 본질이 있고, 이를 근거로 하여 재현의 세계가 펼쳐진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사유가 각별히 중요한 어떤 구별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곧 원본과 이미지의 구별, 원형과 모상의 구별이다. 여기서 원형은 어떤 근원적이고 월등한 동일성을 누린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차이는 동일성과 유사성에 의지해서만 사유될 수 있다. 이 전통 안에서 철학은 재현을 통해 차이가 지닌 마비, 도취, 잔혹성, 죽음까지 장악한다. 


이러한 이원론적 발상에서 원형의 역할은 좋은 이미지들을 선별하고 나쁜 이미지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재현의 논리가 펼쳐질 수 있기 이전에 먼저 지극히 순수한 상태의 어떤 도덕적 세계관이 출현해야 한다. 허상이 축출되어야 하고, 또 이를 통해 차이마저 같음과 닮음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어떤 도덕적인 이유들 때문이다. 요컨대 각 진영에는 가치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되는 확고한 이데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개념적 매개를 통해 상대를 재현함으로서, 상대를 결여나 부재의 사태로만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부정적 사유이다. 재현은 일련의 질서에 따라 위계적으로 조직된다. 임흥순의 작품에서 기념사진으로 재현되는 공간은 중심이 있고 유기적으로 조직되며 항구적인 질서에 따라 분류된다.  


들뢰즈는 이를 정착된 공간이라고 하면서 유목적(탈주적) 공간과 대비시켰다. 물론 임흥순의 작품에는 후자도 존재하는데, 이러한 경향은 주체의 시선이 관통하는 고정된 관찰의 거리를 벗어난다. [환영]에서의 급격한 시각적 도약과 [잘 가시오]에서의 완전히 균질적인 시선이 그러하다. 반면, 기념사진으로 나타나는 고정된 시점은 강고한 주체의 통일성으로 인해 확립된 세계의 질서를 강조한다. 비평가 캐서린 벨지는 고전적 사실주의가 의미, 지식, 행동의 기원인 일관된 주체들의 세계를 제시한다고 지적한다. 작품 속에서의 주체는 관객에게 직접으로 말을 거는데, 관객은 이 호명에 반응하도록 유도된다. 이러한 호명은 하나의 특수한 통일된 관점으로부터 사건을 제시함으로서, 서사양식 속에 관객을 포함시킨다. 


임흥순은 국가와 사회의 상징적 질서를 활용하면서 이데올로기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를 드러낸다. 알튀세가 지적하듯, 이데올로기에 재현된 것은 개인들의 생존을 지배하는 실제적 관련이 아니라, 상상적 관계이다. 이데올로기는 현존하는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필요하며, 그 재생산에 의해 생성되는 사회적 이익 속에서 조리가 선 일관성으로 가장한다. 분단 국가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다소 건조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재현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힘으로 전화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위협적이다. 그렇기에 한국사회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 진부한 주제는 반복해서 미술작품에 등장하는지도 모른다. 


출전; 경기문화재단(지원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