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로 동요하는 바탕, 그 자유로움

장금원 전 (2006. 11.21--12.5, 그로리치 화랑)

  

이선영(미술평론가)


  

 장금원의 작품에서 자연과 자아라는 전통적이고 무게감 있는 주제는 가볍고 얇고 투명하게 드러난다. 웅변이나 열창이기 보다는 소곤거림이나 나지막한 흥얼거림에 가깝다. 그녀의 작품에는 해, 달, 별, 식물, 폭풍 같은 자연 현상 그리고 마스크나 작은 토르소로 나타나는 인간의 모티브들이 자유롭게 그어진 선이나 선의 다발 위에 부유한다. 캔버스가 아닌 종이, 오일이 아닌 여러 가지 소묘 재료, 바탕 면이 비치는 겹 구조 등이 장구한 역사와 미학을 가지는 회화의 무게감을 덜어낸다. 거기에는 애수 같은 감정이 없지 않으나, 이러한 정서는 두껍고 질척거리며 어두운 분위기가 아니라, 약간 비켜 나가는 듯한 역설성으로 휘발시킨다. 또한 그녀의 작품은 썰렁한 화면에 몇 가지 모티브를 던져놓고 관객으로 하여금 수수께끼 풀이나 배후에 깔려 있을지도 모르는 거대한 사상의 심오함에 빠져 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만든 작가가 그러했듯이, 작품에 자신을 맡기고 산책하듯이 즐기면 된다. 물론 그것은 제작 과정 자체가 느슨하거나 안이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처 없이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것들, 비슷해 보이는 풍경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모티브들을 또 다른 맥락에 놓아 보는 놀이가 관객에게 주어진다. 장금원의 작품에는 몇 가지 모티브가 차이와 반복의 회로 속에서 움직인다. 다른 작품에도 간간히 박혀있는 물방울 모양의 형상이 투명한 바탕 면에 새겨져 벽면 가득히 붙어있는 작품 [눈물]은 눈물로 간주된 물방울이 비처럼 쏟아지는 작품이다. 진한 감정의 결정체인 눈물은 마치 노랑, 빨강, 파랑 풍선처럼 가볍고 밝은 분위기이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축축하게 적시는 힘이 있다. 식물의 모티브와 함께 몇 획 되지 않은 선으로 완성된 [얼굴]은 작가의 얼굴을 빼어 닮은 형상으로, 마치 풍선처럼 허공에 둥 뜬 듯한 모습이다. 그것은 비워두기를 통해 본연의 모습을 비춘다.  


마네킹, 또는 마스크같은 여인의 초상은 ‘내 안의 나에게 충실히 반응하고자 하는’ 작가가 ‘당시 내가 처한 여러 상황과 느낌의 상징’이라고 밝히는 것으로서, [소문](2004년), [플라워 걸](2006)을 비롯한 여러 작품에 나타난다. 마스크 배후에 또 다른 인물은 없을 만큼 자아와 완벽히 밀착된 이 도상은 손으로 쓱쓱 그어진 그리드 구조물 안에 배치되어 있거나 우연히 만들어진 흠집처럼 그어진 선들 위에 떠있다. 그것들은 깊이 숨겨진 차원보다는 표면성이, 정지보다는 동요를 전달한다. [플라워 걸]에서 심연을 가로 지르는 꽃처럼 또는 달처럼 떠있는 여인의 얼굴은 무늬처럼 배치된 토르소와 함께 여성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장금원은 자연을 비롯해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긴밀하게 반응하지만, 어떤 만남도 일단은 자신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요소와 섞여서 새로운 형태를 형성한 후에야 그 모습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자아라는 창을 통해 걸러지지만, 작업이란 모든 것이 통과하게 될 이 창을 이것저것으로 장식하거나 변형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투명하게 유지하는 것에 모아진다. 그러나 투명한 전달자로서의 작가라는 상은 결코 소박한 소망이랄 수 없다. 장금원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선과 환상적인 색채의 화가였던 파울 클레는 화가란 단지 통로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화가란 존재는 복종하지도 지배하지도 않으며, 깊숙한 밑에서 올라온 수액을 모으고 전달하는 일 이외에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달된 자연은 완성된 형태나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 형상을 가능하게 하는 미지의 힘에 더 가깝다. 우연히 고착되어 있을 뿐인 현재의 형태의 묘사가 아니라, 기억과 예지를 바탕으로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가능한 차원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와 같은 자유는 위대한 자연이 발전하듯이 스스로 발전할 권리만을 요구할 뿐이다. 이처럼 자연과 자아는 저절로 자라나게 해야 한다는 전제가 장금원의 작품에도 스며있다. 


장금원의 작품에 두드러진 것은 자연적 요소이다. 그것은 외재적인 자연 모방이 아니라 직관이며, 자연의 모습을 빌어 자신의 느낌을 담아내는 일에 가깝다. 자유로운 선의 느낌이 살아있는 그녀의 작품은 타블로와 대비되는 소묘라는 도식을 해체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선적인 요소는 구체적인 대상과 더불어 그것에 대한 경험과 느낌을 동시에 싣는다. 그러나 추상화처럼 선이나 색채 등 조형언어 그자체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가령 리드미컬한 선의 흐름으로 충만한 모토타입인 [달빛]은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풀 숲 위에 떠있는 달의 모티브가 분명히 감지된다. 그것은 달빛 가득한 숲의 풍경이다. 장금원의 작품에서 자연의 외형은 결코 거대하거나 장중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자연이 가지는 경이로움이나 신비 같은 내적 에너지가 전달된다. 


작품 [아이오와 시티에 온 토네이도]에서는 집을 성냥 곽처럼 날려버리는 토네이도조차 작은 단풍 잎 같은 도상으로 나타나지만, 정작 폭풍이 가지는 강력한 힘은 마구 그어진 선의 다발 안에 존재한다. 풀색 바탕 면에 여인의 토르소, 꽃, 눈물방울 등의 모티브가 점점이 박혀있는 작품 [숲 속]에서 자유롭게 낙서하듯 그은 하얀 선들은 자연의 실루엣이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가득한 에너지이기도 하다. 장금원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가장 인공적인 요소는 그리드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다. 작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나뭇가지들과 그 얽힘 들이 공간에 형성되는 그리드의 조합으로 변해갔다고 말한다. 작품 [간만의 꿈]은 마치 창틀처럼 나뉜 노란 바탕의 6개의 화면 앞 또는 뒤로 보이는 식물, 얼굴, 꽃, 별, 달이 그려진 작품이고, [Jade]와 [여름 저녁]은 그리드 바탕 위에 목탄으로 그려진 식물이다. 


그리드 구조는 선 뿐 아니라, 종이 여러 장을 입체적으로 사용함으로서 형성되기도 한다. 작품 [꿈꾸는 바디]는 내부가 그리드로 나뉜 여러 장의 종이를 장방형으로 배치하고, 교차점에 색색의 토르소들을 점점이 붙여놓았다. 몸에 대한 가장 단순한 인상이라 할 수 있는 작은 토르소들이 선과 선, 종이와 벽면 등을 연결하는 매개가 되고 있다. 장금원의 작품은 여러 개의 면으로 구성된 것이 많으며, 조합되는 방식 또한 다양하여 전시장은 한점 한점의 그림이 걸린 벽면이 아니라, 평면 작품이 설치된 것 같은 양상을 가진다. 작품을 이루는 요소들은 불연속적인 층위를 형성하면서 단일체로서의 작품을 와해시킨다. 장금원의 작품에서 주요한 요소인 선 역시 무엇인가를 확정짓는 선이 아니라 배회하는 선이고, 색채 또한 마찬가지여서, 빛, 대지, 하늘 등을 희박한 공기처럼 채우고 있을 뿐이다. 색 덩어리는 유리나 도기에 칠해진 듯 미끄덩거리며, 그 위에 띄워있는 사물들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동요하는 듯하다. 


장금원의 작품은 물리적, 또는 심리적 실재와 보다 밀착하기 위해, 기존의 확립된 매개들을 걷어내고 불필요한 무게를 줄이고자 한다. 롤랑 바르트는 ‘좋은 것은 가볍다’고 했던 니이체의 명제를 떠올리면서, 사물의 존재는 그 무거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벼움 속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몸은 투영이 아니라, 가벼운 접촉에 의해 화면에 인접해 있다. 그녀의 작품은 명확한 계획에 응하기 보다는 여러 번 다시 씌여진 양피지 텍스트처럼 상상의 사각형을 메워나간다. 이를 통해 작가에 의해 확정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보충되는 끝없는 과정이 중시된다. 앙리 포시옹은 [형태의 삶]에서 미술작품의 공간은 그 자체로서 물질이자 어떤 움직임인 기법으로 처리된 공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미술작품은 하나의 멈춤이지만 과거의 한 순간으로서만 그런 것이고, 실제로 미술작품은 변화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또 다른 변화를 준비한다. 장금원의 작품은 유기적 재현의 표면적인 균형 아래 계속 움직이고 있는 바탕을 지향한다. 


발산과 탈 중심화를 특징으로 하는 장금원의 작품은 기존에 확립된 상징적 질서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바탕의 자유를 예시한다. 이러한 바탕의 자유를 통해 재현적 사유를 전복시키려 했던 철학자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무(無)바탕의 상태를 찬미한다. 이러한 무바탕은 개념의 동일성을 통해 자신이 근거 짓는 것을 향해 있는 재현의 형식들에 저항하면서, 근거 저편으로 비스듬히 빠져든다. 현대미술에서는 최초 재현을 근거 짓는 형상과 질료라는 짝이 아니라, 질료들을 용해시켜 버리고 모형화 된 것들을 해체하는 추상적인 선과 무바탕의 짝을 부각시킨다. 이러한 무바탕과 미규정성은 사유의 생식성이자, 어떤 전(前)개체적인 독특성의 세계, 마주침과 공명이 조성되는 허상의 세계이다. 현대미술에서 재현적 사고가 배격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것이 차이를 통해 긍정된 세계를 달아나게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재현은 단 하나의 중심만을 지닌다. 재현은 모든 것을 매개하지만 그 어떤 것도 끌어들이거나 움직이지 못한다. 반면 운동은 다원적인 중심들을 함축한다. 거기에는 포개지는 원근법들, 뒤얽히는 관점들, 재현을 본질적으로 기형화시키면서 공존하는 계기들이 함축되어 있다. 현재적 지각 보다는 회상이나 기억에 감겨있는 장금원의 작품은 잠재성에 호소한다. 그러한 잠재성이 불러오는 것은 자의성이나 혼란이 아니다. 잠재적인 것 역시 실재적인 대상을 구성하는 어떤 엄정한 부분인 것이다. 그녀의 작품에서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발산하는 선들이다. 잠재적인 것 안에서 차이와 반복은 개념 안의 동일성 형식을 넘어 어떤 충만한 실재성과 다양성을 낳는다. 그것은 시간, 공간, 의식의 선을 따라서, 그리고 차이, 발산, 분화를 통해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한다. 그리고 이렇게 창조된 현실은 다시 잠재적 상태로 변화해간다. 

 

출전; 월간미술 200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