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여인들의 이야기
이선영(미술평론가)
정명조는 맵시있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들의 뒷모습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반신상이나 부분적인 클로즈업, 캔버스의 형태나 크기의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검은 배경 위에 놓여진 우아한 비단옷의 여인이 기조를 이룬다. 대부분 등신대 크기로, 칠보 장신구가 꽂힌 가채나 의상에 은은한 윤기가 흐르며, 조그만 움직임에도 사각거리는 비단 옷자락 소리가 들릴듯하다. 어두운 배경은 여인이 놓여 있는 구체적인 맥락을 지워버리고, 의상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해주는 중성적인 바탕이 된다. 이전 작품에서 배경은 약간의 공간감이 있었다. 때로는 구체적인 자세를 취하는 모델의 상념을 상징하기도 하고, 모델이 화면 뒤로 빠져 나갈 수 있을 것같은 차원이 제시되기도 하였다. 작가에 의하면 이 어둡고 빈 공간은 ‘외형의 화려함에 대비되는 정신적 공간’으로, ‘내면적인 불만과 불안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강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깊어하는 욕망을 나타내는’ 이중적 공간이다.
각기 다른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의상 형태와 배색을 받혀주는 어두운 배경은 작가나 관객이 탐닉할 대상에 일종의 컬렉션이나 표본같은 효과를 준다. 정명조의 그림은 ‘하나의 공간 속에 하나의 대상만 존재한다’는 원칙에 충실하다. 같은 크기에 시리즈로 제작된 작품들조차 상호 간에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 21명이 한 화면에 모두 등장하는 작품의 경우, 컬렉션의 느낌을 강하게 준다. 마치 물신숭배자의 컬렉션 목록이 무한하듯, 등돌린 여인이 등장하는 스타일의 작품은 2000년부터 시작해서 80여점 가까이 그렸다. 2년 반 정도를 준비한 이번 전시에는 20점이 나왔다. 간혹 배경은 검은색을 벗어나 의상의 문양이 새겨진 배경막같은 형태를 이루며, 뒤돌아선 여인의 신분이나 정서를 간접적으로 표상한다. 가령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기생 그림의 경우, 그림자는 은은하게 반짝거리는데, 그것은 여인이 꿈꾸는 이상향이나 내면세계를 반영한다.
정명조의 그림에 나오는 의상은 현대적인 입맛에 의해 각색된 것이기 보다는, 고증에 충실한 의상을 모델에게 입혀 사진을 찍고 이를 확대해서 그린 것이다. 사진은 포커스가 잘 맞추어져 있어 윤곽의 견고함이 살아있는 기록사진의 원칙에 충실하다. 배색이나 문양은 과거의 원형을 그대로 따른다. 작가가 선호하는 것은 화려하고 다채로운 조선시대의 여인의 의상이다. 거기에는 변형이나 해석이 아니라, 원형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손상시키고 싶지 않은 강박관념이 존재한다. 작가가 의도한대로 옷을 입은 모델의 사진을 그대로 그리며, 정확함을 위해 슬라이드 프로젝터나 실크스크린을 이용하여 스케치하기도 한다. 정명조에게 한복을 입은 여인은 아름다움의 표상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주로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색채, 문양, 장식과 관련’된다. 물리적인 실체감만 존재하고 상황이 제거되어 있는 뒤돌아선 여인들은 철저히 익명적이다.
7개의 작품이 시리즈를 이루는 작품 [herstory]는 왕비같은 최상층에서 후궁, 규수, 그리고 기생같은 하층 계급을 아우르는 여성들을 한눈에 보여준다. 관객 앞에 화려한 위용을 뽐내고 서있는 그녀들은 작가 스스로 말하듯, ‘공허한 기표로서만 존재’한다. 정명조의 그림은 도상의 유사성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재현적이다. 재현은 존재함, 현재, 등가, 대등한 현존 등을 전제한다. 사진을 바탕으로한 작업방식은, 사진이 가지는 실재성의 효과인 복제라는 속성을 깔고 있다.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이 특징인 우리사회에서 이국적인 분위기까지 있는 화려한 복장은 사진적인 재현이 애초부터 타자성을 시각적으로 객관하는데 쓰여졌고, 더 나아가 상품과 여성의 광경까지 포괄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사진적 재현은 물신성과 분리될 수 없다. 특히 그것은 여성과 관련되어 행동의 주체라기보다는 응시의 대상으로서의 시각적 관계를 재생산한다. 여인의 자태를 이루고 있는 작은 무늬 하나도 놓치기 싫은듯 세세하게 재현된 화면은 모종의 아름다움의 질서에 대한 욕망과 상상의 산물이다. 그녀는 밝은 조명을 받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서있다. 부재하거나, 현재로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림 속의 인물을 비추는 것은 물리적 조명이라기 보다는 정신의 빛처럼 보인다. 이러한 재현을 통해 관객은 기억하고 상상하고 꿈꾸게 된다. 정명조가 재현하는 것은 실재라기 보다는 일종의 전형이다. 봉황 무늬 옷을 입은 왕비, 분홍신을 신은 기생 등은 지나간 한 시대의 여성에 대한 이미지를 재현한 것이다. 화면을 꽉 채운 사실적 존재감은 역설적으로 재현 대상의 부재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실재의 확인보다는, 실재의 결여라는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재현보다는 시뮬라크룸에 가깝다.
시뮬라크룸은 ‘원본이 존재한 적이 없는 동일한 복제’(플라톤)이다. 미셀 카미유에 의하면 고대어에서 기원한 시뮬라크룸은 재현에 대한 개념을 위협한다. 시뮬라크룸은 원형이 없는 이미지이며,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재현된 것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회의하는 가짜 존재이다. 그것은 원형model과 복제, 원본과 모조reproduction, 이미지와 전사likeness라는 뿌리깊은 이분법을 전복시킨다. 거울같은 광학적 고안물과 정교한 시각적 외양의 소산물인 정명조의 이미지들은 단순히 세계의 복제가 아닌, 환각적 대안이다. 미셀 카미유는 이러한 맥락에서 미술사가 결코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상의 시뮬레이션에 대한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일차적 이미지, 혹은 재현이 성립되는 순간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그려진 이미지 위에 겹쳐 그려져 있는 동굴벽화들 시절부터 이미지는 이미 재현된 것들의 재현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화면상에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는 방식은 원형과 복제를 구분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미술은 놀라운 감각의 극장이 되었던 것이다. 근대에 와서 현미경과 망원경 같은 과학적 도구 아래에서 실재성의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이 화가들을 지배했다. 시뮬라크라적인 미술의 역사는 실재에 대한 두려움이자 열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미셀 카미유는 사진의 초현실적인 신비감과 환상적인 이상함이라는 전통에 점차 의존하는 현대 화가들의 작품에서 시뮬라크룸의 개념이 지속적으로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이미 시뮬라크라의 실재적인 장이기도 한 정교한 과학기술과도 비교되는 원본없는 복제는 실재/복제의 이원론을 무너뜨린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이미지들은 재현된 것이라기 보다는 육화된 것이고, 반사물과 복제물이라기 보다는 감정과 물질성으로 보인다. 원형이 복제 위에 있다는 플라톤의 전제를 역전시키고자 한 들뢰즈는 시뮬라크룸이 퇴락한 복제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원본과 복제, 원형과 재생산을 부정하는 긍정적인 힘을 품고 있다. 현대는 시뮬라크르, 곧 허상들의 세계이다.
원본으로 지정될 수 있는 것도 복제로 지정될 수 있는 것도 없다. 이들 사이에서 가능한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뮬라크룸은 원본의 일차성에 의존하는 재현의 철학을 와해시킨다. 정교한 화면이 창출하는 환영은 실제를 결정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시뮬레이션의 문제를 현대사회의 분석과 결합시킨 사회학자 보드리야르는 모든 이미지의 이면에 무엇인가가 사라져 버린 것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정보의 이면에서 사건은 사라지고, 가상의 왕국 속으로 들어간다.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오늘날 어떤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최상의 전략은, 그 대상이 지닌 환상의 힘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대상을 감추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정명조의 그림은 모든 것이 너무도 명백해서 오히려 사실같지가 않고, 환상을 위한 가능성만이 남게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작가는 이 하이퍼리얼한 이미지의 한가운데에 무(無)를 끌어들인 것이다.
한가지 주제에 편집증적으로 매달리는 정명조의 그림은 물신숭배적인 측면이 있다. 미셀 카미유는 현대의 시각환경을 구성하는 텔레비전과 비디오 이미지들이 사진과 죽음 사이의 기묘한 연합을 통해, 물신숭배적 극한으로 몰고가면서 처음부터 시뮬라크라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지적한다. 물신은 원시시회의 종교부터 현대사회의 상품, 개인의 내밀한 취향에 이르기까지 강렬한 끌림을 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물신은 신, 법, 합리성 등을 대변하는 남근적 물신부터, 상실된 남근에 대한 대체물에 이른다. 정명조의 작품에서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얼어붙은 한 장의 사진같은 장면은 수동적인 자세로 고착되어온 여성적 물신의 시각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물신은 여성 육체로 고정되어왔으며 여성의 자기 재현에도 침투해왔다. 물신성은 예술이나 문화, 자본주의 저변에 깔린 대상들에 내재해 있다. 정도의 차이일 뿐 페티시즘은 보편적이다.
윌리엄 피에츠는 [물신]에서 페티시를 미의 원리로까지 고양시키려는 일단의 작가들이--바타유는 ‘나는 어떤 미술 애호가가 페티시스트가 신발을 사랑하는 것만큼 캔버스를 사랑하는지 의문이다’라고 말했다--페티시의 실질적인 힘을 알고 싶어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두려운 제의적 대상이 매혹적인 물품들, 잘못된 성적 유혹의 대상들, 깊은 감동을 주는 특정한 미술작품 등에 의해 일어난 이상한 힘의 정체를 밝히고자 했다. 물신주의는 시각성에 호소한다. 광학적인 정밀성과 심미적인 취향이 결합된 듯한 정명조의 그림은 매우 시각적이다. 그것은 미술이 바라보기 위한 것임을 새삼 확신시킨다. 미의 절정에서 굳어버린 이미지는 전적으로 시간성의 외부에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보고 보이는 상호적 역학관계 속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을 초월한 곳에 존재한다.
순수미술은 관심을 끌어모으기 보다는 신념을 강요하는 것이다. 마거릿 올린은 회화의 시각성을 강조한 프리드의 논문 [미술과 사물성]을 분석하면서, 그가 마치 세계가 스스로를 창조하는 것을 보는 듯한 초시간적인 상태를 예찬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시선은 현실의 권력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응시에 의해 돌로 변한 메두사의 신화가 예시하듯, 시선은 폭력적인 면이 있다. 응시는 다른 존재를 통한 자기 완성에의 욕망에 상응한다. 고립된 이미지, 응시의 대상은 이국적이고 역사 외부의 초시간적인 현존성 속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회화를 포함한 시각적 전통 속에서 여성은 물신숭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로라 멀비의 지적에 의하면 물신적 시선에서 여성은 사건과 생성의 세계로부터 격리된다. 여성이 서있는 배경은 눈에 보이지 않고 얼굴은 환각적으로 나타나며, 클로즈업을 통해 고립되어 탐닉된다. 관객의 남성적 응시는 모두 그녀에게 고정된다. 정명조의 작품에도 초시간적이며 찬란한 고립에 빠져 있는 여성이 존재한다.
여성의 얼굴이나 육체가 고전의상이라는 화려한 기표에 의해 완전히 가리워진 그녀는 물신성의 극치를 이룬다. 그러나 정명조의 작품에서 응시에 의한 물신화는 착취와 위협 보다는 유혹과 소통이라는 측면이 강하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에게 응시gaze는 하나의 충동으로, 언제나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의 과다한 보기이다. 모든 충동들의 경우처럼 응시는 근본적으로 결핍을 향한 것이다. 특히 정명조의 예외적인 작품인, 거울 위에 그려진 여인상은 시선의 균열을 예시한다. 그것은 그려진 여인의 뒷모습을 보려는 듯한 관객의 얼굴이 같이 보이게 되어 있다. 원래 보기와 보여지는 것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전제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선과 눈의 관계가 이율배반적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관객(주체)의 눈과 대상의 시선 사이에 일치나 공존이 불가능하다. 라캉에 의하면 주체가 대상을 바라볼 때, 대상은 항상 주체에게 시선을 되돌려주는데, 그 자리는 주체가 대상을 볼 수 없는 지점이다. 눈과 시선 사이에 벌어진 이러한 분열은 시각 영역에서 표현되는 주관적인 분할을 예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