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욕망에 대한 은유 

정재석 전(2006년 9월6일--9월 13일, 의왕시 여성회관 갤러리)

  

이선영(미술평론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부제가 붙은 정재석의 그림은 동물의 도상을 등장시킨 우화로서, 관객에게 삶에 대한 성찰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돼지의 도상은 우화의 중심에 서 있는데, 그것은 욕심을 상징하며, 왕관과 결합하여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이라는 의미를 낳는다. 특히 짐승의 불룩한 복부, 둔부 등은 ‘먹는다’는 원초적 행위에 내포된 것, 요컨대 생존투쟁의 와중에 있는 자연적 존재의 이기적 속성을 집약하고 있다. 화면 앞에 거대하게 클로즈 업 된 돼지의 둔부와 왕관의 결합, 익명의 인체상 앞에 거대한 존재감을 가지는 왕관을 쓴 푸른 돼지 등은 작품제목에 들어있는 바대로 개인의 의미, 즉 끝없이 배고파하는 현대인간의 초상을 그린다. 작품 [개인의 의미]은 돼지 얼굴과 인체상, 왕관 등이 병렬적으로 배치된 것인데, 익명이기는 하지만 영웅적인 제스추어를 취하고 있는 인체상이 강력한 욕망의 상징들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이다. 그것은 잘먹고 잘사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물론 이러한 악몽의 회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품 [대화]는  돼지와 수행하는 듯한 인간을 대면시키는데, 화면 왼쪽으로부터 떨어지는 조명에 의해  강조된 돼지의 거대한 존재감과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들긴 했지만 자못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는 인간의 대화가 무대의 한 장면처럼 연출된다. 돼지의 실체를 생각하는 인간을 관객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서, 적어도 정신적인 차원의 거리감을 확보하고자 한다. 작품 [어린 양]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돼지를 위 아래로 병렬시킨 것이다. 작가는 자기 만족으로 배부른 돼지에 ‘어린 양’이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서 역설적인 면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부질없는 욕망에 의해 전락한 존재는 경멸해야할 대상이기 보다는 구원의 대상이 된다. 작가의 얼굴을 닮은 듯한 예수의 녹색 계열과 살덩어리 그자체로 보여지는 붉은 색 계열의 색조가  성과 속이라는 세계를 대조시킨다. 


[대화]에서 선승과 [어린양]에서의 예수는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탈속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데, 작가는 구성의 방식을 통해 두 세계의 차이도 아울러 보여준다. 전자의 작품에서 선승과 돼지는 수평적인 차원에서, 후자의 작품에서 예수와 돼지는 수직적인 차원에서 배열되는데, 이는 수평성을 지향하는 동양적 세계관과 수직성을 지향하는 서양적 세계관의 대조인 것이다. 종교학자 아라푸라는 동서양의 두 종교적 세계관의 차이(수평적/수직적)를 평정과 불안으로 요약한 바 있다. 정재석의 작품에는 색의 상징성에 의한 대조어법도 발견된다. 가령 살색 돼지와 푸른색 돼지가 가지는 욕망은 차이가 있다. 푸른색은 낭만주의 미학에서 나타나는 ‘푸른 꽃’처럼 자연과 현실을 초월한 색이다. 돼지가 욕망을 쫒는 상징적 존재라면, 푸른색이 입혀진 돼지의 욕망은 살색의 그것보다 더 무한하다. 


왕관으로서 상징되는 권력에의 욕망은, 배를 채우면 먹이에서 입을 떼는 자연적 존재의 한정된 욕망과 차이가 있다. 인간의 욕망은 푸른색 돼지의 욕망과 더욱 유사한 것이다. 이처럼 정재석의 그림은 메시지 전달이라는 의도에 충실하기는 하지만, 서사를 회화 언어의 방식으로 걸러내면서 단순한 내용주의 미학--여기에서 형태들은 어떤 내용을 위한 단순한 그릇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을 벗어나고 있다. 또 하나의 회화적 장치는 표면처리 방식이다. 돼지와 더불어 나타나는 인체에서 보이는 독특한 질감이 그것이다. 돼지와 인간 사이에는 동질성과 이질성이 존재하는데, 욕망이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 돼지와 동질성을 가진다면, 그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거리감이 이질성을 드러낸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이 돼지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반성을 함으로서 동물과 차이를 보인다. 정재석의 작품에서 동질성과 이질성이라는 주제는 인간과 인간 간의 엮임의 문제에서도 발생한다. 


디지털 프린트 방식으로 처리된 사진 위에 약간의 가필을 한 작품 [16명의 연인 또는 부부]는 연인 또는 부부의 얼굴 사진 반쪽을 붙인 것인데, ‘부부 사이는 닮는다’는 속설이 실감이 될 정도로 서로의 반쪽은 닮아있다. 두 인물이 붙은 코부분을 교묘하게 회화적으로 처리함으로서 닮음이 강조된다. 그러면서도 양 존재가 여지없이 갈라지는 틈은 숨길 수 없다. 하나됨이라는 이상적인 목표를 가지는 남녀의 쌍들은 각각이 가지는 서로 다른 욕망에 의해 끊임없는 갈등이 생겨난다. 어쩌면 양자는 서로 다르기 보다는 비슷한 욕망을 가지기에 더욱 갈등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동질성과 이질성의 역학관계는 인간 사회의 드라마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이다.


동물농작 식의 어법을 보여주는 정재석의 작품은 은유metapher적이다. 비평가 테렌스 혹스는 메타포란 ‘넘어로’라는 의미의 meta와 ‘가져가다’라는 의미의 pherein에서 연유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한 사물의 양상이 다른 하나의 사물로 ‘넘겨 가져가거나’ 옮겨져서 두 번째의 사물이 마치 첫 번째 사물처럼 서술되는 것을 가리킨다. 은유는 전이의 일반적인 절차를 밟는다. 정재석의 작품에서 은유로서의 돼지는 욕망이라는 의미로 전이된다. 권력을 상징하는 금관처럼,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어법의 경우 환유에 해당된다. 그것은 사물의 이름이 그 사물과 관련된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기 위하여 전이된 것이다. 정재석이 비교적 명료하게 여러 도상의 의미를 관객에게 전달하려 하지만, 의미화 연쇄를 이루는 일련의 시각적 기표들이 하나의 의미로 완전히 결정화되지는 않는다. 정신분석학자 라깡은 의미화 연쇄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또한 완성될 수 없는 의미화 연쇄가 만족될 수 없는 욕망의 구조--지연이 끝없니 지속되는 과정--와 겹쳐진다는 점도 정재석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라깡은 욕망을 환유라고 말한다. 에반스가 편집한 [라깡 정신분석 사전]에 의하면  환유metonymy는 일반적으로 한 단어가 문자 그대로 지시하지는 않지만,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한 대상을 나타내는 수사법이다. 환유는 의미화 연쇄에서 기표들이 연결되고 결합되는 방법(수평적 관계)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은유와 함께 의미작용이 산출되는 방법을 구성한다. 의미의 영원한 지연에서 하나의 기표가 계속적으로 다른 기표를 지시할 때, 의미화 연쇄를 따라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로 의미화 연쇄를 따라가는 운동이 환유이다. 그러나 의미나 욕망의 무한정한 지연의 과정이 무의미한 유희나 불가지론의 세계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일상적인 어법보다 더 강하게 메시지를 전달해 줄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일상적인 용어들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날라다준다. 우리가 어떤 참신한 것을 파악하는 것은 은유로부터이다’라고 말했다. 은유는 단지 공상이나 장식이 아니라, 사실을 체험하고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테렌스 혹스는 은유가 모든 언어의 편재하는 원리라고 지적한다. 실상 모든 언어들은 은밀하게 의미에 영향을 미치는 깊이 묻힌 은유적 구조를 포함한다. 은유는 언어가 작용하는 방식이다. 은유는 현실로부터 만들어지고 또 현실을 만든다. 은유는 현실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고,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다. 새로운 현실의 창조에는 자아의 재구성도 포함된다. 정재석의 작품에서 동물농장식의 풍자극과 작가를 포함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작품 간에 존재하는 다소간의 거리감은 은유적 어법이 가지는 여러 특성을 통해 연결될 수 있다. 


출전; 경기문화재단(지원사업 모니터링 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