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의 근작을 오랜만에 접했다. 신사동에 자리한 갤러리 벽에 적확하게 자리를 잡은 몇 점의 그림은 중후하고 웅장하다. 그것은 작품의 크기와 무관하고 주제와도 상관이 없다. 작품은 모두 〈무제〉로 같은 이야기를 같은 방법론 아래 깊게 파고 들어가 심화시킨 데서 올라오는 모종의 힘에서 연유한다. 마치 심연을 기어이 들여다보고 올라온 ‘고래의 충혈된 눈’(모비딕)과 같은 그림이고 평생을 화면 앞에서 물감과 고군분투한 자의 완숙함과 능란하면서도 매번 심혈을 기울이는 손의 놀림으로 축적된 깊이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완성이 있을 수 없이 무한한 반복과 지난한 과정을 거듭 되풀이하는 데서 쌓인 시간의 퇴적으로만 가능한 어느 경지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회화란 주어진 화면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화면 바깥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그림 외적인 것에 의해 설 수 없다. 그림 그 자체가 모든 것을 한 번에 발설한다. 오랜만에 격조있고 밀도 높은 페인팅을 보았다고 하면 과장일까? 이는 상대적인 반응이고 감상이다. 한국 추상/현대회화의 궤적 속에서 김웅의 그림이 그렇다는 인상이다. 김환기나 윤형근 정도가 베스트에 속하는 추상작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뒤를 이어 임충섭, 최상철, 홍정희, 이상국, 김홍주, 문범, 이상남, 송현숙 등이 좋은 작품을 선보인 이들이다. 그러나 우리 화단에서 김웅과 같은 작가를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이와 같은 그림의 질과 가치에 대해 반응하는 화상이나 컬렉터, 미술관계자들이 도대체 있기나 한 걸까?



김웅, 무제, 2024, 캔버스에 유채, 76×112cm


현재 미술시장에서 억대로 가격이 치솟거나 아트페어나 옥션 등에서 구하지 못해 난리가 난다고 하는 그림은 정말로 그만한 작품의 질, 미술사적 가치를 담보하고 있다고 믿어서인가? 아니다. 이 현상은 화랑과 옥션, 컬렉터와 언론, 미술비평가 등이 담합해서 만들어내는 작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마치 증권가에서 말하는 ‘작전주’와 너무나 유사한 행태이다.

화랑은 소속된 특정 작가를 띄우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도모한다. 이는 어디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작품의 질과 무관하게 의도적으로 말도 안되는 작품을 갖고 장난을 친다는 점이 문제다. 화랑에 속한 작가를 자신이 관여하는 옥션을 통해 지속적으로 올리고 비딩(호가입찰)을 통해 가격을 높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온갖 아트페어나 전시에 반복해서 선보이고 컬렉터에게는 부풀린 정보를 주어 사게 만든다. 그리고 이를 열심히 받아 적어주는 매체(미술기자)가 있고 글을 통해 ‘빨아주는’ 평론가와 자칭 시장전문가까지 나서서 해당 작가의 작품이 얼마에 팔렸느니 블루칩 작가가 누구라느니 하는 소식을 전하는 데 여념이 없다. 컬렉터는 귀에 의존해 그림을 사고 투자를 생각해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 되팔기를 거듭할 것이다. 마치 폭탄돌리기를 하듯이 그림이 떠넘겨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냉정히 생각해서 지금 미술시장에서 없어서 못산다는, 예약되어있다는 그림을 곰곰이 생각해보자. 이○○, 김○○, 이○, 우○○, 하○○, 최○○, 윤○○ 등등 말이다. 나는 좋은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 그림은 무한 반복되는 회로에 갇혀 있다. 나름 매력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작품 한 점 한 점에 목숨을 걸듯 그려진다기보다는 유사한 작업을 한정 없이 반복하거나 과도하게 인테리어적이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시각이다. 나로서는 좋은 작품이 시장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잘 팔려야 하며 팔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당연히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한국의 미술시장은 그와는 무관하게 작동되며 심지어 지나치게 왜곡되고 기형적으로 변질되었고 다들 돈의 노예가 되고 있다. 이러한 미술계에서는 작품 그 자체로 승부를 걸려는 작가가 생존할 확률은 극히 낮다. 그러니 작가도 작품이 아니라 현재의 시장구조에 동물적으로 반응하면서 잘 팔리는 작가의 그림을 모방하거나 짝퉁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그런 그림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쓰레기가 될 것이다. 억대의 그림이 쓰레기가 되는 것은 순간이며 그 사이에 경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