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전경


양평 C아트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허진권의 개인전 《PEACE-쓰기》(6.22-8.31)는 2014년부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무기한 퍼포먼스 프로젝트에 관한 보고전 형식의 전시다. 《PEACE-쓰기》의 의도는 과연 무엇인가? 작가는 그것에 대해 ‘PEACE’라는 명제를 통해 “같은 것은 무엇이며 다른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형식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대립하지 않는다”라고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95)가 『차이와 반복』의 머리말에 쓴 말을 믿는다. 이 인용문처럼 허진권에게 있어서 ‘PEACE’는 “서로 다른 것이 끝없이 반복될 때” 가능하다. 그는 세계가 평화로운 상태에서는 “지구상의 모든 국경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가는 여러 곳의 현장 바닥에 분필이나 나뭇가지 등으로 그린 점들을 연결하여 간단한 물고기 도형을 그리고 ‘PEACE’란 단어와 날짜를 쓴다. 거기에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자신의 의지를 담았다. 그 퍼포먼스의 횟수가 2014년 이후 800여 회에 이른다. 
허진권은 1981년에 창립한 자연미술 그룹 ‘야투’의 창립멤버다. 충남 보령시 원산도 출신인 그는 따라서 섬의 생리에 정통하다. 현재 그가 수행하고 있는 바닥에 ‘PEACE’ 쓰기는 어렸을 때 개펄에 뭔가를 쓰거나 그리며 놀던 추억의 연장이다. 점을 찍어 그린 물고기 형상의 그림은 유년기 체험의 원형이거나, 어렸을 적 본 고기잡이의 추억, 아니면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쿼바디스(Quo Vadis)』에 나오는 물고기 도형의 일화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다. 허진권은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에 연유하여 기독교도들이 카타콤베의 지하 비밀 예배소로 가는 길목을 지나려면 물고기 암호를 풀어야 통과할 수 있었다는, 혹은 성서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상징도 가능하다.
그 무엇이 됐든 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 허진권이 오늘의 현실에서 ‘쓰고 그리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남북이 대치된 상황에서 빈부 차이, 성별, 이념, 가치관이 혼재돼 극심한 혼란을 야기하는 이때 허진권의 <PEACE-쓰기> 퍼포먼스는 세계 평화에 대한 열망의 표현일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전쟁은 평화를 명분으로 한다. 평화를 위한 전쟁이다. 그렇게 나도 미술관이나 회화를 떠났던 대지예술을 다시 회화로 수용하여 미술관으로 호출한다. 나는 ‘PEACE-쓰기(Drawing PEACE on the site)’로 전시장을 테러한다. 이른바 ‘On-site Art’로 예술행위를 확장한다.”

허진권은 이번 전시에서 방 하나 속에 기존에 제작한 작품들을 한창 설치 중인 듯 무질서하게 몰아넣고 문에 노란색 AR-TIST LINE 출입금지 테이프를 부착했다. 마치 테러범죄 현장을 보존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노란색 테이프의 한가운데 A4용지 한 장이 부착돼 있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

“2024년 06월 22일 00시 <PEACE-쓰기> 침입 테러 발생 2024.6.22 허진권”

이 미학적 도발이 지닌 의미는 무엇일까?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상태에서는 새로운 예술의 탄생이 어렵다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허진권의 이러한 도발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전시장 바닥에 희게 칠한 수백 개의 지구본을 질서정연하게 삼각형 형태로 배치하거나, 온통 청색으로 칠한 다량의 박스를 열을 지어 배치한 대규모 설치 작업을 선보인다. 청색은 <PEACE-쓰기> 연작에서 화면의 상단에 넓은 붓으로 그은 형태에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평화의 상징이다. 전시장 한 가운데 커다랗게 써 놓은 물고기와 ‘PEACE’란 글자가 선명하다. 관객은 ‘접근금지’ 팻말이 부착된 노랑색선 바깥에서 오직 전시장 풍경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설치 중인지 철수 중인지, 모호한 전시 풍경을 앞에 두고 관객은 혼돈된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허진권은 희게 칠한 지구본의 적도에 일획론에 근거한 점을 찍어 나가듯,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허진권)가 상징하는 개념의 유희와 모순을 유머로 풀어간다. 삶을 천연덕스럽게 농담처럼 즐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