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기념비
이선영(미술평론가)
문호의 작품은 순간(Moment)을 기념비적(Monument)인 것으로, 요컨대 순간을 영원화 한다. 순간과 기념비, 또는 영원의 조합은 역설적이다. 최근 작품의 제목에 포함된 순간은 그림과 사진의 특징을 포함하며, 미술의 근대와 탈근대적 국면을 특징짓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순간을 고정시키는 회화는 늘 그런 역설을 품고 있으며, 회화보다 더 순간적인 사진 또한 그렇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순간의 미학]에서 ‘시간은 순간 안에 꽉 조여 있고 두 개의 허무 사이에 매달려 있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을 순간과 대조한다. 베르그송에서 시간의 참된 현실은 지속이고 순간은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순간의 미학]에서 순간은 순수함과 새로움을 가능하게 하는 귀한 가치로 평가된다. 바슐라르에게 순간이야말로 시간 고유의 성격’이며, ‘기억 즉 시간의 파수꾼은 오직 순간만을 지킬 뿐’이다.

The Moment, 2020, Oil on canvas, 80.0 x 116.5cm

The Moment, 2020, Oil on canvas, 80.0 x 116.5cm(부분도)
회화의 순수성을 강조했던 모더니즘은 추상적인 경험을 중시한다. 마이클 프리드는 모더니즘적 경험을 엄청나게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순수 지각에 비유한다. 그 찰라 속에서 사람들은 순간적이면서, 동시에 영원히 작품의 요점을 파악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니멀리즘 이후의 현대미술은 지속에 방점을 찍는다. 순간과 지속, 또는 시각성과 몸의 체험을 대조하는 현대미학의 맥락 속에서 문호의 작품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두 형식 또는 두 매체를 수렴하는 그의 작품은 추상은 아니지만 순간을 담고 있으며, 순간이면서도 특유의 붓터치를 통해서 지속을 내포한다. 그는 ‘일상과 여행에서 작업의 소재를 찾기 위해 장소와 대상을 선정하고 바라본 장면을 회상하고 새롭게 재현하기 위해 카메라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면서, 이는 ‘디지털 사진을 이용하여 객관적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변형하며 감각적인 붓질을 더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화가이기에 회화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가 디지털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은 ‘회화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는 스케치 단계까지만 포토샵 도움을 얻는다. 채색, 색의 선택, 붓질, 부조처럼 파내는 부분은 작가의 몫이다. 본래의 색도 다 바꾸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사진과 회화의 관계에 대해 ‘포토 필터링’이라고 하며, 이전의 [번역된 풍경] 전 부제처럼 ‘번역’이라고도 한다. 사진과 회화는 경쟁 상대였다가 서로를 흉내 내다가 각자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등의 밀접한 상호 관계를 이루어왔다. 하지만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카메라의 원리는 미술에서 사용되었고, 사진은 그러한 시각적 장치가 자동화된 것이다. 본격적인 정보화 시대로 접어들어 사진적 시각이 편재함에 따라 무엇이 순수한 회화적 시각인지도 불확실해졌다. 화가에게도 카메라는 스케치 대용으로 필수가, 사진을 회화의 중요한 소스로 삼든지, 아니며 단순한 수단으로 삼는지는 각자의 경험이나 취향, 그리고 미학의 선택일 것이다.

The Silent Man, 2024, Oil on canvas, 116.5 x 90.7cm

The Silent Man, 2024, Oil on canvas, 116.5 x 90.7cm(부분도)
소재 면에서는 일상과 여행이라는 두 시공간을 오고 간다. 일상은 삶의 항상성을 유지해 주지만 반복적이고 기계적이어서 벗어나고 싶다. 일상으로부터 떠나는 체험은 독특하고 생생하지만, 사치이면서 때로 위험하기도 하다. 작가는 ‘여행은 작업의 출발’이라고까지 말한다. 어릴 때부터 가족 여행을 즐겼던 작가에게 좋은 기억은 거듭되는 출발을 하게 한다. 일상의 풍경 역시 이동과 관련된 것이 많다. 플랫폼에서 출퇴근을 기다리는 대중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은 장소나 그 장소를 점유하는 주인공들이나 모두 익명성을 띈다. 그것은 마르크 오제가 ‘비장소’라고 이름 붙인 현대도시의 특성이기도 하다. 여행에 사진기는 필수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일상을 상시적으로 찍는 습관은 디지털 카메라가 스마트폰으로 들어온 이후의 일이다. 지금 대세가 된 디지털 카메라가 불과 20여 년 전에야 대중화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작가는 ‘아날로그 감성을 가지고 디지털로 작업’한다고 말한다.
문호에게 회화는 소재, 매체, 언어의 차이에 대한 감각을 세분화함과 동시에 종합하는 유력한 형식이다. 세계를 수집하고 소비하는 사진에 내재한 잠재적 특성은 대량 소비시대의 일상에서 더욱 현실화 됐다. 하지만 사진을 회화로 그대로 옮겨지지 않는다. 문호의 작품은 사진과 밀접한 회화의 양식인 극사실주의가 아니다. 사진은 회화의 언어로 ‘번역’되며, 이 번역에서 방점은 원본의 재현보다는 재창조에 찍힌다. 특히 여행이 거의 금지되다시피 한 코로나 시기에는 여태 찍어온 사진들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이전에는 주로 하늘과 땅, 그 사이로 나뉜 광활한 풍경을 담았는데, 부분을 확대해 보기 시작했다. 확대의 국면에서도 여행은 이루어진다. 미시적 세계에서의 여행은 인간적 시점이 아닌 카프카적 변신을 요구할 것이다.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가 파악되는 거대 유기체적인 관점이 아니라, 부분이 단지 부분일 뿐인 세계일 것이다.

Heavenly Sunlight, 2019, Oil on canvas, 98.0 x 116.7cm, 2019
현실에서 사진이 만들어지기 보다는 사진에서 또 다른 이미지가 파생되었다. 이러한 메타적인 단계에서 사진은 경험을 담기보다는 미시적으로 분석되었다. 지시 대상 보다는 거리의 변화에 따른 추상적 국면, 이에 상응하는 변화를 회화적 언어로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줄리언 벨은 [회화란 무엇인가]에서 캔버스 위에 발려있는 물질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회화는 무한하고 매혹적인 자연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는 회화가 알다/원하다, 재현하다/표현하다, 신성/인간, 자연적/인공적 등, 상반되는 단어들은 서로 결합을 되풀이할 수 있으며 수많은 결합 속에서 서로 교차한다고 말한다. 사진기가 포착했을 장면이 회화로 거듭나면서 강조되는 것은 붓과 물감의 흔적 같은 물성이다. 이는 질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회화가 상징적인 코드화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감각의 논리]는 코드가 손가락적인 것이라고 하면서 손적인 것과 대조한다.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 컴퓨터 자판을 칠 때 우리는 손가락을 쓴다. 우리의 일상은 이미 정해져 있는 코드를 선택하는 것으로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그림을 그릴 때 그는 손가락만으로 하지 않는다. [감각의 논리]에서 코드적인 것은 눈에 대한 손의 종속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비난받는다. 들뢰즈에 의하면 손이 종속될수록 시각은 이상적인 광학적 공간을 발전시키고 자신의 형들을 광학적 코드에 맞게 포착하는 경향을 띈다. 카메라는 광학적 기능의 첨단에 있지만, 화가는 ‘광학적 기능과는 구별되어 오직 자신에게만 속하는 접촉 기능을 자체 내에서 발견하게 될 것’(들뢰즈)이다. 문호의 작품에서 두터운 물감자국들은 눈으로 만지는 듯한 촉각적인 공간을 만든다. 고교 때 부친이 물려준 수동카메라는 미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에 작가의 시각적 문법으로 자리 잡게 했을 것이다. 여행과 그에 수반되는 사진적 시점은 문호의 회화에 깊이 녹아있다.

Last Summer, 2018, Oil on canvas, 50.0 x 150.0cm

Step by step, 2020, Oil on canvas, 49.9 x 200cm
그가 처음 카메라를 접했을 때와 또 다른 극적 변화는 디지털화이다. 회화는 최초에 찍은 사진으로부터 색채와 질감, 형태의 변형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초창기 작품에서는 동양화나 근대회화를 유화 버전으로 그린 작품들이 많은데, 유화는 그에게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매체다. 어떤 작가에게도 손의 일부 같은 형식이 있다. 그게 사진기면 사진가가 되는 것이고, 그게 물감이면 화가가 되는 것이다. 작품 [The Moment](2020)에서 잘 정비된 공원은 문명 안에 들어온 자연의 모습이다. 붓질은 나무의 잎을 색으로 출렁이게 한다. 태양 빛을 가득 받는 한낮의 식물은 생명 활동으로 분주할 것이다. 한시도 멈추지 않는 자연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다. 다가가서 보면 화면은 두툼한 물감의 경계면이 그림자를 드리우는 회화 그자체이며 광학적 환영은 사라진다. 작품에 일루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색이 칠해지기 이전의 스케치를 보면 명암법과 원근을 알아볼 수 없는 완전한 추상이다. 작가는 이를 ‘회화의 부조적 표현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유화의 재료적 성질과 연관 지어 평면 회화에서의 입체적 방식과 거리에 따른 시각적 변화에 끼치는 영향에 관해 연구’이기도 하다. 마틴 제이는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에서 하나의 단일한 눈과 육안과의 차이를 원근법의 예를 통해서 강조하는데, 이는 사진적 시각과 회화에도 적용될 수 있다. 마틴 제이에 의하면 영속적인 하나의 시점으로 환원된 탈신체화된 시각 시각 질서를 채택한다는 것은 화가가 그처럼 기하학화된 공간 속에서 묘사된 대상들과 정서적으로 서로 얽히는 것을 철회한다는 의미다.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눈은 회화적 형식에 의해 침식되고 변형된다. 식물을 근접해서 그린 작품 [The Moment](2021)는 적극적으로 드러난 붓터치에 의해 추상성이 강화된다. 그의 붓터치는 뭉글뭉글한 구름 같기도 하고 거센 소낙비 같기도 하다. 작품에 따라 붓터치는 기하학적으로 때로는 유기적이다. 수풀을 그린 [The Moment](2020)는 부분으로 포착되어 있어 그자체가 추상인데 지시 대상의 실루엣을 벗어나는 색 또한 추상적이다.

Stop for a moment, 2019, Oil on canvas, 96.7 x 161.8cm

Sweet Peace, 2018, Oil on canvas, 96.8 x 161.9cm

The Moment, 2020, Oil on canvas, 60.6 x 91.0cm-1

The Moment, 2021, Oil on canvas, 60.6 x 91.0cm
식물은 동물과 달리 정지된 이미지인데, 통상적인 거리 감각의 변화를 통해 마치 현미경 아래의 미생물이나 수생식물처럼 꿈틀대는 듯한 이미지로 변모한다. 사람들의 표현도 예외는 아니다. 작품 [The Moment](2022)는 유명 골퍼의 경기 장면을 관전하는 대중들을 포착한 풍경이다. 골프장에서 발견될 수 있는 특이한 구도로, 완전히 인공적으로 조율된 자연의 영역 다른 한켠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상의 선들로 지글거린다. 텅 빈 잔디밭과 밀집된 사람들의 대조는 현대 일상에 내재된 흐름을 조절하는 힘을 느끼게 한다. 대중들은 덩어리진 개체들로 나타난다. 그것은 거의 물질과 에너지의 운동처럼 보인다. 사회적인 것도 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관점도 있다. 필립 볼이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사람들이 열린 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여 다니는가, 어떻게 결정하고, 투표하고 연합과 집단과 조직을 형성하는가에 대해서 물리학이 어떤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지 전망한 바 있다.
과도하게 밀집되어 마치 에너지의 흐름처럼 보이는 대중들은 얼마 전 한국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 때문에 공포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자발적으로 움직이던 군중이 어떤 임계점에서 개체의 의지를 떠난 치명적 사건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가. 풍경이 많은 그의 작품에서 공간 또한 질감을 가진다. 땅과 바다, 또는 하늘 그 사이를 잇는 사람이 보이는 최근 작품 [The Silent Man](2024)에서 삼계(三界)와 인간은 모두 비슷한 붓터치로 채워진다. 큰 작품은 아니지만 인간이 작게 표현되어 있어서 낭만주의 화파처럼 자연의 숭고함을 강조한다. 그의 붓질은 인간이 대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은 자의 일렁이는 마음을 조형적 언어로 표현한다. 세잔과 입체파 화가들이 발견하고자 했던 공간의 질감은 일루전과 회화적 진실을 중첩시킨다. 터너의 바다 풍경이 그러했듯이 자연에 대한 숭고미는 현대회화를 추상으로 이끌었다. 여행을 즐기는 작가는 여가 생활 중인 대중을 많이 그렸다.

The Moment, 2020, Oil on canvas, 98.0 x 116.7cm

The Moment, 2022, Oil on canvas, 130.3 x 194.0cm
[The Moment](2022)에서 탁 트인 해변에서 서핑을 즐기는 사람과 반려견은 휴가에 대한 대표적인 이미지다. 작품 [Last Summer](2018)는 사람들이 있는 모래사장 쪽에 화면을 더 할애한 해변의 풍경이다. [Sweet Peace](2018)는 공원으로 소풍 온 가족의 모습을 담은 풍경으로, 중앙의 행복한 사람들만큼이나 눈길을 끄는 것은 다양한 녹색의 계열로 칠해진 숲이다. [Heavenly Sunlight](2019)에서 커다란 백팩을 맨 여행자들은 햇빛 가득한 거리를 걷고 있다. 빽빽한 도시적 밀도의 생활공간을 염두에 둘 때, 햇빛 가득한 공간은 행복과 자유의 조건으로 다가온다. 지구에 대한 태양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빛을 신성함의 근원으로 간주하게 했다. 상호가 나타나지 않아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지막한 상가들이 마주 보는 운치 있는 작은 길은 여행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진풍경이다. 작가는 빛으로 기억되는 그날의 여정을 자신만의 필적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여가나 여행의 즐거움은 그렇지 않은 일상을 전제한다. 여행에의 충동은 판에 박힌 기계적 일상에 대한 반작용 아닌가. 대중의 흐름이 가시적인 플랫폼 등이 일상과 여행에서 공통적인 배경이 될 수 있다. 물론 매일 출근하는 일상인은 몇 시에 반드시 정해진 차를 타고 정해진 궤도를 몸을 실어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수인(囚人)이다. 같은 궤도에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밀어 넣는 것, 그것이 시스템이 흥행하는 비결이다. 선택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 깔때기에 밀어 넣는 것은 경쟁과 경제의 공통적 패러다임이다. 작품 [Step by step](2020)은 출퇴근 시간대의 지하철역 풍경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을 가시화한다. 제작 연도가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전 세계인을 고통으로 몰아넣은 시점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 빽빽한 인파의 풍경에서 타인과의 접촉에 대한 공포를 생각하게 된다.

The Moment, 2022, Oil on canvas, 80.5 x 116.5cm

The Moment, 2022, Oil on canvas, 97.2 x 162.3cm
그의 일렁이는 붓터치는 사람들의 익명성을 더욱 강조한다. 대중은 자연을 이루는 입자나 파동처럼 다루어진다. 물리학에서 사건이 터지는 임계점처럼 대중들의 움직임도 지글거린다. 파노라마처럼 좌우로 긴 화면은 이 대열의 끝없음을 암시한다. 플랫폼에 밀집되어 떠밀리듯 나아가는 사람들은 포로들처럼 보인다. 전쟁은 아니니까 삶의 포로이다. 시스템화가 가속되면서 개인이나 개성이 가능한지에 대한 회의가 있다. 한 방향을 향해 빽빽하게 늘어선 대중들은 시간 맞춰 도착하는 열차처럼 이미 결정된 삶의 궤도를 돈다. 정지화면 속에서도 이동성이 느껴지는 것은 비슷한 동작을 하는 사람들이 죽 나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지된 매체인 회화에 잠재적 동감을 부여했던 화가의 해법은 동영상의 시대에 더 색다르다. 퇴근길 버스를 기다리면서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담긴 [The Moment](2022)는 사람들의 갖가지 다른 동작에 의해 미세한 움직임을 내포한다.
야간조명이 켜진 배경 때문에 더 흐릿한 형태는 흐름으로 나타난다. 야간의 플랫폼을 그린 작품 [The Moment](2023)에서 같은 차를 탈 여러 사람들이 서 있지만, 그들은 각각이다. 플랫폼 벽의 수직/수평의 기하학적 패턴은 현대적 삶을 결정하는 좌표처럼 보인다. 이 풍경은 어둠 속에서 빛의 띠처럼 나타난다. 가로로 긴 구성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필름을 손수 다루어 왔던 세대의 감성이 드러나는 것은 아닌가. 반면 스마트 폰은 세로 방향의 스크롤이 보편적이다. 플랫폼 같은 현대적 환경에 편재하는 디지털 스크린은 그저 푸른색 점으로 나타날 뿐이다.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를 위해 아이들 교과서마저 없애버리는 일방적 교육 정책이 펼쳐지는 현재, 화가는 디지털 문화를 여러 문화 중 하나로 상대화시킨다. 미디어 이론가인 마크 포스터는 [뉴 미디어의 철학]에서 전자 통신은 전기신호에 기반하여 상당히 새로운 언어적 경험을 이끈다고 말한다.

The Moment, 2023, Oil on canvas, 49.9 x 149.7cm

The Moment, 2023, Oil on canvas, 49.9 x 149.8cm
그에 의하면 상징적 소통구조의 변형 방식에 따라 시대구분이 가능하다. 첫째, 대면적이고 구어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의 시대, 둘째, 인쇄를 매개로 글로 씌여진 의사소통의 시대, 셋째, 전자적으로 매개된 의사소통의 시대 등이다. 지금은 상징적 유사물이나 기호의 재현이 아니라 정보적 시뮬레이션이 지배적이다. 마크 포스터는 미디어의 복잡한 언어세계, 컴퓨터의 데이터베이스, 국가 및 기업의 감시 장치, 과학의 담론, 이들 분야는 언어의 재현적 기능을 의문시하는 커뮤니케이션 패턴이라고 지적한다. 이들 언어의 힘은 자신 외부의 다른 것을 재현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내적인 언어구조(자기지시성)로부터 나온다. [뉴 미디어의 철학]에 의하면 디지털 시대의 리얼리티는 물질적 세계가 아니라 기표의 흐름자체가 된다. 대상 자체가 불확실해지면 재현도 무의미해진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문호의 작품은 자체 내에 여러 미디어의 여러 단계가 공존하는 셈이다.
작품 [The Moment](2023)에서 한낮 도시의 거리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강조된 붓터치에 의해 보다 역동적으로 나타난다. 횡단보도 앞에 늘어선 보행자들을 그린 [Stop for a moment](2019)에서 근접한 장면인데도 불구하고 익명성이 강조된다. 지워진 상호들은 장소 또한 특정하지 않는다. 도시화는 사람들의 차림새와 행동 주기, 지켜야 할 규칙, 건축적 환경을 균질화한다. 거기가 도쿄든 뉴욕이든 서울이든 부산이든 상관없는 일률적 문법이다. 흑백 버전의 풍경 또한 사진의 영향력이 보인다. [The Moment](2022)는 위에서 포착된 거리의 사람들은 다양한 흑백의 계열로 칠해져 있다. 마찬가지의 시점을 가진 작품 [The Moment](2020)에서 선택된 소재는 평범한 일상이며 다양한 흑백 계열의 색조를 칠해보기 위한 실험적 대상이다. 흑백사진이나 먹 또한 세상을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 동양화, 여행과 일상에 대한 관심은 20여 년 전의 작품들과 연속적이다.

The Moment, 2022, Oil on canvas, 49.8 x 199.8cm

The Moment, 2023, Oil on canvas, 50.0 x 200.0cm
여행은 시간여행을 포함한다. 동양화는 내부에 이동의 시점이 내재한다. 작가는 서양화과 다녔지만 어릴 때부터 동양화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특히 이상범의 필획과 부드러움을 좋아한 작가는 동양화를 유화로 시도하기도 한다. 배경은 동양화인데 다른 코드를 심기도 한다. 작품 간의 대화이다. 청전의 필획은 픽셀로 바꿔 그만의 픽셀로 다시 표현하기도 했다. 픽셀은 보통 바둑판적인 그리드로 나타나지만, 문호의 픽셀은 유기적이다. 이전 작품에서는 [夏景山水](2007), [秋景山水](2007) 등은 동양화를 서양화로 그렸는데, 유화여도 동양화의 여백과 운치를 살린다. 시공간의 차이이기도 한 여행은 코드와 코드를 섞는 화법으로도 나타난다, 유화 작품 [Welcome to Dongmakgol](2005)에서, 동양화풍으로 그려진 풍경에 현대적 여가 활동인 패러글라이딩 무리가 낙하 중이다. 작품 [자기야 어딜 쳐다봐!](2006)에서 가치관이 차이 나는 여러 시기의 그림을 합성한다.
간극을 상상력으로 채운다. 비슷한 연도에 그려진 작품들인 [An Isolated House](2007, 2008), [VANITAS](2007) 등에서는 사진적 시점이 선명하다. 하지만 이전의 작업을 접게 된 이유는 도록이나 화첩을 통한 간접 경험의 한계 때문이다. 작가가 직접 본 세상을 그려야 했다는 생각으로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 때 바로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현재의 체험을 중시하게 된다. 카메라 뿐 아니라 셔터를 누르는 몸도 그 때 거기에 있다. 이러한 실제의 순간이 자주 오지는 않지만. 정보의 짜깁기와 비교할 수 없는 충만감을 준다. 풍경보다는 인물로 관심이 옮아갔다. 하지만 인물은 풍경만큼이나 철저히 익명적이다. 뭉개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파내진 모습이다. 초창기의 붓터치는 매끄러웠지만, 요즘은 유화의 점성을 살린다, 붓터치는 작가의 싸인처럼 그 자신의 필적을 보존한다. 면의 경계를 두툼하게 해서 물감의 그림자가 생겨나 ‘회화의 부조적 표현’은 사진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리에 따른 시각적 변화를 준다.
출전; 호반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