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동네 고양이 밥을 챙기는 한 캣맘은 작은 밥자리를 여러 군데 마련해 준다. 길을 오가며 여기저기 숨겨진 작은 종지를 볼 때마다, 마치 정한수 같아서 숙연해진다. 여러 자리에 조금씩 배식함으로서 길고양이는 경쟁하지 않고 각자 편한 자리에서 밥을 먹는다. 쓰레기 봉지를 뜯지 않아도 되는 통통한 고양이가 느긋하게 골목길을 쏘다니는 모습은 그곳의 인심을 나타낸다. 공존과 평화, 여유와 자유로움이 깔려서일까, 한적한 주택가였던 곳은 언젠가부터 골목 구석구석 저마다 개성이 있는 작은 전시장도 생겼다. 미술이 아니더라도 여러 갈래로 뻗은 골목을 구경하는 사람도 찾아온다. 먹거리가 두루 퍼져 있어 경쟁을 줄여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은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대량생산/소비하는 현대사회는 뭐든 대규모여야만 흥행을 보장받는다. 도시집중은 과도한 경쟁을 야기시켜 출산율까지 떨어뜨린다는 분석이 있다. 그것은 한 도시 내에서도 반복되곤 한다. 팬데믹 이후 공실률을 회복하지 못하고 피폐해진 대학가가 그 예다. 을씨년스러움을 넘어서 초현실주의적이기까지 한 폐허같은 광경은 삶의 팍팍함의 지표인 인구 감소세와 맞물려 계속될 것이다. 이전에 중심에 속했던 곳조차 주변화되는 것이다.
 

<Labyrinth of Knossos> ⓒ Davis' Mega Maze, USA ; “이제 모든 것은 더 이상 직선이 아니다.” 자크 아탈리, 『미로』 中


중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 합병되는 경우다. 주변이 사라지는 만큼 중심은 더욱 강화된다. 과도한 경쟁을 유발하면서 사회가 발전되었지만, 미리 당겨쓴 미래는 괴물같이 다가온다. 집중화, 또는 양극화는 공통의 재난 또한 다른 강도로 맞닥뜨리게 한다. 하나의 모델만 가지는 발전주의는 중심/주변의 이원적 구조를 통해 진화됐다. 하나와 둘, 그리고 여럿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소급된다. 우선, 하나의 중심이라는 관념은 종교적이다. 21세기를 전망하는 『21세기 사전』의 저자이기도 한 자크 아탈리는 『미로』에서 사막이라는 척박한 환경이 유일신 사상을 낳았다고 해석한다. 자크 아탈리에 의하면 유대민족이 계율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맸기 때문이며, 사막에서 발생한 이슬람교에서도 미로가 나타난다. 하지만 사막에서의 유목이라는 역사적 조건이 달라진 현재, 유일성은 상대를 부정하는 극한 갈등으로 치닫곤 한다. 현재 그 격돌지 중의 하나인 가자지구는 학교와 병원조차 폭격 대상이 되고, 방치된 쓰레기와 시체가 함께 거리에 나뒹구는 등, 삶이 완전히 마비되어 있다는 끔찍한 소식의 진원지다. 정파적으로 안정된 두 세력의 대결은 연쇄적인 지옥도를 펼친다. 적대시된 이항대립적 구조는 한국의 내외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정수진, 〈2002년 1월 내쇼날지오그래픽, 14페이지에 나온 한 소녀의 얼굴로 표상된 가변적 지시-서술 구조를 가진 사실적 상황과 그를 둘러싼 다양한 내적감각에 대한 표상들〉, 2013-2014, Oil on canvas, 100×100cm


점에서 점으로 이어지는 최단거리 유일한 노선의 티켓을 따기 위한 속도전은 대개 동일한 목적지나 수단을 전제한다. 정치나 기업이 자신의 지배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다수를 한 줄로 몰아세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한 줄 세우기는 소수의 경쟁력이며 다수의 압박감이다. 근대 국가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여럿이 아닌 하나였다. 하나로의 수렴, 또는 환원은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배타적이고 투쟁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선형적 질서를 벗어나려는 우회로도 존재한다. 각자의 목표를 가지는 다양한 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길 아닌 길은 낭비, 잉여, 탈선, 낙오 등으로 간주된다. 예술은 선형적 고속도로가 아니라, 미로와도 같은 수많은 우회로로 이루어진 미지의 대륙이다. 예술은 동일한 가치를 맹신하는 획일성에 저항한다. 예술적 저항은 지배 질서에 안착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식인 이항대립이 아니라, 옆길로 새는 탈주이다. 예술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헤테로피아를 원한다. 하나와 그것의 쌍둥이인 둘이 아니라, 여럿을 지향한다. 이 다양한 세계에 대한 이미지는 한 철학자에 의해 밤하늘의 별이나 고원, 주름 등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생태계 건강의 척도도 종 다양성 아닌가. 하나의 중심적 가치에서 탈주할 때 그것이 다시 코드화, 영토화될 위험은 있다. 르네상스 이후 오래된 중심의 재현을 해체하는 현대미술은 대안적 삶의 가치와 융합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