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온 작가


회화의 납작한 세계 안으로 들러붙어 하나가 된 이가 있다. 캔버스 위 평평한, 그리 두껍지 않은 안료의 흔적 속에 자기 영혼의 궤적을 냅다 그어버린 어느 화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다.’ 건조한 의도만 밝힐 뿐, 그림 밖 언어로 잘 드러나지 않는 그의 이름은 채온. 물감 묻은 그림을 그리고 살고 있다.

채온은 한때 두 개의 세계를 보았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의식하고 폐부에 삼킨 감정을 삼켜 다스려야 하는 세계 하나. 평범과 안온의 일상이 흐르고 활기와 웃음이 공기처럼 존재하는 세계 하나. 간극을 벌린 두 세계를 하나로 밀착해 붙여버리고, 어긋난 정서적 격차를 무심함으로 채워 완성한 게 채온의 지금 삶, 아니 그림일까.

무심함. 누군가에게는 예술의 숭고라 정의될 만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무심함이다. 많은 것을 함축하고 많은 것을 응축한 하나의 획으로 우연처럼 캔버스에 툭 던져진다. 뜻이라기에는 얼룩이고, 계획이라기에는 불분명한 형질 속에서 채온이 냉담히 섞고 휘저은 세계의 실상을 볼 수 있다. 회화적 탐구와 미학적 탐닉일 수도, 불완전한 마음의 거친 발로일 수도, 정제된 심상의 먹먹한 행위일 수도 있는 것을.



〈유령〉, 2021, watercolor on canvas, 61×45.7cm


보이는 그것은 또한 유령이다. 사람 아닌 유령의 형태가 이따금 거기 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애매한 중간자적 존재 기표가 구상의 재연인지 추상의 드로잉인지 모호하게 그려져 있다. 떠난 이의 부재, 새로 만나는 인연, 상반된 각각의 잔상을 안고 살아가는 불안한 실존의 민낯이 그런 유령일 것도 같다.

만질 수 없으되 볼 수 있는 것, 꿈의 환시는 되어도 드러난 실체일 수 없는 것, 가시적이되 현실감은 먼 것을 채온은 붓에 붙들어 증언한다. 바깥의 대부분이 침잠한 새벽 시간, 각성한 존재로 깨어 작업하는 화가가 만들어낸 자기만의 도상이며 우리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변상증 變像症) 패턴이기도 하다.

미술의 오랜 역사를 환기해 말하자면, 뵐플린(Heinrich WÖLFFLIN, 1864-1945)이 분류한 두 개의 개념-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중 채온은 물론 후자다. 윤곽은 흐리고 명료함은 별로 없는 색채의 형상이 화면을 지배한다. 뚜렷하지 않은 필선이 배경과 혼합돼 뭉그러진 이미지로 드러난다. 가촉적이지 않으나 목격할 수는 있는, 유령 같은 것이다. 찻잔, 꽃나무, 오리, 강아지, 케이크, 장난감, 사람... 그가 그리는 모든 게 일련의 회화적인, 유령 같은 것이곤 했다. 사물과 배경,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 모두 채온의 회화에서는 혼령 비슷한 존재로, 동등한 위계로 뭉개 뒤섞인다.



〈소원성취〉, 2023, oil on canvas, 27.3×22cm


분명한 의도를 거치지 않은 화면 처리. 그러나 그들이 우연처럼 뭉쳐 명백히 말하는 실재. 그것은 불안하고 슬프지만, 재밌다. 유령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이유를 물은 필자에게 채온은 ‘사람의 얼굴은 자세히 보면 웃기게 생긴 것 같다’고 했다. 동그란 눈과 벌어졌다 다물어지며 움직이는 입을 보라고. 한편 채온은 전작 〈친구〉(2019)에서 화분과 컵 같은 사물을 그린 뒤 그들을 친구라고 이름 붙인 적이 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신기한 그림’ 속 대상이 모두 ‘신기한 대상’이라고 적어두기도 했다. 사람의 생김새는 낯설게 보이고 사물하고는 가까운 친구가 된 작가의 심상으로부터 연대와 고독, 공감과 무감함을 거친 묘한 패러독스를 본다.

동질한 생김새로 연결된 듯, 그러나 고립된 삶을 사는 각자의 우리는 서로가 신기하다. 낯선 서로 간의 질량 아래, 처연해진 마음이 숨어있다. 나는 이를 끄집어 암시한 채온의 모습과 그림을 본다. 회화의 세계로 들어가 거기 살기를 자처한 어떤 예술가의 승화된 흔적도.



- 채온(1985- ) 한남대 조형예술대 졸업. 서울예술재단 제1회 포트폴리오 박람회 최우수상 수상(2015), 대구문화예술회관 올해의 청년작가(2018), 대구문화재단의 청년예술가육성지원사업 선정(2018-2019). 《FULL BLOOM》(표갤러리, 2023) 등 다수의 개인전, 단체전 참여.

- 오정은 『디자인 프레스』 외부필진. 부천문화재단 차세대 전문예술활동지원 멘토. 문화도시 영등포 예술기술융복합문화 자문위원. 박수근미술상 추천위원(2024). 『경향신문』 오피니언 ‘오정은의 미술과 시선’ 연재(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