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변화하는 삶

  

이선영(미술평론가)

 

우단비의 작품은 풍경 속에 홀로 있는 모습같은 구체적 형상도 등장하지만, 삼각형, 물방울 등을 떠올리는 단순한 형태와 강렬한 색감, 세찬 흐름이 공통적이다. 추상화되어 있지만 풍경적 요소가 강한 화면에서 급격한 원근감 속에 배치된 전경과 후경 사이에도 속도감 있는 돌진이나 물러남이 느껴진다. 불타오르는 듯한 선의 흐름이 동적이다. 동감은 정지된 매체인 회화의 한계를 보정 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삶의 불안을 상징한다. 바람이 부는 날 작가는 산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모습을 보았고, 살아있음 자체가 흔들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wave] 시리즈에도 나타난바, 자연의 ‘살아있는 움직임’은 작가의 ‘내면을 요동치게 했다.’ 상승과 하강, 전진과 후퇴는 풍경과 인간 모두에 해당된다. 작가가 설정한 무대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는 생애주기에서의 기복, 감정의 기복 등을 떠올린다. 우단비의 작품에서 색은 화려하지만, 그 또한 어두운 불안을 감추는 과도한 밝음이다. 




우단비_Catharsis_캔버스에 유채_130.4x194cm_2024



우단비_Echo_캔버스에 유채_162x261cm_2024



우단비_Illusion1.2_캔버스에 유채_116.5x182cm_2024



우단비_시차_캔버스에 유채_31.7x41cm_2024



화면에는 변화하는 물질, 격차에 의해 발생하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그것은 풍경은 주체의 기쁨과 슬픔과 공조한다. 공조가 강해지면 고통은 희열로 전환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둘러싼 자연 안에서의 성스러운 교감과 이를 언어화할 수 있다면 말이다. 자연으로부터 온 색들은 각자의 자리를 벗어나곤 한다. 산은 붉고, 물방울은 녹색이고, 하늘 또한 푸른 계열이 아닌 작품이 많다. 물론 자연의 거대한 캔버스인 하늘은 결코 하나의 ‘하늘색’으로 고정될 수 없지만 말이다. 오염 때문에 녹조로 걸쭉해진 물도 녹색일 수 있고, 산은 단풍으로 가득 물들 수도 있다. 녹색 물방울 형태는 나무와도 겹치고, 작가에게 산은 ‘지질학적으로는 불’이다. 우주를 이룬다고 믿어지는 4원소를 바탕으로 한 ‘물질적 상상력’(바슐라르)처럼, 물이나 불같은 근본적 요소는 다가(多價)의 상징이다. 조합의 방식에 따라 다양한 서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것이 마음의 풍경이라면, 화면에 가득한 물방울 형태는 눈물로도 보인다. 


눈물은 다른 체액과 마찬가지로 경계를 넘어 흘러넘친다. 붉게 타는 산은 불에 의한 정화일 수도 있다. 이때의 물과 불은 재난과 동시에 해방이다. 우단비의 작품은 굳이 하나의 형태와 색깔을 하나의 의미로 고정시키지 않는다. 지시대상으로부터 의미는 자유롭지만, 자연은 인간과 예술의 영원한 그리고 풍부한 원천임이 부정될 수 없다. 자연과의 끈을 놓은 예술은 실재감을 상실한다. 이미지가 편재하는 시대에 그림은 실재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유력한 통로임을 직감하고 확신하는 이가 바로 화가이다. 화면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듯한 삼각형은 산을 상징하는 기호로, 작가의 부친과의 관계가 펼쳐지는 장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서 삶을 꿈꾸듯 그렇게 아빠는 산으로 갔다’고 한다. 홀로 산으로 간 부친과 오랫동안 해외에 있었던 작가는 모르긴 몰라도 편치만은 않은 관계였을 것이다. 작가는 ‘풀리지 않는 감정의 매듭’이 있는 부친과 ‘산의 깊이만큼 거리가 있다’고 토로한다. 




우단비_Desire_캔버스에 유채_162x130.5cm_2023



우단비_Illusion3_캔버스에 유채_53x45.5cm_2024



우단비_Illusion3_캔버스에 유채_53x45.5cm_2024



가족 로망스에 기반한 정신분석학은 집이나 가족처럼 가장 친밀한 곳이 기괴함과 상처의 원천임을 주장했다. 작품의 주무대가 자연이라고 해서 작가가 전원생활을 즐기는 것도 아니다. 우단비의 ‘자연’은 거리를 두고 음미할만한 칸트적인 의미의 ‘무관심적인’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다. 작품 [Desire]처럼 중립이나 적정 수준이란 없다. 자연은 대개 부친을 만나러 가는 길과 관련된다. 자연을 상징하는 산, 나무 등의 요소는 불이 붙거나 눈물이 나거나 하는 등의 강렬한 심리적 사건들을 증언한다. 조그만 불이나 눈물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이기도 한 화면을 가득 채운다. 19세기 말에 20세기의 표현주의를 열었던 미술사적 흐름을 상기시키는 심리화된 풍경이다. 색과 형태가 강렬하지만 균형감은 있다. 기하학적 선과 유기체적 곡선, 불과 물, 상승/하강하는 움직임. 대칭/비대칭, 짝을 이루는 장면 등이 공존하고 교차한다. 물론 균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가까스로 찾아진 균형은 또 다른 불균형으로 인해 흔들릴 것이다. 작가는 실존주의 철학자 카뮈의 [시지푸스의 신화]의 예를 들면서, 불안을 인간의 보편적 조건으로 간주한다. 영원히 돌을 굴리는 인간은 부조리한 벌을 받은 것인가. 작가는 이 신화에서 인간은 ‘그 불행한 운명에 대해 자살이 아닌 반항으로 대응하며, 이는 행위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는 작업과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문학이나 신화만큼이나 자연은 영감의 근원이 된다. 늘 깨어있어야 하는 존재인 작가에게 불안은 변수가 아니라 항수이다. 이러한 불안에 반응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작가의 방식은 불안을 연료로 삼는 것이다. ‘나무는 타오르듯 흔들거렸다. 검푸른 나무숲은 다양한 색으로 움직인다. 나는 불안을 태워 빛을 낸다.’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해왔고 잘 해나가고 있던 일, 즉 작업에 몰두하며 살기 힘든 세상이 바로 부조리의 핵심이다. 작가는 삼각형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산을 그릴 때 선의 흐름은 하강과 상승을 반복함을 상기시킨다. 




우단비_Wave2-1_캔버스에 유채_53x45.5cm_2023



우단비_붉은 길_캔버스에 유채_116.5x91cm_2024



우단비_사라진 소원_캔버스에 유채_72.5x60.5x5.5cm_2024



산이나 나무나 모두 땅에 뿌리를 박으며 하늘을 향한다. 직립하는 인간 또한 비슷하지만, 자연만큼 토대가 단단하지 않다. 작가는 인간이 자연과 다른 점으로 토대의 부재, 즉 불안을 의식한다. 하지만 불안한 시선에 의해 걸러진 자연은 불과 물이라는, 경계를 넘는 원소적 요소에 의해 변형된다. 불안 또한 주체의 경계가 모호함을 말한다. 우단비의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두려움을 주는 대상은 없다. 주체와 대상은 연동되어 이해되는 관계적 관념이다. 우단비의 작품은 이러한 상호 침투적 관계 속에서 요동친다. 프로이트는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에서 불안에는 애매모호하고 대상이 없다고 하면서, 불안이 대상을 찾아내면 두려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신경증적 불안은 알려지지 않은 위험에 대한 것이다. 불안은 한편으로는 트라우마에 대한 예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완화된 형태로 이루어지는 그 트라우마의 반복이다.’(프로이트) 

  

출전; 영천미술창작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