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적인 것도 예술적인 것도 아닌 자연적 예술


이선영(미술평론가)



신나운의 전시 ‘무너지고 다시 피어나는 곳’은 설치 작품이지만 일관된 분위기를 연출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형태들이 실험적으로 나열된 듯한 모습이다. 전시부제는 그동안 해왔던 여러 시도의 한 단락을 종합하고 새로운 출발을 예기한다. 작품으로 완성되지 못했던 단편들을 모아 또 다른 작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단편들의 연결은 무너짐과 피어남의 경계처럼 모호하고 느슨하다. 과거의 냅킨 작업에 시멘트가 더해져 ‘미래의 화석’이 되기도 한다. 전시장 안팎을 모두 활용하여 바닥에 세우거나 천정에 매달린 것들, 걸레처럼 더럽혀져 있거나 황금빛으로 귀하게 보이는 것 모두 한 장의 냅킨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냅킨은 다양한 양태를 이어주는 기본 요소이며, 최소 5년 동안의 작업들은 그 소재로 할 수 있는 물성 실험의 총목록에 해당 된다. 한번 쓰고 버리는 대량생산/소모품인 냅킨은 예술작품의 재료로서는 가성비가 높고 무표백이어서 그 원료인 나무같이 자연스럽다. 




작가는 ‘손바닥보다 조금 크고 종이보다 얇고 부드러운’ 냅킨이 물과 풀을 만나 굳어지면서 힘이 생기고 확장 가능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모든 작품들은 ‘응집과 군집을 통해 무한히 증식하고 확장한다’ 그것은 나무처럼 자랄 수 있지만, 나무와 같은 수직의 모델이 아닌 횡적인 방식이다. 통상적인 조각작품과 달리 매달리거나 바닥에 깔린다. 서 있는 경우에도 고정이 아닌 과정의 은유이다. 야외의 풀밭에 세워진 작품은 ‘다시 피어나는...’ 의미를 가진다. 실내 바닥에 세워진 작품은 그 반대로 지면 아래로 사라지려 한다. 지상 모든것의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돌아감 때문에 생겨남도 가능하다. 서 있는 작품들은 자라나든 소멸하든 무정형성을 내재한다. 수직의 모델은 계통수처럼 질서정연하지만, 횡적인 증식은 리좀처럼 종횡무진이다. 작가에 의하면 조각의 기본 재료인 점토나 석고는 한번 마르면 덧붙일 수 없지만, 종이는 계속 덧붙일 수 있는 장점이 있어 변형과 증식에 용이하다. 


입체와 평면을 왕복하면서 만들어지는 작품은 계획은 최소화하고 그때의 상황과 대화하면서 스스로 생장한다. ‘아이디어만 가지고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작품을 만들다보니 ‘스스로 자라나는 생태계’ 같다. 종이라고 해서 가볍다거나 물렁거리지도 않는다. 변화는 성장도 쇠퇴도 모두 포함한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무너지고...’라는 부제처럼 변화에 있어서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다시 피어나는...’을 통해 자연처럼 순환하는 주기를 말한다. 인공물이면서도 자연적 특성을 간직한 냅킨은 그것이 변화할 수 있는 최대치의 가능성을 찍고, 이제 종이와는 이물적인 재료들과의 결합을 통해 또 다른 변화를 타진한다. 이 전시에서 냅킨과 결합된 페인트, 시멘트, 금박 등은 종이와는 상극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부드러움을 강함으로 보충한다. 또는 침범한다. 금박의 경우에는 싸구려 상품인 냅킨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풍자적 의도를 가진다. 




또 하나의 키워드는 ‘...곳’ 인데, 그것은 그동안 어떤 세계를 구축하는데 몰두해 왔던 방식이 ‘무너지고’ 그 잔해가 남아있는 사건 현장으로부터 ‘다시 피어나는..’ 것이다. 이 전시의 작가노트에서 ‘그동안 열심히 만들어 온 냅킨 유니버스가 무너진다’고 말한다. 냅킨이라는 일상적이면서도 부드럽고 유연한 재료를 발견한 후 수년간 지속하면서 연작처럼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형태와 텍스처, 점 선 면, 평면과 입체, 크고 작음, 가벼움과 무거움을 왔다갔다 하면서 수많은 작품이 나왔다’고 말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세계는 또 다른 변화의 국면에서 장이나 상황으로 해체/재구축되는 것이다. ‘내가 지어놓은 냅킨 유니버스 안에서 자연의 풍화작용처럼’ 일어난다. ‘세계’는 상징적 중심이 있으며. 형식 또한 중심과 주변 간의 유기적 질서를 전제한다. 상징적 우주의 중심은 그자체가 진리의 장소로 간주된다. 


하지만 예술에서 의미는 종교나 신화, 또는 이데올로기처럼 선험적으로 가정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행착오와 탐색을 통해 찾아진다. 그것은 프루스트의 소설 제목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여정이다. 사건에서는 공간보다는 시간의 범주가 주도적이다. 미궁으로 나타나는 사건의 전모가 파악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시간이다. 세계가 아닌 곳에서 의미는 상징이라기보다는 알레고리를 거친다. 질 들뢰즈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에서 상징은 영원과 순간을 거의 세계의 중심에서 결합하지만, 알레고리는 시간의 질서에 따라 자연과 역사를 발견하며, 중심 없는 세계 안에서 자연을 역사로 만들고 역사를 자연으로 변형한다고 말한다. 상징은 공간적이고 알레고리는 시간적이다. 시간 중에서도 순간보다는 지속이다. [순간의 미학]의 저자 바슐라르는 순간의 순수성이 지속에 의해 오염되기를 원치 않았다. 이러한 가치판단은 모더니즘의 기조에 깔려있다. 




현대조각의 패러다임이 중심, 상징, 형식, 질서, 공간, 작품에서 주변, 알레고리, 장, 무질서, 시간, 연극성으로 방점이 옮아가는 과정은 미술사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잘 정리한 바 있다. 철학으로 치면 ‘주체에서 사건’, ‘재현에서 생성’(질 들뢰즈)로의 변화이다. 작가는 냅킨 한 장으로부터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물성 실험을 거쳐, 그 이후를 타진한다. 전시장 초입에 이름 없는 묘비들처럼 세워 놓은 [미래가 된 화석]은 시멘트가 결합되어 종잇장의 겹과 결이 틀처럼 연출된 단면으로 드러난다. 냅킨의 부드러움은 작가의 온갖 시도를 유연하게 받아주어 왔지만, 이동이나 보존의 문제가 있었다. 특히 장마철 한나절을 지나고 나면 곰팡이가 펴서 갈색 반점이 생긴 작품들은 ‘병든 자식’처럼 얼룩덜룩해진 모습이 안타까웠다. 종이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습기에 약해 형태가 무너지곤 했다. 한 장씩 잇거나 쌓아가며 만들어 가는 과정은 노동강도도 높고 작품 크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비전통적인 재료를 선택했을 때부터의 한계였다. 하지만 한계가 바로 특성이었기에, 오랫동안 한 재료로 작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드러움을 단단하게 하려는 조치가 비석을 닮았다는 점도 풍자적이다. 냅킨에 페인트가 ‘결합된’ [검은 폭포]는 높은 천고를 활용하여 중력에 순응하는 자연스러운 형태로 내려뜨렸다. ‘검은...’은 모든 유기체의 쓰러짐, 즉 죽음을 연상시킨다. 가령 석탄이나 석유같은 물질의 원재료는 한때 지상에서 뿌리내리고 이동했던 사체였다. 물론 이 검은 물질들은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변환되었다. 조각은 지상에 뿌리박은 단단한 기념비적 존재라는 기본 패러다임이 있었는데, 이 작품은 속은 텅 비어있는 표면으로만 이루어진 ‘조각’이다. 관객 앞에 서 있기는 한데 알맹이는 빠지고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하다. 이 괴이한 존재는 그 앞의 인간에게 수수께끼를 던진다. 거듭해서 해석되어야 할 알레고리가 된다. 하지만 알맹이를 빼고 나니 표면은 더 유연하게 변할 수 있다. 




이 작품을 바닥에 펼치면 거대한 사각형 평면이다. 그 또한 사각형 냅킨이 이어진 결과다. 작가는 실제로도 상상으로도 수없이 접고 펼친다. 응축시키고 확장시킨다. 이러한 변화에도 ‘여전히 층과 결, 구멍과 주름을 지니고 있고 이것이 생명력의 표현이라고 믿는다.’ 종이에 그려진 형태나 칠해진 색이기 보다는 얼룩덜룩한 페인트 자국같은 모습 또한 반기념비적이다. 그것은 여러 단계와 과정을 거쳐서 본래의 일회용품(한장의 냅킨)이 가졌던 속성으로 되돌아가는 듯하다. 본래 냅킨의 기능은 오염물을 닦고 스스로 오염되어 버려지는 것이다. [검은 폭포]는 입체로 연출되었지만, 평면이고 언제든 그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잠재성이 있다. 냅킨들이 증식된 [검은 폭포]는 페인트가 가세하여 전모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 수수께끼같은 표면이 된다. 무너짐에 비해 쏟아짐 보다 적극적인 양태이다. 마치 드리워진 천처럼 보이는 그것은 또한 들뢰즈가 [주름]에서 예를 든 바로크적인 주름을 떠올린다. 


들뢰즈가 펼치는 철학적 담론에서 주름의 모델은 자연에 있다. 동물의 배(胚)와 식물의 씨앗에는 주름이 내재해 있고, 동굴부터 산맥까지 주름의 운동이 아닌 것이 없다. [주름]에 의하면 씨들은 마치 러시아 인형처럼 무한히 하나가 다른 하나에 감싸여 있다. 가령 최초의 파리는 이후 등장할 모든 파리들을 포함하여 이 모든 파리들은 때가 되면 자신의 차례에 자신의 고유한 부분들을 펼치도록 호출된다. 그리고 하나의 유기체가 죽었을 때 이 유기체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말아 넣어지고 다시 잠들어 있는 배 안으로 단계를 건너뛰면서 갑자기 되접히게 된다. 변화를 중시하는 신나운의 작품에는 이러한 유기체적 주름이 내재한다. 작업 자체가 냅킨을 접고 연결하여 주름을 늘려가는 과정이다. 특히 작가는 20대에 강원도 동굴에서의 탐사 체험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데, 역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지질학적 시간대에서 지금도 계속 변화하는 살아있는 지형에서 받은 충격은 지난 몇 년 간의 작품에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석회동굴인 고수동굴에서 ‘석순과 석주의 모양은 조각품 같았고, 높고 낮아졌다 펼쳐지고 좁아지는 공간과 건축이 있었으며’...‘누가 만든 것이 아닌, 지하수와 돌과 시간이 만나 자연 생성된 것이라는 사실에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때때로 나도 냅킨, 풀, 물과 행동과 시간이 만나 천천히 작품을 만드는 것이 동굴의 형성 과정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적인 유사가 아니라 증식과 변환이라는 내적인 공통점이다. 작가는 냅킨을 붙여서 확장하고 상상과 실제로 접기를 계속한다. [주름]에 의하면 접지술, 즉 종이 접는 기술은 물질의 과학을 위한 모델이다. 물질과 생명, 유기체 간의 친화성이다. 냅킨 한장은 세포처럼 자라는 것이다. 조형예술이기에 점, 선, 면이라는 기본 문법을 따른다. 반복과 차이의 방법론은 최초의 물리적 취약함을 극복해 나간다. 재료만 같고 질감, 형태, 색채의 변주가 가능하다. 변화, 변환, 변형은 신나운의 작품 원리이다. 


움직이지 않는 형태에서도 변화는 잠재되어 있다. 물론 성장은 물론 퇴화도 포함되어 있다. 변화란 시간이라는 축을 타고 진행되며 이는 이야기를 내포한다. 작품 제목은 작업 과정만큼이나 밀도 있게 응축된 작품의 서사를 풀어나가는데 방향타가 되어 준다. [검은 폭포]는 ‘검은...’이라는 멜랑콜리한 색과 아래로 쳐지는 형태로 이미 많은 것을 내포한다. 그것은 이상적인 조각이 형태를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밝고 매끄러운 소재라는 점과 반대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비유에 의하면, 텅 빈 표면은 기둥이라는 이전 시대의 합리적이고 휴머니즘적인 모델을 대체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현대조각사의 흐름]에 의하면 고전주의적 관례 또는 합리적 모델은 내적 구조를 표면과 연결시키는 분석적 인지 방법이다. 가령 구축주의적 관계는 주관적인 의식구조와 객관적인 현실 구조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이러한 동일성은 경험 이전에 주어진 것이라 가정된다. 




하지만 현대조각은 내부의 원인이 외부로 나타난 결과가 곧 형태의 표면이라는 고전적 원칙을 거부한다. 현대조각은 표면이 불투명하다. 로댕의 조각이 현대적인 것이 그가 표면과 그 해부학적 깊이 간의 소통 관계를 단절시켰기 때문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에 의하면 로댕의 작품에서는 그 의미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기호를 창출할 수 있는 형태들 간의 상호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요컨대 자기지시적(self-referential) 기호가 창조된다. 초현실주의의 발견된 오브제도 그 예가 된다. 오브제는 ‘작품’과 달리 의미의 중심이 없다. 작품이 의식이라면 오브제는 무의식이다. 예술과 다른 사물은 의미가 없다기보다는 확장을 위해 초현실주의를 비롯한 현대예술가들에 의해 선택됐다. 작가가 대량 구매한 냅킨은 예술작품으로 승화되기보다는 무심한 사물처럼 자연처럼 그렇게 변모한다. 냅킨 한장 한장은 일종의 유닛이 되어 증식될 수 있다. 


이것은 일정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다. 작가는 냅킨을 유닛으로 해서 점, 선, 면이라는 조형 언어의 기본 문법을 실험해 왔다. 표면은 접혀지고 주름잡히면서 유클리트적 기하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차원적 위상학으로 도약한다. 전시장 입구에 도열하여 관객을 맞이해 주는 [미래가 된 화석]은 이전의 냅킨이 현재의 시멘트를 만나서 미래의 화석이 된다. 기존작품에 결핍되어 있었던 견고함은 부여받았지만, 무덤처럼 봉인된 것 같다. 작가는 앞으로 도예의 기법 등을 적용시켜 봉인이 아닌 환생에 의미를 부여할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부드러움을 포함한 견고함이다. 해체주의처럼 ‘말소하에’ 있을 뿐,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화물 벨트에 매달린 [되지 못한 것들]은 동질이상의 단편적 조각들이다. 적극적으로 구성하기 보다는 느슨하게 모아놓았다. 잠재성이 있었지만 현실화 되지 못했던 것들이 풀, 바니쉬 등의 처리를 통해 패자부활전으로 환생한다. 





금박으로 처리한 [금꽃]에서 금은 실제적 재료임과 동시에 일상어에서 흔히 쓰이는 접두어이기도하다. 가령 요즘처럼 배춧값이 비쌀 때는 금배추가 된다. 싸구려 물건에 금색 도장이나 포장재가 많이 쓰이곤 한다. 전시장 안과 밖에 각기 자리하는 [소멸하는 덩어리]와 [자라나는 덩어리]는 하나는 페인트가, 다른 하나는 풀이 가세함으로서 각기 다른 방향을 가게 됐다. [자라나는 덩어리]는 전시장 밖 풀밭에 설치해서 자연의 편에 놓았다. 자연은 소멸이 있어야 생성도 있음을, 그리고 그 역의 진리도 오래전부터 알려주었다. 신나운은 자연적이지도 예술적이지도 않은 재료를 주로 사용해 왔지만, 작업의 발상은 자연으로부터 왔다. 재현적이지 않은 작품들에서 자연은 ‘식물이 자라나는 방식(덩굴 식물), 나뭇잎의 잎맥, 나뭇가지와 뿌리 그리고 껍질, 500년 된 고목이 주는 에너지, 부숴진 조개 껍질, 몽돌 해변, 파도와 부표, 모래사장을 밟는 느낌, 낙엽을 밟는 느낌, 여름날의 매미 소리, 비오는 날의 냄새.. 등이 포함’된다. 

 

출전; 충남창작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