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중/ 무차별의 세계, 그러므로 어쩌면 사해동포주의
고충환 | 미술평론가
드로잉으로부터. 여기에 드로잉이 있다. 드로잉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회화의 격을 갖춘 드로잉 회화다. 작가는 미발표 작이고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따로 발표도 하고 싶다고 했다. 드로잉이 회화의 한 형식으로서 인정받고 전시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조만간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드로잉의 미덕은 회화의 격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회화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발상이며 생각이며 착상이 어떠한 매개도 없이 원형 그대로 현실화할 수 있다. 처음 이미지, 생생한 이미지, 날 것의 이미지라고 해야 할까. 그중에는 더러 이미 회화로 옮겨간 경우도 있겠고, 부분 이미지가 회화를 위해 소용된 경우도 있겠다. 그런 만큼 작가의 처음 발상이며 생각이며 착상이 움튼 원형적 이미지라고 해도 좋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 그러므로 어쩌면 의식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몸이 기억하고 있는 기억 그러므로 몸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며 원형적 이미지라고 불렀다. 그 상징, 그 이미지가 집단적인 것은 비록 개인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할 만한 상징이고 이미지라는 말이다. 최소한 작가의 그림이 유래한 원형적 이미지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지들의 이미지, 씨앗 이미지, 그러므로 이미지가 유래한 이미지들의 보고라고 해도 좋다.
그 상징, 그 이미지가 욕망적이다. 몸적이다. 무의식적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욕망의 동물이라고 했다. 욕망이 인간을 인간이 게 해주는, 인간의 조건이다. 그리고 불교는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욕망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한쪽에선 욕망이 인간의 조건이라 하고, 다른 편에선 욕망을 해탈(고통으로부터의 탈주)의 대상이라고 한다. 여기에 이율배반이 있고, 자기모순이 있다. 이율배반과 자기모순은 말하자면 삶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이율배반과 자기모순을 자기의 한 본성으로서 인정하는 것, 그 본성과 더불어 사는 것, 그렇게 타고난 본성(그러므로 어쩌면 참 자기)을 실현하는 것이 삶에 주어진 과제다.
프로이트는 그 욕망이 실현되는 극장을 꿈이라고 봤고, 자크 라캉은 상상계라고 했다(그리고 작가는 자유라고 했다. 일종의 자유계라고 해야 할까).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우회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장이다. 현실에서 억압(그러므로 왜곡)된 것인 만큼 욕망의 현실원칙은 현실과는 다르다. 욕망에서 현실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욕망 자신의, 그러므로 어쩌면 자기_타자의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탈주선을 따라 마구 이접되고, 재편되고, 재설정되고, 재관계된다. 그 욕망의 속성이며 작동원리를 거머쥔 것이 초현실주의고, 이로부터 발전시킨 것이 의식의 흐름기법이며, 자동기술법이며, 자유연상기법이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이 기법들이 미증유의 현대미술을 열어젖힌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전혀 예기치 못한 관계와 접속으로 새로운 비전을 열어놓는, 브리콜라주와 브리콜레르를 선취한 부분이 있다.
그렇게 작가의 드로잉에서는, 어쩌면 작가의 그림을 관통하고 있는 원형적 이미지에서는 욕망의, 욕망 에너지(욕망 자체가 이미 에너지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분출이, 항상적으로 이행하는 욕망,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자기실현이 또 다른 비전의 세계를 예비하고 있었다.
벽화로부터. 처음에 작가는 여느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전통적인 수묵을 현대적인 감성에 맞게 각색하고 재해석한 수묵 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대만 유학을 계기로 전통적인 벽화에 눈을 떴다. 전통적인 수묵을 각색하고 재해석한 것처럼, 전통적인 벽화를 자기만의 형식으로 각색하고 재해석했다. 현재를 만든 과거를 현재 위로 소환하는 일, 그러므로 어느 정도 자기가 유래한 원형적 이미지를 되불러오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작가는 색면구성 위에 기호와 상징이 부유하는, 도상학이 강한 작업에 매진했다. 과거로부터 유래한 도상들이, 때로 무의식으로부터 길어 올린 원형질이, 동시대적인 기호와 어우러진 그림이었다.
그리고 점차 벽화에 그려진 그림보다는 벽화 자체에 끌렸다. 벽화 자체는 사람이 그렸지만, 벽화가 벽화로서 세간에 알려질 즈음에는 시간이 그린 그림이 여기에 보태져서 독특한 아우라를 발산했고, 작가는 그 아우라에 마음이 동했다. 그림이 부분적으로 떨어져 나가 박락된 질감에, 색이 바래고 희미해진 흔적에, 알 수 없는 자국이 불러일으키는 암시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기호가, 도상적 이미지가 희미해졌고, 다만 희미한 흔적과 알 수 없는 자국과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스크래치가 오롯해졌다. 형상과 서사가 지워진 자리에 어쩌면 형상과 서사의 바탕이 되는, 그러므로 형상과 서사를 밀어 올렸을 원형적인 이미지의 질감과 색감이 강조되는, 암시적인 분위기가 강한 그림이었다.
그렇게 그림이 희미해지다가 종래에는 단색에 가닿았다. 희미해진 그림이 벽화에 그려진 그림보다는 벽화 자체의 질감과 색감을, 흔적과 자국을 향한 관심을 반영했고, 그 관심이 재차 벽화에 그려진 존재의 유래에 종착했다. 존재는 어디서 어떻게 유래하는가. 존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땅이다. 대지다. 존재는 땅에서 왔고, 땅으로 되돌려진다. 그렇게 생과 사가 밑도 끝도 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존재의 존재성(어쩌면 그 자체 존재의 항상적인 운동성)을 땅이 품고 대지가 내뱉는다. 그렇게 찾아낸 것이 귀장사상이다. 원래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고, 존재가 유래한 땅으로 되돌려지는 것이다. 혹 잃었다면 이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면 이를 새삼 되새기는 일이다. 자연과 자연이란 개념은 다른 만큼 자연이란 개념과 결별하는 일이고, 이로써 자연 자체와 대면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가 그린 단색화를 보면, 두 가지 다른 버전의 작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안료를 섞은 돌가루를 수차례 덧발라 요철을 만들고, 그 위에 다른 색의 안료를 층층이 쌓아 올려 레이어를 만든다. 레이어를 만드는 와중에 색면을 갈아 순하게 만드는(숙성된 색을 얻는), 그리고 그렇게 색을 올리고 벗겨내는 반복과정을 통해 원하는 질감과 색감을 얻는다. 벽화의 벽면에서와 같은, 대지의 그것과도 같은 질감을 얻고 색감을 얻는다. 존재가 유래한 대지의 질감을, 존재를 표상하는 벽화의 색감을 재현해놓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또 다른 한 버전으로, 캔버스에 석고붕대를 반복적으로 집적해 바탕재를 만든 다음, 그 위에 똑같은 작업 과정을 거쳐 완성한 그림이 있다. 여기서 반복적으로 집적된 석고붕대는 미처 발화하지 못한 이야기들, 혀끝에 맴도는 말들을 상징한다. 형상이 발화된 이야기를, 석고붕대가 만든 비정형의 흔적과 얼룩과 자국이 미처 발화하지 못한 이야기를 상징하는 만큼 이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고 있는 작업이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바로, 나란 존재의 실존이 펼쳐지는 장이다.
꽃으로부터. 그리고 작가는 꽃을 그린다. 전통적인 수묵을 각색하고 재해석한 것처럼, 전통적인 벽화를 동시대적 감각에 맞게 현대화한 것처럼, 이번에는 전통적인 민화를, 모란도를, 화조화를 매개로 자기만의 형식화를 시도한다.
주지하다시피 모란은 전통적으로 부귀와 영화를 상징한다. 여기서 작가는 평소 자신(만)의 관념을 피력한다. 선과 악을 구분하고, 그 근거 위에 선한 것을 취하고 악한 것을 배척하는 이분법을 문제시한 것이다. 선도 존재의 한 본성이고, 악도 존재의 한 부분이라는 무차별의 세계관 그러므로 어쩌면 사해동포주의를 제안한다. 그렇게 사해동포주의를 반영한 작가의 모란도는 전통적인 도상학에서와 같은 부귀와 영화의 상징성과 함께, 동시대적 삶의 현장에서 유래한 각종 아이콘과 기호들, 문자와 문구, 대중적인 캐릭터와 만화에서의 말풍선마저 한자리에 소환한다. 그렇게 상호 이질적인 사물들이 어떤 구별도 없이 접속하고 관계 맺는, 어쩌면 그 자체 작가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의 한 경우를 예시하고 있을지도 모를 무차별의 세계관을 실현하고, 이로써 코리안 팝이라고 불러도 좋을 어떤 지경을 열어놓는다.
특이한 것은 모란 그러므로 꽃을 소재로 한 일련의 그림들을 각 <꽃 이후>와 <꽃 이전>으로 구분해놓고 있는 점이다. 형식적으로 <꽃 이후>는 모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으로, 개념으로 알고 있는 모란, 개념 이후의 꽃을 그린 것이다. 부귀와 영화의 상징에서처럼 인간의 개념으로 결정화된 모란을 그리고, 박제화된 꽃 그러므로 어쩌면 꽃이라는 관념을 그린 것이다.
반면, 형식적으로 <꽃 이전>은 모란이라는 특정 소재가 무색할 만큼 모란이 해체된, 사실은 모란이라는 개념이 해체된 추상표현주의 그림으로, 개념 이전의 모란을 그리고 꽃을 그린 것이다. 모란이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재정의하는 그림인 만큼 굳이 모란이 아니어도 상관없고 꽃이 아니어도 무방한 그림이다. 그렇다면 개념 이전의 모란은 무엇이고 꽃은 뭔가. 모란과 꽃이라는 개념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 생명이 있었다. 바이털리즘이 있었다. 존재의 항상적인 운동성이 있었다. 자연의 원인에 해당하는 자연성이 있었다(아리스토텔레스). 그렇게 작가는 다만 우연하고 무분별한 붓질이 난무하는 추상표현주의 그림으로 존재의 생명성을, 바이털리즘을, 운동성을, 그러므로 어쩌면 자연의 본성을 그려놓고 있었다. 자연이 자연다움을 회복하고, 존재가 존재다움을 되찾는(하이데거) 무차별의 세계관을, 사해동포주의를 그려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