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수/ 사물의 운명, 죽은 나무와 터실터실한 벽 


고충환 | 미술평론가


사물이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해가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매 순간의 기억과 느낌을 이미지화한 작품을 통해 여백이 주는 여유로움을 표현하고 있다...채우지 못해 채우고 채우지 못해 비우는 나의 행위와 자취가 여백에 물들어 오래오래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작가 노트

정적인 가운데 동적인 기운을 품고 있는 정중동인가. 내적 에너지 그러므로 생명력(바이털리즘)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분출인가. 아니면, 억압된 기운 그러므로 파토스의 자기실현인가. 비정형의 얼룩을 만드는 붓질이 표현주의처럼도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형상, 알만한 형상이 없다는 점에서는 추상표현주의처럼도 보이는 그림이다. 추상인가. 의미를 배제한,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동어반복으로 지지 되는, 순수한 형식요소만으로도 이미 회화라고 보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지향하는 추상과는 그 맥이 다르고 결이 다른 그림이다. 추상과 형상(구상), 추상과 표현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그 모두를 아우르면서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일궈내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대지가 살을 찢어 원래 자기 속에 품고 있던 속살(에너지? 생명력? 아니면 상처?)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도 같고, 아마도 대지로 표상될 여백이 자기를 열어서 보여주는 것도 같은 그림이 하이데거의 대지와 세계의 변증법을 상기시킨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대지는 은폐를 본질로 하며, 세계는 비은폐를 본성으로 가진다. 진리 그러므로 예술은 은폐를 본질로 하는 것이지만, 세계를 통해 드러나지 않으면 누구도 진리를 알아볼 수는 없다. 그리고 드러난(그러므로 표현된)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다만, 한때 진리가 머물고 간 자리, 흔적, 형해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예술의 딜레마가 있다. 세계에 자기를 최소한으로만 내어주면서 대지에 자기를 보존하는 것인데, 그 방편으로 도입된 것이 암시다. 진리가 머물고 간 자리, 진리의 흔적, 진리의 형해를 통해 진리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예술은 그 자체 불완전 언어인 암시를 통해서만, 암시되는 만큼만 진리를 열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 된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것이며,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는(암시하는) 기술이 된다(폴 클레). 그러므로 은유와 유비의 기술이 된다. 작가의 그림으로 치자면 여백이 열어 보이는 속살을 통해 미증유의 어떤 의미를 암시하고 드러내는 기술이 된다. 그러므로 여백이 은폐하면서 비은폐하는, 여백이 숨기면서 드러내는 속살의 실체(그러므로 의미)를 밝히는 것이 곧 작가의 그림을 밝히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대지가 살을 찢어 자기의 속살을 열어서 보여주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림에 나타난 여백이 아마도 대지를 표상한다고도 했다. 실제로도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여백의 정원이라고 불렀다(물론 이외에도 다른 이런저런 제목들이 있지만). 여기서 여백의 정원이란 다르게 말하자면 작가의 마음 밭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적어도 작가에 관한 한 캔버스는 바로 이렇듯 마음 밭을 표상하고, 마음의 정원을 표상하고, 마음의 대지를 표상한다고 해도 좋다. 그 밭 위에, 정원 위에, 대지 위에 작가만의 심상 이미지를 소환한 그림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그 심상 이미지가 뭔지, 그 속살의 실체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볼 일이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고 원형적 이미지라고 불렀다. 여기서 집단무의식이란 반복 상징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얻는다는 말이며, 작가의 그림에서는 대지를, 여백을, 마음 밭을 찢고 그림 위로 드러나 보이는 심상 이미지, 속살의 실체가 바로 이런 반복 상징에 해당한다. 의식이 기억하는 이미지를 넘어 몸이 기억하는 이미지 그러므로 몸 기억이 밀어 올린 이미지, 다시 그러므로 원형적 이미지에 해당한다. 

이미지들의 이미지, 모든 이미지가 유래한 이미지들의 원천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게 뭔지 볼 일이다. 작가의 그림은 눈밭 위로 자기를 드러내 보이는, 눈에 덮여 보이지도 않았던, 아마도 그렇게 오랫동안 무명의 삶을 내장했을, 눈이 녹으면서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이는, 충분히 말라비틀어진, 껍질이 벗겨진, 색바랜 죽은 나무(고사목)를 보는 것 같다. 작가는 눈밭을 걸으면서 이름도 없는 고사목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고사목에서 삶과의 유비를 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유년을 보았을 것이고, 삶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죽음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죽음과 삶이 밑도 끝도 없이 반복되는 생사 순환과 같은, 존재론적 의미를 목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 작가의 그림은 나무판자로 골격을 세우고 그 위에 회 칠을 한, 부분적으로 회칠이 떨어져 나가면서 나무속이 드러나 보이는, 오랜, 낡은, 그 자체 시간의 흔적을 머금고 있는 회벽을 보는 것도 같다. 아마도 작가는 유년 시절 터실터실한 회벽(아니면 흙벽 아니면 시멘트벽)을 손으로 쓸고 지나가던 추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추억을 고온의 불을 견뎌낸(그 자체 또 다른 삶의 유비라고 해도 좋을), 단단해진, 곱게 간, 도자기 가루를 소재로 한, 터실터실한 또 다른 벽면으로 재현하고 박제화했을 것이다. 그렇게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그리움과 함께, 존재론적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벽에 난 우연한 얼룩과 크랙을 보면, 전쟁이 보이고, 홍수가 보이고, 재난이 보이고, 세상 모든 풍경이 보인다고 했다. 심지어 성당의 종소리가 들린다고도 했다.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도 하겠지만,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부르고, 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부르고, 시각적 이미지가 청각적 이미지를 부르는 공감각적 이미지를 정의해놓은 대목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런 우연한 얼룩이 불러일으키는 기억, 추억, 그리움과 관련이 깊다.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의미와 관련이 깊고, 원형적 이미지와 관련이 깊다. 

그런가 하면, 발터 벤야민은 새로운 모든 것은 빠르게 시간 속으로 흡수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전이되는 것이 사물의 운명이라고 했다. 작가의 감수성 혹은 감각 체질은 아마도 이렇듯 사물의 운명 혹은 운명적 사물에 끌리는 것 같다. 향수의 대상으로 전이된 사물에 축적된 시간의 흔적에, 그 흔적이 불러일으키는 의미에 끌리는 것 같다. 시간의 폭력에 충분히 노출된, 무명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시간이 그린 그림 그러므로 시간의 예술이라고 해도 좋을 형상의 꼴과 이미지의 태에 이끌리는 것도 같다. 비록 작가의 감수성이고 감각 체질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공유하고 공감할 만한 것이란 점에서 작가의 그림은 보편성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