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수희/ 존재가 존재다울 때, 자연이 자연다운 순간 


고충환 | 미술평론가

물살이 갈라지면서 일어서는 것 같은.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바닷가나 강기슭에 부서지는 파도 같은. 속이 비쳐 보일 듯 투명한 깊이가 느껴지는 검푸른 수면 위로 물과 빛이 희롱하면서 아롱거리는 물비늘 같은. 멀리 하늘이 보이는 들판 같은. 들판 뒤편으로 해가 떠오르거나 지는 것 같은. 파르스름한 대기 속에 습윤한 기운을 머금고 있는 산 같은. 희미해진 빛의 기미와 안개가 다투기라도 하듯 가장자리가 희뿌옇게 지워진 산세 같은. 빛의 기운과 어둠의 세력이 다투는 폭풍전야 속 대기 같은. 칼처럼 날이 선 산허리 같은. 멀리 첩첩한 산맥 같은. 우묵한 숲속 같은. 고즈넉한 섬 같은. 잔설이 있는 풍경 같은. 불어오는 바람에 반응이라도 하듯 파르르 잎을 떠는 수목 같은. 


이것들은 다 뭔가. 풍경인가. 풍경처럼 보이지만, 어떤 풍경을 특정하지도 한정하지도 않는다. 하나의 풍경에 다른 풍경이 어른거리고, 스며있고, 포개져 있어서 다름 아닌 바로 그 풍경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풍경이다. 중의적인 풍경이고, 열린 풍경이고, 암시적인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풍경을 특정할 수 없는 만큼 다른 무엇으로 보아도 무방한 풍경이며, 볼 때마다 약간씩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항상적으로 변화하는, 이행하는, 운동하는 자연의 성질 그러므로 움직이는 자연에 부합하거나 이러한 사실 혹은 현상을 새삼 일깨우는 풍경이다.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심안 그러므로 마음의 눈으로 본 풍경, 다시 그러므로 심의적인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심지어 작가는 자연을 보고 그리지도, 사진을 참조해 그리지도 않는다. 자연은 작가의 마음속에 있다. 오직 마음속에, 기억 속에 정서적 질감으로 아로새겨진 자연의 성정을 좇아 그린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마음의 동요를, 격동을, 파토스를, 생리와 생명현상을, 바이오리듬과 바이털리즘을 자연에 빗대어 그린다고 해야 할까. 먹구름이 몰려올 때 내 마음에도 폭풍이 일고, 안개가 대기를 희뿌옇게 감쌀 때 내 마음 또한 갈피를 잃는, 그런, 그림의 모티브가 되는 자연과 세계와 사물 대상과 자기가 연동된, 자기 동일시 현상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자연과 내가 혼연일체가 된 자연을 그리고, 풍경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비록 그림은 자연을 소재로 한 풍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가 투사된 풍경을 그린 것이고, 다시 그러므로 어느 정도 자화상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엄밀하게 말해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며, 오로지 작가의 마음이 불러일으킨 풍경 그러므로 마음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자연에서 내 쪽으로 건너오는 무엇이 있고, 나에게서 자연으로 건너가는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건너가고 건너오면서 무언가가 교환되는 과정에 교감이 생기고 공감이 인다. 그 교감이, 공감이, 말하자면 자연과의 상호작용성이 풍경을 연다. 풍경은 말하자면 자연에 자기(주체)가 개입되고 매개된 결과이며, 인문학적 소산이다. 해석된 자연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작가가 자연에 어떻게 매개되고 있는지, 작가가 자연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볼 일이며, 이로써 어떤 풍경(비전)을 열어놓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리고 그 자체 작가의 그림을 해석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해 작가의 말을 옮기자면, 작가는 자연의 사실적 재현이 아닌, 본인의 정서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연을 그린다고 했다. 자연을 초월하면서, 동시에 자연을 벗어나지는 않는 그림을 그린다고도 했다. 자연을 닮았지만, 자연에 한정되지는 않는, 자연에 투사된 자기를 그리고, 자연과 자기와의 상호작용성을 그린다는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자연을 빌미로 사실은 자기를 그린다고 해도 좋다. 메를로 퐁티는 주체와 세계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주체와 객체로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다. 그렇게 작가는 어쩌면 이미 자연의 자장 속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그리고,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존재를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그림은 암시적이다. 사물 대상의 실체가 손에 잡히는 재현적인 방법과 비교해볼 때 그 형태며 의미가 열려있다. 비결정적이라고 해야 할까. 분위기가 강한 편이며, 분위기가 사물 대상을 밀어 올려 그 실체를 암시하는 편이다. 재현적(세부에 주목하게 만드는)이기보다는 총체적(혹은 종합적)이라고 해야 할까. 예술은 암시의 기술이다.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고, 그려진 것을 통해 미처 그려지지 않은 것, 때로 그릴 수조차 없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무엇을 암시하는지 볼 일이다. 작가는 장지에, 그리고 때로 캔버스에 겔스톤을 발라 올려 바탕을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묽은 안료를 수차례 덧칠해 원하는 형태와 질감을 얻는데, 사물 대상을 결정화하기보다는 우연적이고 감각적이고 암시적이다. 바탕재에 안료가 덧칠되면서 돌가루의 알갱이가 올올이 도드라져 보이고, 알갱이 사이사이로 안료가 스며들면서 특유의 질감과 색감을 얻는다. 안료를 덧칠해 투명한 깊이가 느껴지는, 마치 스며들 듯 부드러운 색감을 얻는데, 바탕의 질박한 질감과 상충할 것 같은데도, 서로 어우러져서 유기적인 전체를 이룬다. 때로 화면 위로 흘러내리다 맺힌 안료가 비정형의 얼룩과 자국을 만드는데, 우연성마저 적극적인 조형 요소 혹은 조형 원리로 끌어들이는, 평소 작가의 감각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렇게 사물 대상이 경계를 허물어 스미는, 습윤한, 부드러운, 투명한 깊이가 느껴지는, 암시적인 분위기가 강한, 감각적이고 서정적으로 와닿는 그림을 만든다. 

암시적인 분위기가 결정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분위기란 말이 미학적 의의를 획득하게 된 것은 발터 벤야민에 의해서이다. 벤야민은 분위기 그러므로 아우라가 원래 먼 것인데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했다. 비현실적인 것, 초현실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 관념적인 것, 그리고 비가시적인 것을 현재 위로 소환하는 감성의 질감 혹은 감각경험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표면상 자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에 대해 이런 암시적인 분위기는 어떻게 적용되고 해석될 수 있는가. 도대체 작가는 자연을 빌려 자연의 비가시적인 무엇 혹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과 자연성을 구분했다. 감각적 실재로서의 자연과 그 자연을 낳은 원인에 해당하는 자연성을 구분했다. 그게 뭔가. 생명이며, 생태다. 에너지며, 운동성이다. 우리 식 버전으로 치자면 기(기운)다. 자연을 포함한 혹은 대상으로 한 존재 간 상호작용성으로 치자면 바이오리듬과 바이털리즘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기에 하이데거는 존재의 존재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연에 적용해보면 자연의 자연다움이 되겠다. 

그렇게 작가는 자연의 외형을 빌려 이처럼 자연이 품고 있는 그러므로 자연을 품고 있는 생명을, 생태를, 에너지를, 기운의 운동성을 그려놓고 있었다. 사물 대상이 경계를 허무는, 형식적으로는 재현과 표현, 추상과 구상, 형상과 추상의 경계를 허물면서 아우르는, 자연이 (가장) 자연다운 순간을 그려놓고 있었다. 자연의 운동성을, 자연의 항상성을 그려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