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중 작가


故이희중(1956-2019)은 한국의 옛 그림 전통을 현대화하는데 평생을 바친 작가다. ‘현대화’란 무엇인가? 조상의 혼이 담긴 그림을 오늘의 관점에서 되살려 전통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일이다. 1975년, 홍대 회화과(서양화 전공)에 입학하면서 시작한 50여 년에 걸친 회화적 도정(道程)은 단 하나의 초점으로 응축되었다. 물밀듯 밀려오는 서양 미술 조류에 맞서 과연 어떻게 하면 이에 대응해 ‘우리 고유의 그림’을 창출하느냐 하는 정체성의 문제였다. 

1980년대 중반, 이희중은 중요한 결심을 한다. 서양 미술 본고장인 유럽으로 가자. 가서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워 익힐 것은 익히면서 새로운 나의 길을 찾자. 이희중이 선택한 미술학교는 독일 뒤셀도르프에 있는 쿤스트아카데미였다. 그는 거기서 많은 회화적 실험을 했다. 인상적인 것은 독일에 있으면서도 고국에 돌아올 때마다 순지, 닥지, 화선지, 장지와 같은 각종 한지를 한 아름 사간 일이다. 비록 서양화를 전공하지만, 전통 한지에 대한 관심을 모필을 통한 선염법(渲染法)과 일필휘지에서 오는 붓의 맛을 실험하는데 기울였다. 그것은 훗날 그의 <우주도> 연작을 비롯한 많은 그림에 녹아들어 진가를 발휘했다. 이희중은 지병인 간암으로 떠났는데, 부인 권정옥 이희중갤러리 대표의 전언에 따르면 죽기 40일 전까지도 “그림을 그려야한다”며 하루 4시간은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희중, <푸른 우주>, 2011, 캔버스에 유채, 70×200cm


대학 시절 이희중은 파울 클레(Paul KLEE)와 루오(Geoges ROUAULT)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점, 선, 면과 두꺼운 검정색 선은 그들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이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희중이 창출한 그만의 독자적인 화풍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축이 바로 ‘전통’이다. 이희중은 고지도를 비롯하여 민화, 불화, 탱화 등을 섭렵하는 한편,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소정 변관식에 이르는 전통과 근대의 폭넓은 그림에 천착해 자신의 회화적 뼈와 살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희중이 택한 방법은 한국화가 아니라 정통 서양화인 유화였다. 빨리 마르는 아크릴 물감과는 달리 유채는 건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그만큼 깊이감이 있고 표면에 기름기가 도는 것이 특징이다. 이희중은 대학 시절에도 섬세한 묘사보다 끝이 뭉툭한 붓을 써 사의(寫意)의 전달에 치중했다. 많이 그려 닳은 붓끝이 그의 화풍에 영향을 끼친 것 또한 사실이다. 서양에 기원을 둔 유채를 사용하여 한국적인 정서를 담는다는 일이 과연 가능한가? 이희중의 삶과 예술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응답의 한 형태이다. 그리고 성공했다. 

예술에 바친 그의 삶은 큰 강(大河)과도 같다. 작은 옹달샘에서 시작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내(川)가 되고 강이 되어 마침내 세계 미술계라는 바다에 이르는 기나긴 땀과 열정의 도정.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이제 남은 자들이 할 일은 바다로 이르는 높은 진입 장벽을 허물고 이희중 예술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는 일만 남았다.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이희중 그림은 미적 진실만을 말한다. 그는 팔기 위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간혹 아트페어에 출품했지만, 작업실에서 흰 캔버스와 대면하길 즐겼다. 800여 점에 이르는 유작은 내면과 치열하게 싸운 결과물이다. 독일 유학은 재료학에 눈뜨는 계기였다. 학부 시절부터 색에 민감하여 가령 청색은 르프랑(Lefranc Bourgeois)이 제일 좋다며 르프랑 브랜드만 고집했다. 그린 지 오래 됐지만, 이희중의 그림이 갓 그려진듯 신선하게 빛나는 이유는 그의 그림이 좋은 물감의 조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10.10-10.18) 출품작에서 트거나 갈라짐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작품에 기울인 그의 정성과 재료에 대한 공부와 실험에 기인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언젠가 직접 확인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