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작품이 판매되지 않는 것보다 작업이 발전되지 않는 두려움이 더 크다고 느끼며 작업해왔다. 그래서 아기가 100일이 되었을 때, 아기와 함께 작업실에 나가 무언가를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하곤 했다. 예술가의 창의력이란 삶의 장애물을 극복함으로써 힘을 얻기도 하지만 그게 과연 쉬운 일일까. 지금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한 세기 전, 여성 예술가에게는 얼마나 더 혹독했을까. 나혜석은 ‘최초’라는 수식이 많이 붙는, 당시 이슈 메이커였다. 「이혼고백장」을 발표하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스캔들의 중심에 있던 문학가이자 독립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화가로서의 삶’이 무엇보다 궁금했다.


나혜석 창작의 과정 - 유적지 답사, 2024 ⓒ 제공 오미진 


나혜석의 탐구 대상은 본업인 예술만큼이나 정체성인 ‘여성 그 자체’였는데, 어쩌다 세상의 뭇매를 맞으며 행려병자로 사라져간 것일까. 나혜석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 쉽지 않았던 차에 좋은 기회로 나혜석 학회장, 자하미술관장, 전시 사전연구 기획자, 여러 작가와 함께 나혜석 답사를 시작했다. 2박 3일 동안 우리는 고흥(소록도, 거금도)-사천(다솔사)-합천(해인사, 홍류동 계곡)-예산(수덕사, 수덕여관)을 다니며 깊은 밤이 될 때까지 나혜석을 이야기하고, 작가를 선입견 없이 그 자체로 보려고 노력했다. 우린 나혜석의 첫사랑, 최승구의 묘비를 찾아다니고(100년 된 초등학교 뒷산 너머의 어디쯤), 흑백 사진 속 장소(해인사 계단, 홍제암 입구에 세워진 부도 앞)와 그림을 그렸던 자리(농산정, 낙화암, 홍류동 계곡)를 찾아다녔다. 안타까운 것은 흑백 도판으로만 남은 작품을 포함해 현재 전해지는 작품의 수가 너무 적은데 그조차 진품여부가 정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의 발자취를 따라간 이번 여정을 통해서 평생 자신의 예술혼을 표현하려 했던 의식 있는 화가가 바로 그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실패한 삶이라며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지만, 그것은 좁은 가치에서 바라본 시선이라 생각한다. 일본 유학이라는 근대 교육의 혜택을 받았지만, 조선 여성을 위해 야학을 설립했고, 3.1운동 시위자로 5개월간 수감되기도 했다. 독립 운동가들을 지원했으며, 이혼 후 어려운 시기에 일본의 꼬드김에도 넘어가지 않고 가난해도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일궈가던 신여성이었다. 끝까지 자신의 지조를 지키며, 그리는 여자, 글 쓰는 여자, 말하는 여자, 행동하는 여자로서 자신의 삶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가 이혼 후 화가로서의 자기 자신을 더욱 더 확고히 함으로써 많은 각오를 다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가 그의 행보를 비난하고 힐난했을지언정 자기 자신만은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했고, 어느 것에도 의지하지 않으려는 그 충실함과 정직함은 스스로를 점점 더 빛나게 했을 것이라고. 나혜석은 죽기 직전까지도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 화려함과 동시에 비극을 말하고, 밝은 것과 어두움을, 삶과 죽음을, 여성의 힘과 사회적 가치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다 타버린 잿더미 속을 유영하는 상상일 뿐 어디에도 그의 마지막 글이 존재하지 않음이 너무 아쉽다.

나혜석을 공부하며 <장미의 땅: 쿠르드의 여전사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죽음의 목전에서 전투를 하며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이 나오는데, 그 여성들은 엄청난 것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자유,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자신의 소망은 곧 자유로운 시대, 자유로운 삶, 자유로운 예술을 이뤄내는 것이라는 강한 의지의 힘이야말로 나혜석에게서 엿볼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존재는 어디에서 시작되죠? 자유는 어디에서 시작되죠?”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바로 여성, 어머니라고 말하는 쿠르드의 여전사들. 나혜석 또한 여성이 결국 강자이며, 위대한 것이고, 최후 승리는 여성에게 있는 것이라고 썼다. 여성이 존재의 정수이자 정서적 근원의 힘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믿고 행동하고자 한 나혜석이야 말로 진정한 한국의 여전사였다. 우린 나혜석이 걸어간 그 길을 함께 따라 걸으며 새로운 용기를 보탠다. 100년 전 나혜석의 글과 그림을 통해 이토록 많은 것을 공명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 서고운(1983- ) 국민대 회화과 학사, 동대학원 석사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서울시립미술관, 강원국제비엔날레 등 전시 참여.  gounseo.wixsite.com/art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