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밀도
이선영(미술평론가)
옛 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한 작업실은 운동장과 도로를 낀 시야가 시원하다. 이번 전시 [시간의 밀도]에서 창 프레임의 작품도 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자체로 그림같다. 아이들이 가득했을 학교가 용도변경 됐듯이 한국 사회의 풍경은 급속하게 변한다. ‘한국적인 것’ 자체를 빠른 변화로 보고 싶을 정도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애써 찾아내야 한다. 변화는 비극도 희극도 아니지만, 유한한 존재들이 변화에 대한 감수성이 중립적일 수는 없다. 꽃을 피게 하던 시간이 지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은 시간의 양면성을 말한다. 창밖의 논밭 저편에 대단지 아파트는 지금도 그 도시에서 여기저기 많이 지어지고 있는, 빠르게 어떤 지역을 잠식하는 지배적 질서처럼 보인다. 작가도 그 동네에 살고, 걸어서 작업실에 오가곤 하지만, 그가 작품에서 주목하는 장소는 시간으로부터 벗어난 듯 호젓하다. 30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재개발을 염두에 둘 정도로 빠르게 순환하는 환경 속에서, 보다 느릿하게 변하는 자연이다.

누군가 열어 주었지만, 누구도 닫을 수 없는, 148.2x212.3cm,acrylic on paper, 2024
그러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사람들은 현재이기보다는 이미 색바랜 추억의 사진같이 모호한 시간에 놓인다. [시간의 밀도] 전은 그림이라는 공간적 형식에 시간성을 부여하려는 다양한 장치들이 있다. 세월의 무게에 처진 피부처럼 살짝 늘어뜨린 것, 비슷한 분위기의 장면이 차이와 반복의 관계로 여기저기 배치된 것, 그림 속의 그림들, 그리고 또 다른 전시실 하나를 가득 채운 애니메이션 원화들과 영상이 그것이다. 흐르는 시간을 한 칼에 베어낸 듯한 결정적인 장면은 그림의 이상적 상태이며, 사진은 이를 자동적으로 성취한다. 결정적 장면은 보기와 읽기를 화해시킨다. 사진이든 그림이든 한 장의 이미지는 대개 수수께끼로 남는다. 전후를 판별하게 하는 시간은 서사의 축이다. 시간은 미술이 단지 보여지는 것을 넘어서 읽혀지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한 장면으로 많은 것이 말하는 그림은 물론 영상이나 소설같은 시간예술 또한 단순한 재현주의를 거부하는 현대적 국면에서 여러 시간대의 도약이나 꼬임이 발생한다.
대중문화의 서사는 이를 최대한 감추려 하지만, ‘예술’ 영화나 ‘순수’ 문학같은 쟝르에서는 시간의 빈칸이 많고 의미는 자동적으로 정해지지 않아 난해하다는 인상을 준다. 시각예술은 자못 자명한듯 하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려면 작가가 작품에 새겨넣은 이야기의 선을 찾아가거나, 관객이 빈칸을 적극적으로 채워가며 서사를 생성해야 한다. 더 긴밀한 시간이 있고, 늘 상 반복되는 시간이 있다. 좋은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악몽같은 시간은 느리다. 휴식과 노동의 시간 차를 모르는 이는 없다. 하나는 자유롭고 느슨하며 다른 하나는 강제적이고 묶여 있다. 대개 문명/자연의 대조항에서 자연의 시간은 변치 않는 듯하지만, 누군가에게 자연은 인간을 다그치는 문명의 시간에서 벗어나 밀도 있는 시간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러한 자연을 많이 등장시켰다. 작업의 시간도 차이가 있다. 작업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할 때도 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때도 있다.

솟아난 빛,60.9x26.9cm,acrylic on paper, 2024
영감에 가득한 작업은 날거나 불타오르는듯 술술 풀리지만, 자꾸 꼬이거나 흐름이 잘리는 작업은 작가를 지치게 할 것이다. 현수하는 자연과 문명의 단편을 교차로 편집한다. 자연도 변하긴 하지만 인간이나 문명의 시간대에 비해 정지에 가까울 정도라, 그 ‘변치 않는 자연’은 시간에 배반당한 이를 위로해 주곤 한다. 하지만 인류세가 야기한 충격들이 집적됨에 따라 변치 않음은 항수가 아니게 됐다. 가령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의 배경은 활화산 같은 징후를 보여준다. 화산은 그자체가 자연스러운 지구의 운동일 수 있지만, 지구 온난화가 빙산을 녹여 묵직한 얼음이 억누르던 화산활동이 더 심해진다는 최근 학설도 있다. 그 위에 여기저기 삽입된 인간의 시간들은 갑작스러운 지각변동에 의해 단번에 삼켜질 수도 있다. 대체로 역사에 비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의 긴 시간 주기를 가지는 자연사는 치유를 원하는 예술로 하여금 원형으로 삼게 한다.
작품 [누군가 열어 주었지만, 누구도 닫을 수 없는]은 르네상스식 화면처럼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으로, 안정감 있는 대칭 구도다. 작업실의 큰 창이 작가의 무의식에 영향을 줬을 수 있다. 화면 구성은 미술사의 범례를 따랐지만, 그 내용을 채우는 것들은 작가가 경험한 이런저런 현실의 변주다. 재현의 역사에서 회화적 관례는 무엇인가 담기 위해 생겼고 내용물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전경의 분수대와 기하적으로 가지치기 된 나무들은 소실점 저편으로 질서 있게 펼쳐진 풍경의 전형이다. 하지만 견고한 사실감을 연출하기 위한 르네상스적 어법 대신에, 여리고 흐릿한 색조는 영원에 대한 이상을 상대화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먼저 그려진 이 작품은 시간이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시작점에 해당 된다. 이후의 작품들에서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증가할 것이다. 좌우로 균형 잡힌 여린 얼굴의 피부가 짙어지고 주름지고 이런저런 상처가 남듯이 말이다.

시간 너머 섬,148.2x212.3cm,acrylic on paper, 2024

시간이 머무는 곳,148.2x653.5cm,acrylic on paper, 2024
작품 [솟아난 빛]은 빛을 가득 받는 분수대의 물같은 이미지로, 수직의 물줄기를 중심으로 대칭이다. 여기에서 물은 강물처럼 흐르기보다는 솟구친다. 수평과 달리 수직은 불연속적인 시간 이미지다. 작가에게 시간은 균질하지 않으며 밀도의 차가 있다. 단독으로 서 있는 작품이 다른 작품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 것은 큰 작품이 유기적 전체보다는 유동적 집합의 특성이다. 여러 시공간의 축에 배치된 기억들은 계속 자리를 바꾸며 다르게 편집되곤 한다. 시간을 초월한 곳에 대한 인류의 상상은 유토피아 등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시간 너머의 섬]처럼 신록과 하늘을 반사하는 물이 그 비슷한 풍경일 수도 있다. 작가는 그 한가운데에 오래된 흑백사진 같은 장면을 끼워 놓았다. 한 장의 사진처럼 끼어드는 장면은 낚시터에서의 추억이었을까. 관객은 그 부분을 자기만의 추억으로 교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인 프루스트는 이런저런 단상을 적은 메모지들을 핀으로 꽂아 놓고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은 무엇이 어떻게 끼어들든 자연스럽게 받아주는 열린 예술작품이 될 것이다. 현수하가 옅게 펼쳐낸 자연 또한 넉넉한 맥락을 만든다. 여러 작품을 재구성하여 큰 작품을 만드는 방식도 그 예이다. 종이 위에 아크릴로 그린 [시간이 머무는 곳]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으로, 대칭형 구도에 이질적인 장면들이 박혀 있다. 그 무엇이 끼어들어도 무난하게 받아줄 만큼 배경을 흐릿하게 그려져 있으며 무채색이다. 실시간으로 이동 중의 장소가 체크되는 기술이 있는 만큼 각각의 장면은 특정 시간의 충만했던 공간일 수도 있다. 물론 트라우마의 장소도 있겠지만, 기차를 타고 지나치는 역의 추억을 떠올리는 어떤 여행자의 관점일 수도 있다. 흐릿한 배경의 산수 일부는 푸른 옷을 입고 있기도 하고 물가에서 쉬거나 나무에 매달려 즐거워하는 사람의 모습도 있다. 화산같은 연기가 나오는 부분은 그 맥락이 정지된 무대세트 같은 것이 아님을 말한다.

낮은 곳에서 눈맞추고,116.7x80.2cm,acrylic on canvas, 2024

헤멘 길,31.3x22.2cm,watercolor on paper, 2024

헤멘 길,47x35cm,acrylic on paper,2024
시간이라는 키워드가 있는 이번 전시는 영상 문법과의 관련이 있으며 실제로 이미지와 영상의 관계를 알려주는 작품도 선보였다.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은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현대 철학자의 영화론을 해설한다. 저자는 질 들뢰즈의 [시간-이미지]에 나오는 ‘우리는 사물들이 존재하는 곳, 즉 공간에서 사물들을 지각하듯이 사물들이 지나가는 곳, 즉 시간에서 기억한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기억은 시간 내에서 변위(dislocation)로서의 간격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시간 이미지에서 간격은 더 이상 공간 내의 연속성이 아니라, 시간 내 변위들의 계열이며, 이 변위들은 현재와 과거 간의 비선형적 비연대기적 관계를 포함한다. 저자에 의하면 기억은 지각과 대조적으로 시간 내에서 한층 복잡하고 무수한 지점들을 여러 이미지와 연계하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저자는 의식이 지각과 동일하지 않다고 본다. 반대로 의식은 기억과 더불어, 기억의 지속을 점유하는 과정과 관련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현수하는 기억이라는 단어를 애써 회피하지만, ‘시간의 밀도’에 이미 기억이 얽혀있다. 기억처럼 아련한 것 뿐 아니라 명철한 이성의 상징인 의식 또한 그렇다는 영화적 분석은 시사적이 있다. 조각보처럼 여러 면으로 이어진 [낮은 곳에서 눈맞추고]는 캔버스 위에 아크릴로 그린 그림이지만, 마치 수묵담채같은 느낌으로 연하게 칠해졌다. 여기에서 경계선은 두드러지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컬러인 가운데 어떤 면은 흑백이다. 초록빛 자연도 곧 무채색으로 변하는데 작가는 한 화면에 양극단의 시간성을 병렬시켰다. 긴 머리의 아리따운 청춘 또한 변화를 피할 수는 없다. 누가 봐주든 말든 말없이 피고지는 들판의 식물은 ‘낮은 곳’일 것이고, 화면의 주인공은 그 풍경에 눈을 맞춘다. [헤맨 길] 시리즈에서의 ‘시간’의 축은 연속적이지만, 빈칸은 많다. ‘헤맨 길’ 그자체도 그만큼 소요(방황, 낭비)된 시간을 암시한다. 경치가 좋은 곳에서 찍는 기념사진 같은 포즈를 취한 사람은 주변에 비해 흐릿하다.

헤멘 길,47x35cm,acrylic on paper,2024 (3)

헤멘 길,47x35cm,acrylic on paper,2024

작은 것들이 만든 세계,90.8x72.5cm,acrylic on paper, 2024
그곳이 유명한 장소라면, 배경은 그대로이고 사람만 바뀔 것이다. 같은 제목의 또 다른 작품은 산자락과 바위 등 풍경의 결을 매우 섬세하게 표현했다. 자연은 한 겹이 아닌 여러 겹이며, 그 겹이 펼쳐지는 경우의 수, 즉 사건은 무한히 다양하다. 또 다른 [헤맨 길]은 두 계절의 산이 공존하는 듯한 기이한 풍경 속 인물 또한 유령처럼 실제감이 없다. 계절에 따라 풍경이 입은 색이 어떠하든 무한히 많은 사람들이 걸었을 길, 사연이야 어떻든 지름길 없는 인생에서 모두 헤맨 길이었을 것이다. 또다른 헤맨 길에서는 한 몸의 두 얼굴처럼 다정한 두 사람이 자리한 자연은 많은 겹과 결을 가진다. 그 앞의 수직으로 선 바위도 결국에는 이 장면을 지배하는 수평의 흐름에 따르지 않겠는가. 본 전시장과 조금 떨어진 방(세미나실 용도)에는 왼쪽 벽에 걸린 [작은 것들이 만든 세계]으로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움직임이 있다. 작품 속 소년은 열린 창과 또 다른 창 사이에 있다.
또다른 창은 진짜 창일수도, 거울일 수도, 그림일 수도 있다. 르네상스 이래 이 프레임들은 중첩되곤 했다. 벽화로 고정된 프레임은 이제 움직이는 인간의 시선과 직관적으로 일치하는 기술로도 발전한다. 현수하의 작품에서 프레임을 벗어나 날고 있는 새들은 경계를 실험한다. 10분 분량의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 [연착]은 구름 사이로 날아가는 새들은 자연이 입력해 놓은 생존의 여정을 따른다. 오른쪽 벽에는 종이에 목탄으로 14x21cm의 작은 종이에 한 장씩 그린 새들을 벽면 가득히 붙여 놓았다. 평소에도 작가는 같은 소재를 여러 장 그리곤 한다. 물론 이러한 에스키스들이 본 작업에 들어올 경우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다. 새의 여러 동작은 미디어에 의해 가속화되면서 움직임의 환영을 낳는다. 사진과 영상은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적 체험의 전범을 이루며, 현대의 문화생태계를 만든다. 정지화면의 집합체인 영상은 영상적 현실이 그다지 견고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출전 2024 달천예술창작공간 제 4기 입주작가 결과 보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