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출

    

이선영(미술평론가)

 


홍선기가 크고 작은 캔버스 뒷면에 그린 얼굴들은 모두 다르지만, 나름의 ‘가족유사성’(비트겐슈타인)이 있다. 그를 실제로 만나본 결과 작품 속 인물들은 그와 닮은 변주된 자화상임을 알 수 있었다. 2층 전시장에 예전의 초등학생이 가슴팍에 옷핀으로 고정시킨 콧물 닦는 손수건이나 성인 남자를 상징하는 넥타이를 캔버스 뒷면에 설치한 작품은 환유(換喩)의 어법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자세한 생김새가 재현되지는 않은 초상들은 여러 시대, 세대, 인종, 성이라기 보다는 한결같이 중장년 남자로 나타난다. 유화의 강렬한 표현어법에 실린 선이 굵은 표정은 동서양을 넘나드는 듯하고, 두툼한 마티에르로 뒤덮인 얼굴은 때로 가면같다. 현실/허구의 구별이 와해되어 가는 시대에 가면 뒤의 본질은 없다. 그것은 허구의 세계를 말하기보다는 다양성의 유희로 다가온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근대를 향해 비판했듯이, 본질은 하나지만 가상은 여럿이다. 화가에게 삶은 너무나 무거워서 작품을 통해 덜어내기가 필요했다. 




자화상-반전·45.5×53.0cm·Oil Paint on Canvas·2024



자화상-반전·53.0×45.5cm·Oil Paint on Canvas·2024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지목되는 니체의 방식이다. 예술이 자유롭다는 말은 딱 거기까지다.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유희하는 것. 분장하고 거울 앞에서 보기는 단순한 나르시시즘적 행위가 아니라, 한 역할이나 한 자리에 살아 있는 인간을 구겨 넣으려는 지배적 힘에 거스르는 반항이자 유희이다. 정보화 시대에는 거울 대신에 일종의 전자거울인 SNS 등으로 옮겨가지만 그 기본 문법은 자화상에 있다. 그것은 ‘1983년 젊은 나이에 자화상을 테마로 첫 전시회를 열었고’, ’30여년이 지난 지금, 두 번째 인간의 군상들을 테마로 우리시대의 모든 모습을(자화상) 화폭에 담고자’하는 홍선기의 현재성이다. 전시장 1층에 같은 크기(10호)의 캔버스 수백개를 줄에 맞춰 가득 걸어놓은 작가는 코드를 통해 분열을 거듭하는 초상의 편재를 표현한다. 설치의 형식 그자체로 ‘나르시시즘의 문화’(크리스토퍼 라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작업을 통해 수없이 바라본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여러 장을 같은 크기로 배열한 것은 마치 필름 같은. 연속적 동작의 단면들이다. 현대회화는 일찌기 사진이나 영상 등 동시대의 어법은 자기화했다. 물론 홍선기의 초상은 모두가 행복한 선남선녀이기만 한 SNS의 기만적 초상들과는 거리가 있다. 둘 다 가상적이기는 마찬가지지만, 자신이라는 묵직한 존재를 물감이라는 물질로 그리는 회화는 감정의 무게가 더 실리기 마련이다. 같은 얼굴이라고 해도, 그리기는 질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말했듯이, 코드를 다룰 때처럼 손가락으로 코드를 툭툭 선택만 하는 가벼운 행위가 아니다. 회화는 물질이나 몸에 여전히 묶여있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거칠은 마티에르의 강조, 굵은 선과 단순한 형태를 조형수단’으로 하는 작업’이라고 한다. 이는 ‘거친 붓질과 두터운 물감에 의한 육질의 질감’으로 나타난다. 그림이 물질 및 살과 맞대고 있는 상황은 질곡은 아니며, 가상일변도로 내달리고 있는 현대 사회의 균형추가 될 실재에 속함을 말한다. 




자화상-반전·130.3×162.2cm·Oil Paint on Canvas·2024



자화상-반전·181.8×227.3cm·Oil Paint on Canvas·2024



자화상-반전·227.3×181.8cm·Oil Paint on Canvas·2024



실재는 비극도 희극도 아니지만, 그림자 없는 가상의 질주에 뒤쳐진 듯 보인다. 다행히도 현대는 직선 고속도로가 아니라 미로라서 전세는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 캔버스 뒷면에 그리는 그의 초상은 틀에 갇혀있다. 캔버스 지지대를 변주한 여러 방식의 틀이 제시되지만, 특히 얼굴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나무는 매우 공격적으로 다가온다. 그 안의 얼굴을 관통하는 폭력적인 힘은 관객과 수인(囚人) 사이에 선명하다. 작은 캔버스 안에 가득한 얼굴의 압박으로 틀은 부러지기도 하고, 때로 틀이 없는 것도 있지만 틀의 견고함과 상관없이 그 안의 초상들은 모두 수인으로 보인다. 감옥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상태가 더욱 두려운 것이며, 이는 미셀 푸코가 [감옥의 역사]에서 말한바, 공개처형이 아닌 관리된 사회의 열린 감옥을 말한다. 전제주의나 독재사회와 달리 일견 합리주의적인 관료 사회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고 해방인가의 문제를 모호하게 한다. 심지어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말하는 철학자도 있지 않은가. 


수직 수평을 맞춘 좌표계 속에 인간들이 차곡차곡 배치된 것만으로도 이미 수인인 것이다.  투명한/ 폭압적인 감옥은 인간을 보이지 않게/보이게 가두고 있고, 그 결과가 정체성의 변화이다. 땀이나 피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물감은 주체의 경계를 넘나든다. 사회의 지배적 질서인 틀은 그 안의 인간을 완전히 정형화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자아의 심리학에서 주요한 소품을 담당하는 거울은 분열된 몸을 상상적으로 종합하는 환영의 도구로 알려져 있다. 거울에는 이미 금이 가 있다. 초상, 특히 자화상은 거울과 밀접하며, 미술의 지배적 전통을 이루어왔던 재현에서 거울이나 창 등은 화화의 가장 유력한 비유였다. 지지대가 캔버스 천으로 잘 가려져 있으면 밑칠이 완벽한 매끈한 하얀 캔버스는 주체와 세계를 담기 위한 중성적 장으로 간주되었다. 그런 캔버스를 뒤집었다 함은 거울이나 창의 뒷면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홍선기는 그 뒷면에 통합된 정체성이라는 사회적 기대치에 갇힌 주체가 있음을 폭로한다. 




자화상-반전1·45.5×53.0cm·Oil Paint on Canvas·2024



자화상-반전2·45.5×53.0cm·Oil Paint on Canvas·2024



그는 ‘인간은 관계의 동물이며 사회관계를 통해 심리적 영향을 받고 또 자아를 확인하기 때문이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거울이 맡는 역할을 말한다. 보는 존재는 보임을 의식한다. 보고/보이는 관계 속에서의 차이는 착각과 억압의 원인을 제공한다. 특히 그가 선택한 유형, 즉 중장년 남성의 초상은 이미지의 역사에서 ‘인간’을 대표해 왔지만, 이제 그 취약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최고 수준의 자살율을 기록하는 우리나라에서 고독사 1순위가 그들이라는 통계는 주체를 구성함과 동시에 둘러싸는 사회적 그물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취약한지 알려준다. 부르주아적 주체든 프로레타리아적 주체든 여성적 주체든 기타 소수자의 주체든, 주체성이 문제된다고 해서 주체를 해체(좋게는 확장)하는 것도 큰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실주의가 아니면서도 추상으로 귀결되지 않는 작가의 조형적 선택과도 관련된다. 


르네상스 이후에 정교해진 재현의 문법은 투명성을 강조하지만, 현대의 작가에게 투명한 언어는 없다. 홍선기의 작품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변형과 왜곡은 불투명하다. 투명한 반사상으로 간주되어온 거울 또한 그 언제고 그 누구고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현대는 그 사실을 보다 의식한다. 논리적으로 볼 때 사실주의 이후에 표현주의가 올 수 있다. 보다 유연하고 기술적으로 진보한 스마트 거울은 매끈한 모습만 보여주려 한다. 하지만 육체와 물질과 보다 끈끈하게 결합된 회화는 거울의 간극이나 뒷면에 더 밀착된다. 홍선기의 작품에서 얼굴은 녹아내리며 그 흔적을 캔버스 틀에 지저분하게 남긴다. [뒤집어진 캔버스-반전의 인물들] 전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거울의 뒷면은 인간이 거울에 갇혀 고통받고 있다는 점이다. 자아라는 기만적인 상상의 거울은 뒤집어진 캔버스와 부러진 지지대로 적나라하게 본 모습을 나타낸다. 쪼개진 틀은 때때로 날카로운 각면이 되어 너는 어때하면서 관객을 향해 찌르는 듯하다. 




자화상-반전·40.9×31.8cm·Oil Paint on Canvas·2024



자화상-반전·162.2×130.3cm·Oil Paint on Canvas·2024



자화상-반전1·162.2×130.3cm·Oil Paint on Canvas·2024



자화상-반전3·53.0×45.5cm·Oil Paint on Canvas·2024



작가는 군상이 되어버린 초상들의 모음에 대해 ‘이 모두가 나의 자화상,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될 수 있음을 던진다’고 말한다. 홍선기는 가장 작은 면적에 가장 큰 표현력이 있은 얼굴을 짝패처럼 관객 앞에 마주해 놓는다. 벽에 거울처럼 세워진 사각형들은 그것을 보는 자를 본다. 주체의 경계를 흘러내리는 체액-물감들은 이런저런 압박으로 뒤틀린 표정과 어울린다. 작가는 우울하고도 기괴한 초상들에서 ‘인물의 내면적 혼란이나 변화의 순간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느껴지는 불안전성과 혼돈을 표현한 것’이다. 특히 강렬한 단색으로 표현된 초상의 배경 색은 표현주의 풍의 초상에 표현력을 배가한다. 가령 붉은색 계열의 배경은 작품 속 인물이 지옥불이나 전쟁터 같은 곳에 있는 듯하며, 푸른색 계열의 배경은 그의 깊은 우울과 고립을 암시하는 듯하다. 해맑은 오렌지, 노랑 계열의 배경 색조차 그의 분열과 광기를 전달한다. 그는 ‘나는 어둡고 미묘한 색조와 함께 대조를 이루는 선명한 색조를 사랑한다. 또 두꺼운 질감을 즐기는 동시에 이야기가 있는 담론도 중요시 한다’고 말한다.


출전; 전북특별자치도립미술관 서울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