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의 리듬과 화폭의 박자

  

이선영(미술평론가)

 


김희영을 미술계에 입문시킨 작품은 최근 작품과 달리 사실적이다. 순지에 수묵으로 그린 [음영 IV](1993, 중앙미술대전 우수상)은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나무 손수레가 소재다. 어느 날 그의 눈에 훅 들어온 손수레는 그 당시에도 이미 낡은 물건이었을 것이다. 아스팔트 위에 말 달구지에서 나온 분뇨에 대한 기억이 선명한 70년대에서 마이카 시대가 열린 시기와의 사이가 멀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무엇인가 유물이 되는 속도는 매우 빠르다. 사실주의는 곧 과거가 될 현재를 기록한다. 사실성에 회화의 아우라까지 겹쳐지면, 당시의 공기까지 전달된다. 작품 속 서 있는 사물은 인간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손수레 사용자는 고된 하루를 마쳤을 일용 노동자일 것이다. 대상으로 은유된 인간은 굳이 수묵이 아니어도 화려함과 거리가 있는 무채색 삶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작품인 [음영 II]는 여러 대의 손수레가 군상처럼 줄지어 서 있는 낡은 벽이 인간을 대신하여 삶을 표현한다. 




음영 IV, 순지에 수묵, 130x180cm, 1993



음영 II, 순지위에 수묵, 161x122cm, 1992



그 즈음의 작품에서 ‘음영’이라는 제목은 삶과 인간을 조형적 언어로 포괄하면서, 이후의 방식을 암시하는데, 그것은 수묵의 정도(正道)를 가는 여정으로 평가된다. 되돌아보면 이 길 또한 소수만이 가는 길이었다. 손수레 그림 이후 20여년이 지난 [Line & Rhythm]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선과 율동같은 추상이다. 하지만 완전한 추상은 아니다. 리드미컬한 선과 한지에 배어드는 먹의 흔적은 외적, 내적 풍경에 내재한다. 초창기의 사실주의풍의 그림이 산문이라면, 이후의 추상적 화면은 시에 해당된다. 김희영의 작업 여정은 산문에서 시로의 변화와 비교될 수 있다. 먹물에 실린 시는 딱딱한 문장이 아니라, 말처럼 흐른다. 그의 작품은 글의 정확성보다는 말의 정념이 강하다. 루소는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우리는 말할 때 감정을 표현하고 글을 쓸 때는 생각을 전달한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생각보다 감정이 먼저이다. 루소는 사람들은 분절과 목소리뿐 아니라 음과 리듬을 통해서 말을 했다고 쓴다. 


그에 의하면 ‘언어는 물론 생각을 표현한다. 하지만 감정과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리듬과 음이, 다시 말해서 선율이 더 필요’하다. 산문은 정확함을 목표로 하지만 시로의 변환에서는 음악적 요소가 요구된다. 루소에 의하면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언어는 더 정확해지면서 정념적인 면은 줄어들게 된다. 그런 언어는 감정을 개념으로 대체한다. 그것은 이제 마음이 아닌 이성에 호소한다. 그래서 악센트는 사라지며 음절별로 더 명확히 발음된다. 그리하여 언어는 더 정밀하고 명확해지지만 더 밋밋하고 더 희미하고 더 차가워진다는 것이다. 김희영의 [Line & Rhythm](2015) 시리즈의 제목에 포함된 것처럼 시적 예술에는 운율이 핵심이다. 조형적 예술에서 시적 운율을 적용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김희영은 같은 폭을 가지는 화면의 병렬에 의해서도 운율을 부여한다. 시적 운율은 화면 안에 그려진 소재뿐 아니라 화면이라는 구조적 요소 또한 활용한 것이다. 




무제, 순지에 수묵, 153x77cm, 1993



무제, 순지에 수묵, 80x80cm, 1994



무제, 한지에 먹, 142x21cmx3, 2002



무제, 145x75cm, 순지에 먹, 2008



작품에서 특이점은 종이를 여러 장 사용해서 화면을 만드는 것이다. 단독으로도 충만하지만, 연결을 통해서 힘을 발휘하며, 연결 관계에 따라 큰 작품도 가능하다. 작가는 동양화의 여백에 내재된 융통성을 적극적으로 펼친다. [Line & Rhythm 20151-4](2015) 시리즈에 나타나 있듯 각 화면이 동질이상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연결은 자연스럽다. 화면을 가르는 몇 가닥의 먹선들, 때로 그 주변으로 번지는 다른 농담의 먹물은 연결고리가 된다. 선이나 면은 그 위로 연속적으로 쌓은 화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화면 그자체가 달라짐으로 인해 생기는 불연속성은 명확하다. 산문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듯한 환영의 장치를 구사하지만, 시에서는 그러한 연속성이 사라진다. 종이와 종이가 맞닿는 지점의 단절은 시어가 현실을 구구절절하게 묘사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지만 김희영의 작품에서 그러한 시적 단절은 이어짐의 단초가 된다. 한 화폭으로 나타나는 단편은 고립이 아니라 다른 화폭들과 연결되는 유인책이며, 보이지 않는 맥락을 형성한다. 


이 불연속적 층은 선이 선들이 되고, 번짐과 만나고, 선과 번짐의 관계가 바뀌고 하는 식의 부단한 운동이 만들어진다. 한 장의 종이 만큼이나 종이들 간의 관계는 자유롭게 조합되지만 상하는 분명하다. 거꾸로 된 화폭을 통해 추상을 발견했다는 칸딘스키처럼 거꾸로 볼 수는 없다. 추상적이면서도 중력감이 분명한 그의 작품은 다른 제목에서도 나타듯이 일종의 풍경이다. 그래서 다른 농담의 얼룩은 그림자로도 보일 수 있으며, 하얗게 남겨진 여백은 쌓인 눈이나 가득한 빛으로도 느낄 수 있다. 재현주의로부터 벗어난 조형 언어들은 유기적 연결이 아니라 계열적 연결이다. 그것은 전체와 부분의 유기적 관계가 아니라 집합이다. 집합적 형상은 무수한 변주를 만든다. 계열의 집합은 유기적 총체성보다는 긴밀하지 않지만, 열린 예술작품의 단초가 된다. 김희영은 동양화의 여백을 더 급진적으로 해석한다. 재현의 촘촘한 그물망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인 여백은 무엇인가 생략되거나 생겨날 수 있는 잠재적 공간이다. 




풍경, 한지에 먹, 73x69cm, 1998



풍경, 한지에 먹, 144x34cm, 1999



풍경, 한지에 먹, 30x35cm, 2004



여명 II, 한지에 수묵,담채,  75x144cm, 2005



각각의 화면에 여백이 있고 화면과 화면 사이에도 일종의 여백이 있는 셈이다. 영상의 시대에도 여백은 큰 힘을 발휘한다. 영상은 정지된 장면들이 이어진 것 아닌가. 장면들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을 통해 영상이 되는 것처럼 단편들은 움직임이나 서사의 단위가 된다. 잘 만들어진 장면, 영상, 시가 그렇듯, 절도가 중요하다.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나뉜 선들은 도시적 리듬을 담는다. 도시적 리듬은 자연보다 기계적이다. 하지만 어쿠스틱 악기 뿐 아니라 음향합성기에서 만들어지는 음악도 인간을 춤추게 할 수 있다. 백색 소음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확실한 리듬을 위해서는 자연에 내재된 고유의 잔잔한 리듬만큼이나 전기라는 증폭장치가 필요할 때가 있다. 단면과 단면의 만남은 접힌 단면들 같아서, 펼치면 늘어날 공간도 내재한다. 화면과 화면이 만나는 선은 접혀있는 여백인 셈이다. 김희영의 풍경은 원초적 자연이 아니라 잘 조성된 도시의 공원이나 대단지 아파트의 정원같이 자연과 인공의 결합이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예술은 전적인 자연도 전적인 인공도 아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자연적 소재를 다룬 작품에 [무제]라는 중성적인 제목을 달았다. 대나무 등 동양화에서 확실한 소재들을 그린 [무제]라는 시리즈는 90년대부터도 그렸다. 당시에 대도시 뒷골목의 물건들을 자세히 묘사하면서도 [음영]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과 비슷한 태도다. 소재나 대상들은 그자체 보다는 조형적 언어를 펼치기 위한 일종의 알리바이였다. 94년에 순지에 수묵으로 그린 [무제]는 식물이라는 힌트만 있다. 2001년의 [무제]는 대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은 먹으로 가능한 농담의 경연장이다. 2002년의 [무제]에는 3개의 화면에 나눠 그린 식물들 사이에는 자체의 여백 외에 장면들 사이의 간격을 두었다. 형상들이 가장자리에 배치된 2008년의 [무제]는 무엇도 연상시키지 않는 순수추상으로 다가온다. [Line & Rhythm] 시리즈를 다른 언어로 표기한 [線-律] 시리즈도 비슷한 맥락이다. 




線-律, 한지에 먹, 136x21.5cmx2, 2004



線-律, 한지에 먹, 137.5x22cmx2, 2004



김희영의 작품이 더 함축적으로 변하면서 추상적 국면이 강해지자 음악적 비유는 더욱 필연적이 됐다. 초기 추상화가들이 음악과 긴밀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빅토르 주커칸들은 [소리와 상징]에서 선은 운동을 묘사하는 상징이라고 말한다. 소리는 시간과 관련된다. 빅토르 주커칸들에 의하면 선율이 음의 역동적 장에 있어서의 운동이라면, 리듬은 박자의 역동적 장에서의 운동으로서 존재한다. 김희영의 작품에서 몇가닥 없는 선들은 선택의 순간과 관련된 긴장감이 느껴지며, 이는 선율의 경험과도 비슷하다. [소리와 상징]은 리듬과 박자를 구별한다. 빅토르 주커칸들에 의하면 ‘박자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지만, 리듬은 유사한 것이 돌아오는 것이다. 기계는 박자같이 움직이지만 사람은 리드미컬하게 걷는다. 박자는 분류적, 분석적 이성의 상징이 되지만 리듬은 삶의 창조적이며 통일적인 힘의 상징이 된다. 엄격한 박자는 시로부터 리듬을 앗아간다. 음악적 경험에서의 현재는 결코 반복되지 않으며 매순간 끊임없는 그 자신의 보존과 그 자신의 예측’이다. 


작가는 선율과 관계된 주제를 수십년째 계속하고 있다. [線-律](2004)에서 선의 배치는 율동을 낳는다. 선이 가는 무용수의 움직임 같기도 하다. 먹선이 선율이라면 색이 들어간 선은 화음이다. 여러 장으로 붙인 작품에서 각 화면에서 번지는 먹물을 단호하게 잘라낸다. 이례적인 붉은 색 바탕의 작품은 급격한 획의 변화에 의한 속도감을 통해 좀 더 강렬하게 표현된 선율을 강조한다. 그 결과는 불협화음일 텐데, 이는 현대음악의 특징이기도 하다. 고전주의의 자연스러운 선율은 도시의 소음 속에 묻혀버린다. 이전의 조화는 변화를 위한 과도기를 거치며 그것이 ‘불협화음’을 낳았을 것이다. 현대예술은 좀 더 많은 잡음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 과제가 있다. 10여년 이후의 [線-律 4](2014)에서 희미하게 시작했다가 강하게 뻗어나가고 이후 툭 털어지는 선은 선율에 대한 공(共)감각적 표현이다. 여러 번 그려진 선들이 가지는 잠재적 운동감은 무용수나 지휘자의 동작을 떠오르게 한다. 




線-律, 한지에 먹, 137x144cm, 2004



Line & Rhythm 20151, 143x230cm, Ink on Paper, 2015



Line & Rhythm 20152, 143x230cm, Ink on Paper, 2015



線-律 4, 46x43cm,2014, 한지위에 먹



선-율, 한지에 먹,25x27cm, 2024



2024년의 작품에서 다양한 각도로 떨어지는, 또는 나아가는 선들이 보인다. 자연과 관념이라는 두 축을 참고로 하는 한국화에서 풍경은 두 범주가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이다. 작품 [여명 II](2005)는 여러 색이 들어갔어도 사의가 담긴 필획과 다양한 농담의 먹은 수묵담채의 본질을 보여준다. 보이는 광경의 재현이 아니라, 그 요소에 감성을 싣는 작품은 여전히 풍경이다. [풍경](1999)에서 가로로 긴 화면은 지나가면서 보는 스펙터클한 풍경의 구도이다. 2004년의 [풍경]에서 오래된 건축 일부를 연상시키는 선들은 그 주변에 같이 있었을 자연에 대한 감흥과 결합 된다. 동양화의 여백은 공간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부채꼴 모양의 화면인 [풍경](2004)은 접고 펼치는 부채의 속성과 관련해서 여백이나 현대철학에서 등장하는 ‘주름’(질 들뢰즈)이라는 맥락을 조성한다. 그 위에 얹힌 풍경 또한 잠재성과 현실성을 오가는 주름의 양태를 가진다. 현실 속의 인공물도 수없이 건설과 파괴를 거듭하지 않는가. 예술이나 자연은 그러한 생멸의 과정을 더욱 빠르게 또는 더욱 느리게 실행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