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덩어리의 피맺힌 외침
이선영(미술평론가)
2024년 10월의 한 신문 기사에서는 1년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가자 전쟁에서 발견되는 시체들의 이상한 상처들을 보도했다. 기사에 의하면 ‘당시 중상자들의 피부에는 1~2mm 정도의 미세한 파열구만 있었지만, 그 내부를 보면 근육, 내장 등이 온통 찢어져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디지털 타임즈) 기사에 의하면 이 전쟁범죄는 ‘고밀도 비활성 금속 폭탄'(DIME)이란 것에 의해 이루어졌다. 파편만 박혀도 팔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첨단 살육 무기라고 한다. 이 무차별적 폭력의 희생자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기관들이 다수 보이는 최은희의 전시에서 살육의 현장은 전쟁터가 아니라 가정이다. 가정에서 죽음까지 이르는 상처가 쌓인다. 작품 [맴매]에서 하얀 벽 속에서 삐져나온 듯한 손들은 무엇의 손짓을 하고 있다. 팔들의 간격을 보면 그것이 두 팔은 아니라 하나라는 점이 더욱 절박하다. 분홍빛 피부에는 피멍 자국이 선명하다. 최은희의 작품에는 상처와 죽음의 증후들이 작품 전체의 색감을 이룬다.

맴매(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대구예술발전소에 있음)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빨강과 흰색이라는 대립 가운데에 있는 분홍은 강한 힘과 연약한 부드러움의 대립, 적극성과 수동성의 대립, 불과 얼음의 대립인데, 분홍은 그 양극단의 이상적인 중간에 위치한다. 그에 의하면 부드러운 힘, 서두르지 않는 에너지, 아늑한 체온, 분홍은 아기와도 같다. 녹색이 식물의 색, 빨강이 동물의 색이라면 분홍은 어린 생명의 색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은희의 작품에서 피멍을 이루는 요소이기도 한 블랙과 레드라는 강한 힘에 의해 적절한 균형은 무너져 버렸다. 하얀 벽 속에 묻혀 있을 불길한 사건의 전모는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는 단편으로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은유하는 것은 최은희의 어법이다. 전시장 벽을 작품의 의미로 끌어들인 작가는 가정 폭력이 죽음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사적 영역임을 암시한다. 여러 동작의 같은 크기의 손이라 움직이는 듯하다. 어둑한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펼쳐진 광경을 읽고 소비하기 보다는 불길하고 묵직한 분위기의 정체를 스스로 추리해야 한다.
당시 아이의 학대 치사 사건들은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 또한 묻히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추리는 더욱 힘들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전쟁과 자연재해는 이 비슷한 장면들을 쉴 새 없이 송출하고 있다. 작품 [맴매]에서의 손들은 통통한 손가락들, 그리고 아직 손가락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없는 자세에서 아이의 손임을 유추할 수 있다. 동물보다 불완전하게 태어나는 인간은 긴 보호 기간을 필요로 한다. 오랜 교육 기간은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필수 코스지만, 보호자에게 완전히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은 평생을 따라다닐 트라우마의 원천이다. 아이의 파편들은 전쟁통에 떼죽음을 당한 민간인의 어른용 장례 비닐 봉지와 구별되는 아이용 장례 비닐 봉지를 볼 때와 같은 통한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피기도 전에 시든 꽃이다. 그동안 사회적 폭력의 문제에 관심을 두어왔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폭력 그자체보다는 폭력적 현상의 실제 사례( 아동, 여성, 노동자)로 방향을 전환했다. 대개 죽은 아이 이름을 단 OOO 사건으로 말해지는 비극의 무대는 가정이다.

[맴매]

[축 늘어져 있죠. 무감정 상태예요, 완전히]
사랑과 보호로 가득해야 할 가정이 그렇지 못하다는 점은 다소간 저 멀리의 사건들보다 더욱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결국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이 밝혀진다. OOO 사건의 경우 학대 신고가 여러 번 됐지만, 경찰서 관할구역의 문제 등으로 아이가 살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맴매]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훈육을 위한 사랑의 매여야 하지만, 그것이 훈육인지 훈육자인 어른 자신의 파탄 난 마음의 화풀이인지는 모호하다. 대개 폭력의 가해자도 폭력의 희생자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아이는 폭력의 악순환에서 죽음에 이르는 파국을 맞는 이들 중 하나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희생자의 방점은 달라질 수 있다. 노동운동가라면 노동자가, 페미니스트라면 여성일 수 있다. 사회학자들이 밝힌 왕따의 메카니즘은 누군가를 소외시키는 와중에 자신은 그 소외로부터 면제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경쟁에서 낙오한 불행한 가장은 술 먹고 화풀이할 가족이 있다. 폭력은 순차적으로 약자에게 전가되면서 자신이 당한 폭력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이 소외된 현대사회가 유지되고 모순이 재생산되는 과정이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전가가 불가능한 최종 단계에 아이가 있는 것이다. 작품 [축 늘어져 있죠. 무감정 상태예요, 완전히]에서 아이는 머리와 사지만 지지체에 의지한 채 공중에 떠 있다. 그 기괴한 형상은 인형인지 사람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온 몸에 퍼져 있는 얼룩들이 무엇인지 확인하려는 관객을 숨은 카메라가 포착하여 맞은편 거울에 비추게 한다. 관객이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관객을 보는 듯 연출되었다. 그 거울은 찢겨있다. 거울의 실루엣은 다름 아닌 멍자국이다. 온몸에 찍힌 멍 중의 하나가 좌대로, 그 뒤의 거울로 확대된다. 실루엣은 눈 모양과도 겹친다. 작품의 동공에 관객이 비친다. 소리 없는 외침은 메아리가 되어 공간에 울려 퍼진다. 아이에게 가해진 폭력은 마구 그어진 듯한 붉은 선으로도 증폭된다. 선은 폭력처럼 무차별적이다. 2019년 귀국하자마자 맞딱트린 아동학대 사건의 충격으로부터 시작된 최은희의 작품은 불가피하게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축 늘어져 있죠. 무감정 상태예요, 완전히]

[축 늘어져 있죠. 무감정 상태예요, 완전히]
살아있는 아이들의 심장을 도려내 태양신에게 바치는 풍속부터 피 흘리는 십자가 상까지,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점입가경의 전쟁까지 넘치고 넘치는 것이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수전 손택)이다. 잔혹극같은 무대의 주요 세트인 거울은 타인의 고통을 재현하는 문제와 더불어 그 안에 들어선 관객을 불가피하게 관음증에 연루시킨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시몬느 베이유의 [전쟁에 관한 성찰]을 인용하면서 ‘폭력을 당하게 되면 그 사람은 숨을 쉬는 생생한 인간에서 사물로 변형되어 버린다’고 한다. 작품 속 망가진 인형이 바로 그 사물이다. 실제 사건에 바탕 한 끔찍한 ‘구경거리’는 강약의 조절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여전히 충격적인 고통을 둘러싼 도상학이지만, 최은희는 인형이라는 장치와 다 보여주지 않는 흐릿한 거울로 충격 이후의 사유에 방점을 찍었다. 최은희는 자신의 작품이 ‘일상 속에서 잠시 외면되어 있었던 이야기나 사람, 어떤 감정을 다시 상기시키고, 잠시나마 그들을 생각해 보는 정도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출전; 대구예술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