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애/ 그리움을 붙잡는, 그리움을 박제하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빠르고 정신없는 생활 속에서 느리고 치밀한 색면의 비구상적 요소와 차곡차곡 그려낸 구상적 요소인 자연물의 조화를 통해 삶의 쉼표를 찍고 싶다. 조각보를 차용한 색면과 질박하며 비움의 미를 느끼게 하는 옹기, 우리나라 꽃과 열매를 그려 옛 선조의 삶의 경건함과 단정함을 명상한다. 
- 작가 노트

남미의 환상적 사실주의(매직 리얼리즘)자 보르헤스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자신이 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정황을 소설로 그린 적이 있다. 두 사람은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순간적인 눈길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끝내 서로 알아보지 못한 채 만나지는 않는다. 여기서 현재의 나와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과거의 나를 또 다른 자기 그러므로 자기_타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보르헤스는 거울 속에 타자들이 산다고도 했다. 상실된 자기, 억압된 욕망, 과거의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다. 거울을 보고 있으면, 과거가 만든 현재의 내가 보인다. 그 거울 앞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있고, 스치듯 보고 지나치는 사람도 있다. 그렇게 거울 앞에 오래 머무는 사람, 거울 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가 들면 없던 성향도 생기는 법이지만, 유독 자기반성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다. 

작가 민경애가 그렇고, 그의 그림이 그렇다. 세대 감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그리움이라고 해도 좋을 추억과 기억을 그림 위로 불러온다. 상실된 유년을 불러오고, 어머니를 불러온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해도 좋을 어머니의 보편적인 형상을 불러오고, 그 형상에 부수되는 전형적인 모티브를 불러온다. 이처럼 어머니의 보편적인 형상을 그리는, 차라리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그리는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어머니에 포개진 자기 자신을 그리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어머니를 매개로 한, 어머니를 통해 본 자화상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골무가 있고, 조각보가 있고, 옹기가 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품일 것이다. 어머니로부터 전수된 DNA를 증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소재들일 것이다. 옛 여인의 삶의 지혜가 묻어나는 소재들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골무는 주지하다시피 바느질과 뜨개질에 부수되는 결정적인 소품이다. 바느질과 뜨개질로 밤잠을 설쳤던 어머니의 신성한 노동을 증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 독특한 미의식을 반영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섬세하고 정교한 장식으로 인해 장인의 미의식이 집약된 물건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조각보는 자투리 천을 이어 붙여 만든 것으로 재활용과 관련한 검소한 생활철학을 엿보게 한다. 같은 소재의 천 조각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다른 소재에 다른 색깔의 천 조각을 이어붙여 만들기도 하는데, 당연히 그 과정에서 평소 몸에 밴 미의식이 작동한다고 보아야 하고, 동시대적인 용법으로 치자면 색면 구성과 관련한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창작 주체의 생활철학이 미의식과 결부되면서, 미의식으로 발현되면서 그 자체 독자적인 하나의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된 경우라고 해야 할까. 남성 주체에게 만다라가 있다면, 여성 주체에게는 조각보가 있었다고 해도 좋다. 주지하다시피 만다라는 우주의 원리와 섭리를 도해한 그림으로, 여성의 세계관이 여성의 성적 정체성과 만나 또 다른 하나의 우주를, 우주에 대한 비전을 열어놓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옹기는 소박하고 질박한 생김새가 서민적인 생활 정서와 미의식을 반영하는 것과 함께, 장맛과 손맛 같은 맛을 관장했던, 먹거리를 책임졌던, 그러므로 생명을 먹여 살렸던, 여성 주체의 생명의 미학을, 살림의 미학을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가 제안하고 있는 소재들은 하나같이 여성의 성적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들이고, 여성 주체의 생활철학과, 생활철학의 산실인 규방 문화로부터 유래한 것들이다. 거시적인 담론으로 치자면 전통적인 것들이고, 작가 개인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진즉에 후설과 비트겐슈타인은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부터 유래한 생활철학을, 생활감정을 미의식과 결부시킨 적이 있고, 여기에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공예에서 미의식의 정수를 보기도 했다.
 

그렇게 작가는 전통적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소품들을, 골무를, 조각보를, 옹기를 그린다.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리는데, 어느 정도 작가에게 친숙한 회화적 관성을 따라 그린 것일 터이다. 동시에 그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야 그리움이 날아가지 않는다고, 그처럼 생생하게 그려야 비로소 그리운 마음을 붙잡아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이처럼 상실한 것을 되불러와 그리움을 환기하는 것, 그리움을 박제하는 것, 그리움이 현재를 위로하고 치유하게 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그림에서 사실적인 재현에 주력하는 것이지만, 이런 구상적인 형태와는 사뭇 다른 예가 있어서 주목된다. 조각보가 그렇다. 앞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조각보 자체가 이미 구상적인 형태보다는 추상적인 형상 중 특히 색면 구성으로서의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그 자체 평면 오브제란 점도 평면으로의 환원 그러므로 추상적인 평면을 지향하는 것에서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발견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에도 부합한다는 점 역시 주목해볼 일이다. 

그렇게 조각보 자체가 이미 태생적으로 평면성과 추상성을 본성으로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만큼 형상을 다루는 재현적인 그림보다는 추상적인 회화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이 현대성을 담보하게 해주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각색하게 해주는 구실이며 계기가 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 자체 사실적이고 재현적인 형상과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모티브가 하나의 화면 속에 어우러지고 있는 작가의 그림이 갖는 회화적 특수성을 이해하게 해주는 대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처음에는 조각보를 탁자나 테이블보처럼 가구의 바닥에 까는 형태로부터 시작했다. 조각천 형태의 테이블보 위에 골무와 같은 전통적인 모티브를 올려 장식한 정물 형태의 그림으로부터 시작한 것. 그리고 이후 점차 조각보 자체의 추상적 가능성에 눈을 떠서일까, 조각보 자체의 평면성과 추상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옮아가고 있다. 그림의 장르 역시 전통적인 정물화에서 색면 구성이 강조되는 추상화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 부연하면, 그림에 등장하는 소품들 그러므로 형상적 모티브가 강조되다가, 점차 조각보의 추상적인 패턴과 형상적인 모티브가 하나로 공존하다가, 종래에는 조각보의 평면적인 패턴이 만든 추상화 쪽으로 그 의미 비중이 이동하면서 현재 형식실험 중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근작에서는 조각보의 평면적이고 추상적인 패턴이 전면화하는 것인데, 그 자체 색면 구성에 바탕을 둔 추상회화 말고도,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본 논밭을 보는 것도 같고, 생명을 먹여 살리는 대지를 보는 것도 같다. 아마도 추상화에 대한 형식실험이 이후 작업에서 생태 담론과 만나 또 다른 가능성의 지평을 여는 것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