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태/ 풍경을 쌓는, 그러므로 존재의 집을 짓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풍경. 풍경은 자연과 다르다. 자연을 보고 있으면, 내 쪽에서 자연으로 자연에서 내 쪽으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무언가가 있다. 자연과 내가 상호작용하는 것인데, 그 상호작용으로 자연은 풍경이 된다. 그러므로 풍경은 내가 매개된 자연이며, 내가 해석한 자연이다. 나에 의해 규정되고 한정된 자연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풍경을 그린다는 것은 자연을 매개로 정작 자연이 아닌, 사실은 자연에 던져진, 자연에 투사한 나를 읽는 행위이며, 자연에 숨은 나를 찾는 자기반성적인 행위일 수 있다. 자연을 대면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추상풍경. 우리는 같은 것(곳)을 보면서 사실은 다른 것(곳)을 본다. 저마다 환경이 다르고, 인문학적 배경이 다르고,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풍경은 주체에 연동되는데, 우울할 때 보는 풍경이 다르고, 달뜰 때 보는 풍경이 다르다. 쓸쓸할 때 보는 풍경이 다르고, 세상이 무너질 때 보는 풍경이 다르다. 풍경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데, 빗속에서 보는 풍경이 다르고, 시간이 느리게 흐를 때 보는 풍경이 다르다. 어둠이 세상을 삼킬 때도, 빛이 세상을 하얗게 지울 때도 풍경은 다르다. 하늘을 사각 프레임에 가둘 때, 실눈을 뜨고 볼 때, 스치면서 볼 때도 풍경은 다 다르다. 그렇게 풍경은 은유가 되고 추상이 된다. 풍경 속에 은유가 들어있고, 추상이 들어있다.
적층풍경. 풍경을 쌓는다는 의미도 있고, 무엇이든 쌓으면(그리고 쌓이면) 풍경이 된다는 의미도 있다. 시간을 쌓으면 시간의 풍경이 되고, 역사를 쌓으면 역사의 풍경이 된다. 기억이 쌓이면 기억의 풍경이 되고, 회한이 쌓이면 회한의 풍경이 된다. 작가도 그렇지만, 알고 보면 우리 모두 이런저런 풍경을 쌓는다. 삶이란 풍경이다. 삶이란 알고 보면 저마다 저만의 풍경을 쌓는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적층풍경은 작가 신중태의 주제이면서, 사실은 우리 모두 공유하고 공감할 만한 삶의 태도일 수 있다.
비록 작가 개인의 경험치에 연유한 것이지만, 작가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성을 얻고 있다고 해도 좋다. 작가가 찾아낸 그림에 대한 태도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삶의 태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여기서 풍경을 쌓는다는 것은 마치 집을 짓듯 풍경을 짓는다고 해도 좋다.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는데, 풍경을 언어의 한 경우로 이해하는 한에서(풍경에 숨은 뜻, 사실은 내가 투사한 풍경의 속뜻을 읽는 대상이란 점에서) 존재의 집을 짓는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그림을 빌려 저만의 풍경을 짓고, 존재의 집을 짓고 있었다. 추상풍경을 빌려, 그리고 적층풍경을 빌려 풍경을 확장 심화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저만의 풍경을 짓고 존재의 집을 짓는가. 그러므로 어떻게 풍경의 의미를, 그리고 풍경의 쓰임새를 확장하고 심화하는가. 작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 캔버스에 테이프를 친다. 다른 색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부분적으로 화면을 막는 것인데, 건축에서 벽을 치는 그러므로 벽을 세우는 행위에 비유해도 좋다. 그림에 따라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가로로 테이프를 치기도 하고, 가로와 세로가 교차하는 격자로 테이프를 치기도 한다. 이로써 화면에 각각 중첩된 가로 형태의 공간이 그리고 격자 형태의 공간이 구획되는데, 건축에서 공간을 나누는 기초공사에 해당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기초공사 그러므로 구조적인 작업이 완료되면 그 위에 모델링페이스트를 발라 올리고, 묽은 아크릴 물감으로 드리핑을 하고, 최종적으로 유화를 올린다. 그 과정에서 테이프를 치고 다시 치는 지난한 과정이 반복된다. 과정마다 차이가 있는데, 모델링페이스트는 무작위적으로, 아크릴 물감은 우연적으로, 그리고 최종에 해당하는 유화만큼은 칸칸이 나눠진 가로 혹은 격자의 방을 의식하면서 마치 점묘하듯 나이프로 하나하나 발라 올려 마무리한다. 대략적인 과정은 일정한 프로세스를 따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기계적인 적용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단계마다 감각이 매개되면서 조율하는, 우연과 필연이 상호작용하는 유기적인 과정으로 보면 되겠다.
여기서 모델링페이스트는 말할 것도 없이 우연한 질감을 얻기 위한 것이며, 드리핑에 의한 아크릴 물감의 비정형적인 얼룩은 우연한 흔적과 자국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모델링페이스트에 아크릴 물감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내는 속이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효과와도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반해 최종적으로 올라가는 유화 물감은 불투명한 성질로 인해 이런 반투명한 화면을 가두고 결정화하는 방처럼 보인다. 그렇게 화면은 층층이 가로진 방이, 그리고 가로 세로로 무한 확장되는 격자들의 방이 두드러져 보인다. 가로진 방 그리고 격자들의 방에 비정형의 얼룩을, 반투명한 알 수 없는 자국을 숨겨 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처럼 화면은 가로진 방과 격자들의 방으로 구조화되는 것인데, 그 방들의 집합이 풍경처럼 보인다. 첩첩한 들판처럼도 보이고, 아득하고 먼 평원처럼도 보이고, 가없는 평원 위에 아롱거리는 아지랑이처럼도 보이고, 하늘과 바다를 온통 벌겋게 달구는 노을처럼도 보이고, 빛과 수면이 희롱하는 물비늘처럼도 보인다. 중첩된 그리고 첩첩한 모나드들, 단자들, 방들로 인해 강조돼 보이는, 그 자체 색의 광학적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채집된 빛의 입자들이 그려 보이는 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그 자체 결정적인 풍경 그러므로 닫힌 풍경이라기보다는, 처음부터 추상화된 풍경이므로 다른 무엇으로 보아도 무방한 풍경이고, 열린 풍경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아득한, 먼, 첩첩한, 가없는, 열린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
아득한, 먼, 첩첩한, 가없는, 그리고 열린 풍경? 경계 위의 풍경이다. 실재하는 풍경이라기보다는 작가가 마음속에서 길어낸 심의적 풍경이고, 기억으로부터 소환한 기억풍경이다. 상실된 풍경이고, 돌이킬 수 없는 풍경이다. 그리운 풍경이고, 원형적인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앞서 작가의 그림에서는 가로진 방과 격자들의 방에 비정형의 얼룩을, 반투명한 알 수 없는 자국을 숨겨 놓고 있다고 했다. 그 얼룩들이, 그 자국들이 우연한 질감에, 우연한 흔적에 부합한다고도 했다. 마음이 그렇고, 특히 기억이 꼭 그렇지(얼룩처럼 우연하고 흔적처럼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작가는 빛의 단자들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방들을 매개로 아롱거리면서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리움이 아니라면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는 마음풍경을 그리고 기억풍경을 그려놓고 있었다.
좀 크다 싶은 화면에는 삼천 개가 넘는 방들이 있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 방들은 다 무엇인가. 풍경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있는가. 방들이 어우러져 풍경을 일군다면, 그렇게 풍경을 일구는 모나드 자체, 단자 자체, 방들 자체는 또한 무엇일 수 있는가. 그 자체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정체성의 방들, 정체성의 모나드들, 정체성의 단자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작가는 구조적인 정물과 구축적인 풍경으로 현대미술의 새 장을 연 세잔(구조주의자이면서 환원주의자이기도 한 세잔은 원통과 원뿔과 같은, 몇 안 되는 기하학적 구조로 세계가, 존재가, 사물 대상이 환원될 수 있다고 했다. 아마도 세잔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실제로 그런 그림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을 좋아한다고 했다. 세잔과 마찬가지의 구조적이고 구축적인 풍경의 추상화 버전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는 세잔 이후를 예비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적층풍경 그러므로 풍경을 쌓는 회화를 매개로 건축적인 레토릭이 회화와 만나는 접점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풍경을 쌓고 있었다. 자기 정체성의 집을 짓고 있었고, 그러므로 존재의 집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