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옥/ 존재의 지문, 존재의 증명을 그린
고충환 | 미술평론가
쓸다. 작가 양성옥은 대빗자루로 화선지를 쓴다. 그에게 화선지는 곧 마당이었다. 먹을 묻힌 대빗자루로 화선지를 쓸면서 사실은 자신을 쓸고 있었다. 자신의 번민, 자신의 회상, 자신의 후회, 자신의 추억, 자신의 욕망, 자신의 상념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무념무상의 상태로 자신을 비울 수는 있었지만, 존재가 지나간 자리, 존재가 지나가면서 남긴 자국, 지문과도 같고 증명과도 같은 존재의 흔적마저 지울 수는 없었다. 그에게 쓸기는 말하자면 존재를 지우면서, 동시에 존재의 흔적을, 존재의 지문을, 존재의 증명을 오롯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에게 쓸기는 이중적이다. 존재를 지우면서 증명하는 것이란 점에서 그렇고, 존재를 지우면서 존재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란 점에서 그렇다. 그렇게 그에게 쓸기는 지우면서 그리기를 의미했고, 지우는 행위를 통해 지워진 존재를 되불러오기를 의미했다. 존재의 증명을 의미했다.
만다라. 그리고 작가는 존재를 존재의 생명력과 동일시한다. 이런 동일시가 원형의 만다라로 나타난 도상학적 비전으로 승화했다. 주지하다시피 만다라는 우주의 운행과 섭리를 도해한 그림이다. 정해진 형식이 따로 없지만, 대개 원형의 도상학적 형태로 알려져 있다. 작가가 보기에 꽃도 원형이고, 컵도 원형이고, 화장품 뚜껑도 원형이고, 세상의 사물이 모두 원형이다. 원형의 만다라는 이렇듯 세상과의 닮은꼴에서도 유래하지만, 작가가 세계를 보는 관념에서도 비롯한다. 즉 원형의 만다라는 생과 사가 순환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아와 타의 구별이 없는, 나는 것이 있으면 드는 것이 있고 드는 것이 있으면 나는 것이 있는, 그렇게 드나름이 하나인 상태가 밑도 끝도 없이 무한 반복되는 존재의 꼴을, 생리를, 운동성을, 섭리를 표상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존재들 저마다의 만다라가 꽃이 되었고 별이 되었다, 내가 되었고 네가 되었다. 하늘이 되었고 땅이 되었다. 우주가 되었고 세계가 되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서 저마다 저만의 만다라를, 자기 존재와의 닮은꼴을, 자기 내면의 성좌를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텅 빈 사람. 그리고 여기에 텅 빈 사람들이 있다. 최소한의 간략한 붓질로만 그려 마치 반듯하게 서 있거나 엎어져 있는 빈 병처럼도 보이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텅 빈 사람들은 양가적이다. 수행하는 사람들, 수행을 통해 마침내 자기를 비우기에 이른 사람들, 그러므로 자기로부터 자유를 쟁취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림은 보기에 따라서 자기를 비우기에 실패한 사람들, 자기를 다 소진해 빈 병처럼 텅 비어버린 사람들, 공허한 사람들처럼도 보인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텅 빈 사람들을 그리면서 실제로도 텅 빈 사람들이라고 불렀을까. 작가는 혹 한편으로 텅 빈 사람 그러므로 자기를 비운 사람을 갈망하면서, 동시에 빈 병처럼 공허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을 그리고 명명한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자기의, 존재의 이중성이며 양가성을, 부조리한 존재를 그리고 명명해놓은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