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현/ 붉은 산수, 칠흑 같은 밤에 본
고충환 | 미술평론가
군 복무 시절, 나는 군사분계선 근처 전략지대에서 야간 보초를 서곤 했다. 그때마다 야간 투시경을 썼는데, 세상이 온통 붉게 보였다. 나무와 숲이 그렇게 멋지고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다.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한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하지만 절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풍경이었다. 더 이상 (그) 풍경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나는 그것을 그려야 했다.
- 작가의 말
붉은 산수. 사람들은 누구나 작가 이세현의 그림에서 화면을 온통 물들이고 있는 붉은색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작가의 그림을 특징짓는 요소가 여럿 있지만,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경우라고 해도 좋고, 그런 만큼 작가의 회화적 아이덴티티를 결정하는 개념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의 그림에서 붉은 산수의 개념은 다중적이고 함축적이다. 왜 붉은색인지, 어떤 붉은색인지, 그 붉은색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그러므로 붉은색의 형식과 내용은 뭔지, 그리고 여기에 왜 풍경이 아니고 산수인지, 산수는 풍경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 다름을 통해 작가의 그림은 어떤 의미와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지가 함축돼 있다. 작가의 그림을 해석하는 개념적 코드라고 해도 좋다.
여기에 작가는 그 붉은색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그 붉은색을 통해 어떤 풍경을 보았는지 말해준다. 우리가 작가의 그림에서 보는 풍경이기도 할 것이다. 붉은색 렌즈(필터 혹은 필름이라고 해도 좋을)를 통해 본 풍경이 멋지고 아름답게 보였다. 심미적 풍경이다. 평시에는 볼 수 없는 풍경이란 점에서 현재하면서 현재하지 않는(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이라고 해도 좋을) 풍경이다. 그리고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비현실적인(초현실적인, 이라고 해도 좋을) 풍경으로 보였다. 볼 수는 있지만(지켜보거나 훔쳐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내 것으로 거머쥘 수는 없는) 풍경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아름다운 풍경이 심미적 경험이라면,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풍경은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경험이다. 이처럼 작가가 붉은색 필터를 통해 본 풍경은 심미적이면서, 동시에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경험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져 있다.
그 층위 그러므로 붉은색의 의미론적 성분을 보면, 프로이트는 친근한 것(캐니)이 낯설어질 때(언캐니) 두려움이 생긴다고 했다. 평시의 풍경에 억압된 풍경이 겹쳐 보일 때, 유토피아에 디스토피아가 겹쳐 보일 때 풍경은 낯설어진다. 정치적 욕망이 억압된 채로 봉인된, 그래서 실재계의 돌발적인 출현을 예시할 때 풍경은 두려워진다(슬라보예 지젝). 여기서 캐니와 언캐니,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평시의 풍경과 억압된 풍경의 관계는 상호내포적이다. 언캐니는 캐니에,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에, 억압된 풍경은 평시 풍경에 이미 내장된 잠재적 본성이며, 그 역도 그렇다. 그리고 여기에 헤테로토피아(미셸 푸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없는데, 사람들의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관념적 풍경이다. 반면, 헤테로토피아는 실제로는 있는데, 사람들의 관념에서 지워진(잊힌) 풍경(장소)이다. 푸코는 군대, 감옥, 기숙사를, 그리고 특이하게도 휴양지를 헤테로토피아의 예로 든다. 그곳에서 사람들의 욕망은 억압된 채로 봉인되는데, 그러나 억압된 욕망은 없어지지 않고 호시탐탐 자기실현을 꿈꾼다. 여기서 푸코는 잠재적인 혁명의 가능성 그러므로 유토피아를 보고, 슬라보예 지젝은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 그러므로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렇게 작가는 혹 붉은색 필터를 통해서 평화로운 풍경에 억압된 채로 봉인된 정치적 욕망의 현장을 그리고 현실을 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서 작가가 본 비현실적인 풍경은 초현실적인 풍경이기도 할 것이라고 했다. 할 포스터는 초현실주의의 코드로 욕망과 아름다움 그리고 죽음을 들었는데, 작가가 본 풍경 그러므로 심미적인 풍경,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어쩌면 죽음을 예시하는) 풍경, 그리고 정치적 욕망이 억압된 풍경에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붉은색의 의미를 살폈다면, 이제 그 심미적 성분을 보자. 작가의 그림에서 붉은색은 색깔이라기보다는 빛깔에 가깝다. 마치 투명한 필름 위에 그린 것처럼 (반)투명한 빛의 기미를 포함하고 있다. 광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미술사에도 보면, 광학을 회화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현대미술의 장을 연 인상파가 있었다. 색을 빛으로 보고 빛 여하에 따라서 색이 그리고 형태가 결정된다고 본 것이다. 빛이 없으면 색도 형태도 없다고 본 것이다. 빛이 움직이므로(불안정하므로) 색도 형태도 움직인다고(불안정하다고) 본 것이다. 이로써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해체주의의 씨앗을 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아마도 불투명한 안료 탓에 빛깔(색깔이 아닌)의 회화적 재현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빛깔을 색깔로 환치할 수는 있어도, 빛깔이 색깔로 그리고 색깔이 빛깔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광학의 회화적 재현에 반쯤 성공한 경우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정작 광학은 어디서 오는가. 사진이다. 알다시피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 빛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왔다. 프린트된 사진보다는 필름 상태의 사진이나, 특히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 빛의 기미를 포함한 (반)투명한 성질의 빛깔(색깔)을 얻을 수 있다. 프린트된 사진 자체는 인쇄매체 시대의 메커니즘에 속하는 만큼 아직 본격적인 광학적 이미지를 실현하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예비단계로 보아야 하고, 이후 그 실현을 위해서는 스스로 빛을 내는 자기 발광 다이오드나 액정화면의 출현을 기다려야 했다.
발터 벤야민의 인쇄매체 시대의 예술과 전자매체 시대의 예술 개념에 착안한 것이지만, 여하튼 전자매체 시대 이후 비로소 빛의 기미를 내장한 빛깔(색깔)의 회화적 재현이 가능해진 것이고, 이로써 이전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색채감정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붉은색은 모니터를 통해 본, 스마트폰을 통해 본, 액정화면을 통해 본 이미지의 경험에 친근한, 그 자체 현저하게 현대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좋을, 세대 감정에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작가의 그림에서 붉은색이 그저 붉은색만이 아니라고 해도 좋고, 이로써 작가의 그림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 의문이 남는다. 작가의 그림은 액정화면이 아닌데, 어떻게 빛깔을 색깔로 그러므로 회화적으로 재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앞서 회화에 광학을 도입한 인상파의 시도가 절반의 성공에 머문 것도 불투명한 안료가 결정적인 이유라고 했다. 여기서 작가는 전통적인 먹그림에, 먹의 생리에 주목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아크릴도 유화도 불투명이다. 반면, 먹은 (반)투명이다(그렇다고 작가가 실제로 먹으로 그림을 그리지는 않는다). 아무리 짙은 어둠도 투명한 깊이를 내장하고 있다. 가장 허연 것에서 가장 짙은 먹색에 이르기까지 빛의 기미를 머금고 있는, 빛의 스펙트럼을 전개하고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주체 중심의 원근법 대신 탈주체적인 다시점을 적용한다. 모든 시점에서 본, 모든 방향에서 본 사물 대상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지만, 풍경과 풍경은 다만 고립된 섬과 섬처럼 평면의 화면 위를 떠다닐 뿐, 주렴처럼 그저 연결될 뿐, 주름처럼 잇대어져 있거나 연이어져 있을 뿐, 하나로 연속되면서 그 속에 깊이를 만드는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지는 못한다. 여기서 작가의 그림은 보는 그림에서 읽는 그림으로 전환된다. 한눈에 유기적인 전체를 보는 대신, 주유하고 소요하면서 보는, 파편화된 눈을 옮겨 다니면서 보는, 그렇게 풍경과 풍경의 사이를, 세목을 읽는 그림으로 전환되는 것인데, 전통적인 산수화 중 세로나 옆으로 긴, 그래서 말린 그림을 펼쳐보면서 읽는 두루마리 그림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산과 구름이, 정자와 등대가, 바닷가 마을의 가로등 불빛이, 농가와 길이, 밭이랑과 논이, 다리가, 바위산 위로 삐죽이 솟아난 등대가, 소나무와 정자가, 번개 치는 먹구름이, 영적 기운을 환기라도 하듯 회오리를 그리며 휘몰아치는 은하수가, 자욱한 포연이, 해골과 초상이, 촛불이, 군함이, 포탄이, 폐가가, 분단 현실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디엠지 풍경이, 작업실 근처의 임진강 풍경이, 사회적 사건이, 제주 4.3 사건이, 세월호가, 광주민주화운동이, 분단 현실이, 사회적 풍경이, 존재론적인 풍경이, 이데올로기적인 풍경이, 역사적인 풍경이, 연대기적인 풍경이, 기념비적인 풍경이, 인터넷 서핑을 통해 찾아낸 세상사의 단면들이, 그리고 삶과 죽음이 착종 된 그림이, 얼핏 논리적인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그림이, 가만히 보면 논리적인 개연성이 없지 않은 그림이, 그러므로 전혀 다른 방법으로 논리적인 개연성을 획득하는 그림이(질 들뢰즈는 창작 방법론으로, 그러므로 어느 정도 비평 방법론이기도 한 정신분열증적 분석을 예시하고 있다), 보는 그림과 읽는 그림을 하나로 통합한 그림이, 그렇게 읽는 그림을 다시 소환한 그림이 현실주의의 또 다른 용법을 열어놓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세목(재현적인)과 콜라주 한 것처럼 무중력의 화면 위에 부유하는 평면적인 화면(모더니즘적인)이 상충하면서 어우러지는 그림이 변형된 사실주의(그 자체 초현실주의에 잇대어져 있기도 한)를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붉은 산수를, 사실은 칠흑 같은 밤에 본 풍경이란 점에서 살짝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그려놓고 있었다. 있으면서 없는, 없으면서 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 풍경에는 고향도 있다. 어머니의 유골을 뿌려드린 바닷가 고향마을이, 어머니의 죽음 이후 삶과 죽음을 하나로 끌어안고 있던 아름다운 풍경이 도시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작가는 돌아갈 고향이 없다. 그렇게 작가는 고향을 상실했고, 유년을 상실했고, 자연을 상실했다. 그리고 그렇게 상실된 풍경을 그렸다. 여기서 고향의 상실은 그저 실재하는 지정학적 장소를 상실했다기보다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더 보편적인 상실감을 의미했고, 작가는 그 지극한 상실감을 그렸다.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상실의 병을 앓는 현대인의 징후와 증상을 그렸다.
그렇게 지금 작가는 Between Red에서 Beyond Red로 건너가고 있다. 그동안 기꺼운 사이에서, 자발적인 경계에서 너무 오래 방황했고 서성거렸다. 그렇게 구름처럼 흐르는, 변하는, 붙잡을 수 없는, 그래서 덧없는 경계로부터의 탈주를 예고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빨간색을 영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또 다른 차원을 여는, 그럼에도 여전히 빨간색의 또 다른 질감과 용법으로 열린 탈주를 예상해볼 수도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