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 부드러운 전이, 전치, 전복
고충환 | 미술평론가
여기에 실과 바늘이 있다. 실과 바늘이 있는 곳에 뜨개질도 있다. 작가는 실과 바늘로 뜨개질해 이런저런 형상을 만든다. 주렴을 만들고 해먹을 만든다. 그물을 만들고 원고지를 만든다. 때로 뜨개질 대신 잘게 자른 실 조각이 한데 모이거나 흩어진 풍경을 만든다. 하얗게 부서지면서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면서 남긴, 잔물결이 겹겹이 포개진, 하염없는, 가없는 풍경을 만든다. 실제로는 소리가 없지만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고, 실제로는 냄새가 없지만 파도 소리에 소금기가 묻어나는 것도 같다. 감각이 감각을 부르는, 감각과 감각이 서로 통하는 공감각을 실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소라 귀가 바닷소리를 듣는 장 콕토의 시에서처럼 파도 소리에 실려 온 아득한, 먼 전설 같은 이야기가 들릴 것도 같다. 원형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하고 먼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고, 원형적인 이미지라고 불렀다. 그렇게 작가가 실 조각으로 그려놓은 풍경이, 아니마의 우연한 발현이라고 해도 좋고, 차라리 그리움의 화신이라고 해도 좋을, 원초적인 이미지, 원형적인 이미지 앞에 서게 만든다.
이처럼 신화적인 서사를 불러일으키는 작업이 있는가 하면, 그 결이 사뭇 다른 작업도 있다. 모더니즘 서사를 다룬 작업이 그렇다. 작가는 미술사를 패러디하는데 솔 르윗과 칼 안드레의 미니멀리즘을, 그리고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를 패러디한다. 하나같이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정점으로 알려진 이즘이고 작가들이다. 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 패러다임은 환원주의와 개성의 소거 그리고 성적 중립지대로 함축된다. 회화의 경우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만으로 이미 회화라고 보는 것이고, 조각의 경우 양감과 질감과 물성만으로 이미 조각이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회화도 조각도 최소한의 형식요소로 환원되는 것인 만큼 거기에 작가의 창조적 개성이, 그리고 개성의 또 다른 한 발현이라고 해도 좋을 성적 정체성이 반영될 여지는 없다. 다만 가치중립적이고 중성적인 상황 논리가 있을 뿐. 그리고 그 상황 논리를 증언하는 무미건조한 오브제가 있을 뿐. 이를테면 최소한의 구조와 같은(도널드 저드). 그리고 여기에 즉자적 오브제와 연극성과 같은(마이클 프리드).
금욕주의를 표방한 것이면서, 동시에 남성 작가의 개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만큼 여성 작가의 성적 정체성을 위한 자리도 없다. 여성주의 시각에서 바로 이 지점이 문제시되는데, 중성적인 논리, 가치중립적인 논리 자체가 이미 사실상 남성 작가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논리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모더니즘을 패러디한 작가의 작업이 갖는 의미가 있고 의의가 있다. 알다시피 작가는 실을 소재로 작업을 한다. 실로 뜨개질하거나 잘게 자른 실 조각을 소재로 이런저런 형상을 만들고 풍경을 만든다. 그렇게 솔 르윗의 격자 패턴을, 칼 안드레의 바닥에 누운 철판 조각을,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을 뜨개질로 그리고 실뭉치로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거기에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배제했던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유혹적인 시선이 들어있고, 부드럽고 유기적이고 우호적인 촉감이 들어있고, 호흡이 들어있고, 아우라가 들어있고, 작가의 개성이 들어있다. 정서적 환기로 무미건조한 논리를 전복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부드러운 조각으로 조각을 고쳐 쓰거나 재정의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비록 작가가 처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로써 적어도 작가의 작업이 부드러운 전이, 전치, 전복의 계열에 입문하고 있다는 사실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지금까지 실에, 실로 만든 형상에 주목했다면, 바늘은 또 다른 가능성을 예시해준다. 바늘 자체가 이미 조각인데, 죽은 나뭇가지나 덩치가 좀 큰 경우에는 양팔을 둥글게 말면 겨우 안길만 한 나무 둥치를 소재로 바늘을 만든다. 사전에 정해진 틀에 맞춰 나무를 조각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 채집 상태 그대로를 살리는 편이다. 이를테면 껍질을 벗겨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데, 크랙과 결, 옹이와 뒤틀림과 같은 원형 그대로를 살리는 편이다. 여기에 귀가 있어서 바늘이 되고 조각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 바늘을 세우기 위해 조약돌을 받침대로 도입하는데, 여기서 조각은 설치작업으로 확장된다. 자연에서 채집한, 원형 그대로를 살린 것이란 점에서 자연조각이라고 해도 좋다. 자연의 생리에 부합한다는 점에서는 생태조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신화적인 서사, 모더니즘 서사, 여성주의 서사와 함께 생태주의 서사의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