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단원미술제 선정작가전 


고충환 | 미술평론가

단원 김홍도는 조선 시대 풍속화의 전형을 정립한 화가다. 국내 최초의 현실주의 화가였던 셈이다. 이런 화가의 현실주의 정신을 기려 1999년 시작된 단원미술제 선정작가전이 올해로 제25회를 맞았다. 올해 선정작가 공모에는 총 407인의 작가가 공모하였고, 그중 두 차례에 걸친 엄격한 심사를 통해서 총 11인의 작가가 선정되었다. 선정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전시 기간 중 실물 심사를 통해 대상 작가 1명을 최종 선정하는데, 총 3회에 걸친 심사를 진행하는 것이 된다. 회를 거듭할수록 신진작가 발굴보다는 선정작가들이 향후 한국현대미술을 이끌 중견작가로 성장하고 도약할 수 있는 유의미한 계기를 마련해주는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올해 전시 주제는 <여기, 무한대를 마주하다>로 정했다. 향후 작가들이 열게 될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에 주목하는 한편, 예술에 관한 한 사전에 정해진 형식도, 틀도, 규칙도 없다는 무한 자유 정신을 의미할 것이다. 형식을, 틀을, 규칙을 깨는 형식실험장이 되겠다는 주최 측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대상을 수상한 성필하 작가의 그림은 마른, 그 이면에서 재생을 예비하고 있는 이름 모를 잡초와 풀 더미를 보여준다. 풀 더미 속이나 언저리에 숨은 듯 작은 물웅덩이가 손에 잡힐 듯 섬세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죽은 듯 마른, 마구 엉킨 잡초들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생명의 원천일 것이다. 지리상으로 도시에도 자연에도 속하지 않는, 도시의 변방과 자연의 언저리, 도시와 자연이 물려 있는, 경계 위의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스치는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시간이 흐르지만, 흐르는 시간이 실감 되지 않는 정적인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멈춘 듯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저마다의 이름이 무색한 익명의, 무명의 와중에서도, 무심코 지나치는 와중에서도 저 홀로 피고 지는 생사 순환을 보여주는, 존재가 그런 것처럼 치열한, 쓸쓸한, 이름도 없는 것들을 그려놓고 있었다. 

노은영은 숲을 그린다. 그 숲에는 그림자 사람들이 산다. 그림자 소리가 산다. 그림자 사람들은 그림자답게 칠흑 같은 밤에 더 잘 보인다. 그림자 소리는 그림자답게 사위가 고요할 때 더 잘 들린다. 그렇게 적막한 숲속에 서면 그림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스러지는 사람들이 스러지면서 내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이 일서서면서 나는 소리가 들린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소리 또한 어떤가. 풍경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소리다. 풍경이 품고 있는 역사다. 시간이다. 풍경의 상처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는 빼곡한 돌 더미에서, 숲속에서, 나무 덤불에서 사람 형상의 실루엣을 본다. 사람의 그림자를 본다. 사람을 본다. 우연한 자연에서 사회적 징후를 보고, 사건을 보고, 감정을 본다. 그렇게 작가는 암시적인 숲, 은유적인 숲을 그려놓고 있었다. 

최혜연은 우연의 숲을 산책한다. 원초적인 숲이고, 원형적인 숲이라고 해도 좋다. 무의식적인 숲이고, 기억으로 소환된 숲, 기억 저편의 숲이라고 해도 좋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했고, 원형적 이미지라고 불렀다. 개념으로 규정되기 이전의 자연 자체, 존재 자체, 생 자체가 오롯해지는 날 것들의 이미지, 날 것 그대로의 이미지라고 해야 할까. 동물과 식물이 경계를 허물고, 의식과 무의식이 몸을 섞는, 규정된 것들이 개념으로부터 풀려나와 재설정되는 원형적인 극장이라고 해야 할까. 때로 악몽이 설핏 비집고 들어오기도 하는, 꿈의 극장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우연한 숲을 빌려 사실은 우연한 자기를 산책하고 있었다. 산책을 빌려 존재의 원형적인 이미지를 채집하고 있었다. 

신예진은 자연재생기구를 조형한다. 자연재생기구? 죽은 자연을 재생하는 기구? 여기에 죽은 나무가 있다. 그리고 스틸 파이프와 와이어, 내연기관 디젤 엔진과 부속과 같은, 한 눈에도 폐기된 공산품이 있다. 죽은 나무와 폐기된 그러므로 죽은 공산품을 하나로 조립해 죽은 나무 그러므로 죽은 자연을 재생시킨다는 프로젝트를 작가는 실행하고 있다. 죽은 것으로 또 다른 죽은 것을 재생한다는 점에서 무모해 보이기도 하는 그 실험이 생태 담론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인간의 이해관계에 의해 설정된 자연과 인간, 자연과 문명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것이 생태 담론의 핵심이다. 인간의 이해관계 밖에서 재설정되는 관계는 당연히 열린 관계일 수밖에 없고, 현재 이런저런 관계들이 형식실험 중이고, 작가의 프로젝트는 그 형식실험의 한 경우를 예시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김범준은 빛을 어둠 속 밝은 그림자라고 했다. 어둠이 품고 있는 그림자? 어둠이 자기를 내어주는 그림자? 빛의 기미를 빌려 겨우 자기를 내보이는 어둠의 실체? 작가는 그 어둠의 그림자가 보고 싶고, 그 실체가 보고 싶다. 빛이 아닌, 어둠이 보고 싶다. 빛을 빌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어둠에 겹쳐 보이는 무언가가 보고 싶다. 그게 뭔가. 기억 저편에서 건져 올린 희미한, 흐릿한, 애매하고 불분명한 채로 현재 위로 소환된 것일 것이다. 미니카와 캐릭터 같은, 상실된 유년으로부터 호출된 것일 것이다. 창문을 두드리는 나무 그림자에 겹쳐 보이는, 회상 같고 회한 같은 무엇일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원래 먼 것인데, 마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아우라 그러므로 분위기라고 불렀다. 그렇게 먼, 무언가일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먼 것을 호출하기 위해, 먼 것 그러므로 어둠에 겹쳐 보이는 것을 소환하기 위해 희미한, 흐릿한 빛의 기미를 들여놓았다. 

안종우는 사진이 처음 발명되던 당시, 회화적 분위기가 강한 사진 작업을 예시해준다. 카메라 루시다, 밝은 방, 빛이 그림을 그리는 방, 그러므로 빛이 그린 그림으로 정의되던 시절의 사진의 질감을 소환하고, 전자매체 이전 화학실험실을 방불케 하던 시절의 색감을 호출한다. 기억처럼 빛바래고 색바랜 질감의 이미지가 서정적 환기와 함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데, 새로운 모든 것이 빠르게 시간 속으로 흡수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무언가로 전이되는 것, 그것이 사물의 운명이라는 발터 벤야민의 전언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처음에 사진은 첨단이었다. 이런 첨단의 미디어로 사물의 운명도 그렇지만 자기 자신의 운명 그러므로 사진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그렇게 작가는 빛과의 화학작용에 의해 하나의 이미지가 생산되던 시절, 화학실험을 매개로 사물의, 어쩌면 존재의 운명을 환기하는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었다. 

한소희는 기억을 소환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작가가 소환하는 기억은 특히 공간적이다. 특정 공간과 관련한 기억을 소환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고, 공간이 기억을 소환하게 만드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는 공간 그러므로 특정 장소의 우편번호가 제목으로 매겨져 있어서, 그 자체 장소 특정성이 강한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공간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지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기억의 지도라고는 할 수가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자기만의 인식지도 그리기를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기억 지도든 인식지도(아니면 지각지도)든 처음에 지도에는 집과 담벼락 그리고 길과 같은, 알만한 모티브가 등록돼 있었지만, 기억이 그런 것처럼 점차 모호해지고 추상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추상적인 기억을 소환하는 방법을 제안한 것인데, 그렇게 소환된 기억 지도가 저마다의 기억을 대입해보게 만든다. 

김정옥은 수족관 속 물고기를 보여준다. 수족관 속 물고기에 빗대어 인간군상을,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일종의 알레고리를 그려놓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수족관 속 물고기는 빼곡하다. 불편하다. 부당하다. 물고기는 원래 바다에 산다. 그리고 지금은 수족관에 산다. 산다기보다는, 갇힌 삶을 산다. 바다의 표면적과 수족관의 표면적의 차이만큼 빼곡한, 불편한, 부당한, 갇힌 삶을 산다. 현대인의 삶 역시 자유의지와 자의식의 표면적과 사회적 관계와 제도적 틀의 표면적이 갖는 차이만큼 빼곡한, 불편한, 부당한, 갇힌 삶을 산다. 이처럼 불편 부당한 삶의 알레고리를 작가는 <미끄러운 문장들>이라고 부른다. 미끄러지는 문장이라고 해도 좋다. 소외와 불통을 의미한다고 해도 좋다. 내가 하는 말은 끝내 너에게 가닿지 못한다. 생각이라는 허공 속으로 흩어질 뿐. 혀끝에 맴돌 뿐. 끝내 발화되지 못한 채 입속에 삼켜질 뿐. 그렇게 미끄러지는 물고기들이 미끄러지는 말들을 상기시킨다. 

최은정은 기후변화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식물들을, 도래할 미래에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새로운 생존방식을 찾는 식물들의 기념비를 그린다. 기후 위기와 자연의 재설정을 테마로 한 것이란 점에서 생태 담론에도 맞물리는 부분이 있다. 그림은 기후 위기를 경고하는 것인 만큼 장엄하고, 식물들의 세계답게 화려하고,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 자기 변신을 시도하는 식물들이 그로테스크하다. 미래에는 화려한 몸짓으로 자기주장이 뚜렷한, 그러므로 자기 변신에 성공한 식물들만이 살아남는다는 뜻일까.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인, 열대우림을 떠올리게 만드는 식물들, 유기적인 화면과 충돌하거나 조화(부조화를 통한 조화?)하는 기하학적인 구조와 패턴들, 그리고 여기에 조화와 수석 같은 실물 오브제가 하나로 어우러진 화면이 회화를 넘어 설치회화를 예시해준다. 우연하고 무분별한 것들의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조합이 탈경계 이후 회화의 한 가능성을, 브리콜라주와 브리콜레르의 가능성을 예비하는 부분도 있다. 

강승혜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아이의 여정을 그렸다. 일종의 성장 서사, 그러므로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그리고 여기에 존재론적인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그림 속에 아이가 쪼그려 앉아있다. 그리고 그 위로 앵무새들이 아이를 내려본다. 학습 능력이 뛰어난 앵무새들이 아이에게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너무 많은 조언>을 하는 것인데, 나는 곧 타자다, 라는 랭보의 전언을 떠올리게 하고, 주체란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는 후기구조주의의 주체를 떠올리게도 된다. 그렇게 아이는 타자들로부터 송출된 너무 많은 조언을 들으면서 성장할 것이었다. 그렇게 그림 속에는 앵무새와 함께 비둘기와 이름 모를 새들이 등장한다. 나를 만드는, 나의 인격을 형성시켜줄 타자들이다. 새들을 타자에 빗댄 것이란 점에서 메타포가, 아이가 자기를 형성하는 과정을 서사로 함축한 것이란 점에서 알레고리가 전용되고 있는 점도, 이를 통해 서사를 확장하고 있는 점도 주목해볼 일이다. 

주형준은 소원 서사를 그린다. 아마도 소원을 성취해줄 마법의 반지가, 신성한 성배가, 먹구름을 찢는 장엄한 빛의 형상과 함께 내달리는 말이 소원의 상징적 도상으로 등장한다. 신화적이고 만화적인 느낌이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합치되면서 독특한 비전을 열어놓고 있다는 생각이다. 실제로도 신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만화가 없지 않고, 이로부터 자기만의 회화를 추상해낸 작가들도 있는 터여서 작가의 그림이 설득력이 있고, 이로써 작가만의 또 다른 회화적, 서사적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주지하다시피 신화는 이야기들의 이야기, 이야기들이 유래한 이야기, 이야기들의 원천, 원형적 이야기들의 보고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영화와 웹툰을 아우르는 서사적 장르가 보편화된 시대정신과 세대 감정을 반영하고 있는 점도, 이로써 회화를 확장하고 심화하고 다변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