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희/ 죽음을 염두 하는 삶, 식물에서 찾은 삶의 태도 


고충환 | 미술평론가

길을 걷다 보면 이름 모를 들풀들이 있다. 밟히는 줄도 모르고 밟히는 잡풀들이 있다.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 것들이다. 작가는 어느 날 문득 그 들풀들에, 잡풀들에 눈길이 갔다. 이름이 없지는 않을 것인데도 이름 없이 살아가는 들풀들이, 밟히는 줄도 모르고 밟히는 잡풀들이 꼭 저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저들만의 세상이 있을 것이지만 세상인심과 동떨어져서 살아가는 모습이, 존재가 저 자신의 모습을 닮았고 존재를 닮았다. 그래서 들풀들이 잃어버린 이름을 찾아주기로 했고, 잡풀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되찾아주기로 했다. 그러므로 그 기획은 잡풀들이 존재하는 이유를 되찾아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새삼 되새기는 기회도 될 것이었다. 들풀들에 기댄 것이지만, 잡풀들을 빌린 것이지만 이를 통해 정작 자기 자신을 묻는, 자기반성적인 작업이 될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것에서 미학적 가치가 열린다. 그렇게 비록 사사로운 일이지만,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름 없는 들풀들에, 밟히는 줄도 모르고 밟히는 잡풀들에, 있는 줄도 모른 채 있는 것들에 한 번쯤 자기를 동일시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게 작가는 들풀들을 채집하고 잡풀들을 채집했다. 광대나물, 붉은토끼풀, 강아지풀, 고들빼기, 금강아지풀, 금불초, 꽃범의꼬리, 끈끈이대나물, 만수국아재비, 민바랭이, 서양민들레 등등. 몇몇을 빼고는 대개 이름마저 생소한 것들이지만,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들이지만, 빨간 밑줄이 생성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름 그대로일 것이다.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의태적인, 그러므로 사람이 보거나 사는 꼴을 흉내 내 이름을 지은 것 같아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식물들을 채집했고, 하나하나 이름을 찾아주었다. 그렇게 채집하고 건조한, 표면을 커피로 염색한 오브제 그러므로 피사체를 반전시킨 사진을, 다크블루 바탕에 마치 엑스레이 필름을 통해서 보듯 네거티브 이미지로 인화 정착한 사진을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보통의 아날로그 사진에서는 네거티브 형태의 필름을 확대기를 통해 포지티브 이미지로 반전 표현하는 것이지만, 작가는 디지털 파일 형태의 포지티브 이미지를 포토샵을 통해 네커티브 이미지로 반전시켜 표현한 것이 다르다. 디지털을 이용하지만, 아날로그의 느낌을 살렸다고 해야 할까. 

최근 사진의 한 경향이지만, 이미지(화소) 중심의 사진이 결여하고 있는 질감과 물성을 빌려 회화적 분위기를 겨냥한 복고풍 스타일이라고 해도 좋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서 아날로그 방식으로 디지털을 묻는, 그리고 과정에서 파생되는 역설을 다루고 있는 사진이라고 해도 좋다. 주지하다시피 사진은 초기에 회화적 사진으로부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무슨 화학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허다한 실험들이 있었고, 그 실험의 많은 부분이 진화의 이름 아래 잊혔고, 그렇게 잊힌 실험들이 첨단을 구가하는 디지털 시대에 다시 불려 나오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해야 할까. 어쩌면 디지털이 주는 삭막한 시대이기에, 온갖 생생한 이미지가 눈을 피곤하게 만드는 시대이기에 오히려 역으로 사진이 태생적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빛이 그린 그림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화학실험실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회화적인 물성과 질감과 분위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물질적인 이미지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수집하고 채집하고 분류하는 분더카머(Wunderkammer)의 추억이, 유년 시절 어린 식물학자의 추억이 그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그런 시대 감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식물들에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싸우지 않고 순응하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고 그 사는 방법을 죽음을 염두 하는 삶이라고 불렀다. 왜 염려하는 삶이 아니고, 염두 하는 삶이라고 했을까. 염려하는 삶과 염두 하는 삶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죽음을 염두 하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아마도 죽음을 염려하는 삶, 그러므로 삶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멀리하는 삶이 아니고,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삶, 죽음을 삶처럼 모시고 사는 삶을 의미할 것이다. 죽음 자체만 놓고 본다면 바니타스 그러므로 무상한 삶의 또 다른 한 버전일 수도 있다. 공교롭게도 블루에는 우울한 기질을 의미하는 문명사적 배경이 있다. 다크블루. 블루가 깊다. 우울이 깊다. 작가가 삶을 들여다보는 색깔일지도 모르고, 깊이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