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재하는 죽음의 기호
이선영(미술평론가)
한동국이 그린 핵폭탄은 마치 예쁜 문구같이 생겼다. 그 도상은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나며, 여러 작품에서 빠지지 않는다. 숨은그림처럼 찾아내야 하지만 그것은 작품의 의미에 보이는/보이지 않는 중심이다. 어떤 광경이든 죽음의 씨앗이 심겨있는 것이다. 작가는 [핵폭탄 떨어지기 3초 전] 시리즈에 대해 ‘자연스레 맞이하는 죽음이 아닌 갑작스레 맞이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거창한 사색이 아니라, ‘삶이란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고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어쨌든 ‘3초 전’이니까 일상은 평온하다. 작품 [해수관음상](2023)에서 수평선을 마주한 불상은 평온의 대명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폭탄을 피하지 못한다. 작가는 폭탄을 화면 한쪽 구석이나 캔버스의 가장자리 등에 숨겨놓는다. 그가 그린 핵탄두는 터져서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 것이라는 예상을 비웃는 깔끔하게 포장된 상품같다.

숲바닥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자료의 출전은 춘천문화재단에 있음)

하기야 핵폭탄도 상품이다. 국가, 또는 국가에 상응하는 권력적 집단이 아니면 생산할 수도 소비할 수도 없는 고가의 상품이다. 잔인한 전쟁이 끊이지 않는 요즘의 상황을 보면서 전쟁은 빛/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삶/죽음처럼 운명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윤이라는 가치로 셈하는 현대사회에서 전쟁은 이미 편재한다. 가령 전쟁은 ‘죽음의 경제학’의 핵심에 있다. ‘소련 군인이 죽어야 경제가 산다...러시아의 데스노믹스’라는 제하의 뉴스(2024. 11. 24, YTN)는 현재 러시아의 전시 경제가 민간 경제를 압도하고 있다고 전한다. 지금까지 전쟁에서 사망한 러시아 병사는 60만 명이 넘는데, 월급이나 사망보상금을 받는 그들의 징집은 취업률 및 국가의 생산력으로 추산된다 것이다. 이른바 ‘데스노믹스’다. 또 다른 기사는 ‘월급 281만원·시민권에 혹해서 우크라 전 투입되는 예멘 남성들’(이데일리, 11.24)의 사연을 전한다.
개발도상국 때 우리나라가 월남에 파병한 것과 비슷하고,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인 북한이 남의 나라 전쟁에 용병을 보내는 것과 비슷하다. 무기 판매는 물론이고 전후의 복구사업을 위해 침을 삼키는 국가들에게 전쟁은 자원(생명 포함)의 무한한 파괴를 통한 생산 기회가 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를 통한 기회의 창출이라는 점에서 일상과 전쟁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동국의 주제가 그대로 제목인 작품 [핵폭탄 떨어지기 3초 전](2023)에서는 길고양이만 사는 폐가일지도 모르는 낡은 집 위에도 폭탄이 있다. 수도권 중심이 심화된 국면에서 지방은 점점 텅 비워져서 핵폭탄을 그저 확인 사살일지도 모른다. 작품 [산책로](2023)에서 자연스러운 능선과 대조되는 명확한 외곽선을 가진 폭탄은 인간의 생산물임이 강조된다. 원거리 타격이 가능한 폭탄은 대기권으로 재진입해서 목표물을 명중시킨다는 점에서, 기존의 재래식 무기와 달리 하늘에서 갑지기 떨어진 물신이다. 폭탄 또한 고가의 물건에 필연적인 물신숭배가 깔려 있다.


또한 그 속도가 엄청나서 피할 겨를도 없는 몇 초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속도도 무척 빨라서 한동국의 작품에 나타나는 식의 조합이 종종 뉴스로 보도되기도 한다. 미디어의 전쟁이라고 해서 발사된 폭탄을 발사대로 되감기를 할 수는 없다. 폭탄 눈 시선은 이제 특정 구역의 특정 인간만을 겨냥해 날아든다. 초현실적 광경은 현실의 일부였던 것이다. 폭탄과 아파트의 조합도 그렇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아파트는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 공간이며 일상의 무대다. 이렇게 밀집된 생태계라면 뭔가 터질 때 타격감과 도미노같은 연쇄반응이 클 것이다. 작품 [아파트](2023)는 지금은 더 이상 짓지 않는, 하지만 한 시기를 지배했던 복도식 아파트가 거의 기하추상회화 같은 느낌이다. 그곳을 타격하러 오는 폭탄의 모습은 무채색 톤의 수직/수평의 풍경이 극도의 고요함을 자아낸다. 그의 작품 속 로드킬 동물이 두 번 죽지 않듯, 폭탄이 아니더라도 이곳에서의 삶은 죽음과 비슷할지 모른다는 예감이다.
아파트, 병원, 학교 가릴 것 없이 민간인 거주지가 폭탄에 파괴되는 장면은 지난 몇 년 간 유럽과 중동 등지에서 벌어진 전쟁 장면에서 흔하게 나타난 바 있다. 위기를 통해 연명하는 정권은 전쟁을 불러들인다. 흑/백을 분명히 하려는 대결의 정치학은 전쟁의 불똥이 언제 튈지 모를 불안감을 준다. 아파트 시리즈는 정면이 포착되어 더 추상적이다. 아파트라는 대규모 주거단지는 이미 추상이다. 그 안팎에서의 삶도 무채색처럼 획일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아파트의 한 구역을 딱 떼어낸 듯한 컨테이너형 구조물인 [곳](2024)은 명암대비가 극적인 장소에 안정감 있게 서 있다. 그곳은 작가의 작업실이 있는 곳으로 동료 작가들의 작업광경이나 작품, 물건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다. 그 좋은 장소가 내년에는 사라질 것이라는 ‘폭탄같은’ 소식이 작가로 하여금 예술의 온기가 곧 사라질 곳을 서둘러 기록하게 했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폭탄 수색견처럼 숨겨진 폭탄을 잘 찾아내야 한다.

La molestia, incluso eso, 2024

Bäckerei müller, 2024
여행은 일상을 벗어나는 시공간이지만 그것의 지속이다. 대개 일상이 파괴되지 않은 이들이 일상이 파괴되지 않은 장소로 관광을 간다. 작품 [La molestia, incluso eso](2024)는 스페인으로 간 가족 여행의 사진을 참조한 작품으로, 화난 표정의 중년 여성은 풍경처럼 구름이 잔뜩 끼었다. 여행 가서 흔히 있는 의견 다툼이지만, 이러한 불편한 상황조차도 언젠가는 슬픈 기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가족의 죽음에서 트라우마를 입은 작가는 미리 그 상황을 예견하면서 정신적 예방접종을 한다. 관광객과 같이 등장하는 길목에 잔뜩 주차된 차들은 얼마 전 대홍수 때 다 떠내려갔을 것이다. 작품 [Bäckerei Müller](2024)은 한국 사람이라면 유난히 집착한다는 맛집 기행이다. 먹는 것은 삶의 중요한 국면으로, 그것의 파괴는 가장 직접적인 박탈감을 줄 수 있다. 여행지에서 지역의 유명 빵집을 소개받는 가족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죽음의 신은 방문한다.
빵집 창문에는 사선으로 돌진하고 있는 미사일이 어김없이 보인다. 풍경을 주도하는 것은 일상의 습속과 질서이며, 그것을 깨는 침입자는 3초 후에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섬광] 시리즈는 폭탄이 터진 몇 초 후의 상황과 관련되지만, 여기에서도 작가는 난장판이 되기 직전의 모습으로 고정시킨다. 하얗게 처리된 그의 섬광은 큰 충격을 받았을 때 머릿속이 하예지는 듯한 경험과도 유사하다. 섬광으로 주변의 것들이 하얗게 휘발되는 듯한 모습은 목탄으로 가능한 가장 극적인 장면 아닐까. 핵폭발 이후의 섬광과 유사한 현실적 체험으로는 그가 그리기도 했던 로드킬 당한 동물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예견하고 과거를 기억하는 존재에게 오래 끌지 않는 죽음은 어쩌면 불행 중 다행일 수도 있다. 전쟁같은 경쟁으로 점철된 일상 도처에 편재하는 죽음을 기록하는 것은 검은 목탄이다. 한동국은 자신의 주요 매체인 목탄에 대해 ‘단순하고 명료하다.’는 장점을 든다.

아파트, 2024

현관문, 2022
또한 죽음이 깔려있는 작품 내용과 ‘숯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사람을 화장시킬 때와’ 닮았음을 지적한다. 캔버스 천 위에 목탄으로 작업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여러 번 칠해서 생기는 블랙의 깊이는 죽음의 심연과 닿아있다. 흑백 사진과도 같은 무채색 톤의 화면에서 다른 색은 아주 조금만 포인트로 사용된다. 강한 중력 때문에 한 줄기 빛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블랙은 블랙홀을 떠올리며, 섬광은 생명이 견딜 수 없는 밀도와 강도로 빛을 내뿜는다. 극적인 명암의 교차지만 둘 다 묵시록적이다. 존 하비는 [블랙 패션의 문화사]에서 검은색과 가장 오래 결합된 것은 죽음, 슬픔, 죽음의 공포라고 말한다. 그래서 블랙은 조문객들이 입는 색이 되었다. 블랙이 가지는 묵직한 힘은 그 색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밀접하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화학적 물감이 나오기 전의 블랙은 자연적 재료를 철 냄비에 태워서 나오는 진한 검정 분말을 통해서 였다고 말한다.
한동국이 목탄에서 화장(火葬)을 생각했듯이 말이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부패한 고기는 검게 변하듯이 모든것은 검정으로 끝난다.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는 검정 옷을 입고 있다고 하면서 검정은 ‘힘과 권력, 죽음의 색’이라고 말한다. 블랙과 대조되는 화이트는 밤과 낮, 빛과 어둠의 대조이다. 에바 헬러에 의하면 많은 언어에서 흰색과 점정은 밝음과 어두움, 낮과 밤을 구별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겨난 이름이다. 한동국의 작품에서 섬광 속 일상의 이런저런 모습은 흐릿해진 배경 탓인지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심지어는 튀어나온 듯 보인다. 섬광은 모든 존재를 그것이 있는 자리로부터 급격하게 이탈시킬 것이다. 그래서 순간의 정지는 더욱 긴박하다. 작가는 섬광 시리즈에 대해 ‘내게 있어 소중했던 순간들이 폭탄의 섬광을 맞이하는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듯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곳, 2024

섬광 속 대화, 2024
[섬광 속 빵집 소개](2024)는 핵폭탄의 결과가 일상을 이루던 모든 것들을 하얗게 지울 것임을 말한다. 그밖에 지상의 마지막 불꽃놀이의 장으로 산책부터 전시 관람까지, 놀이부터 지인과의 대화까지 이른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빛일 섬광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지되지 않는다. 섬광이라는 맥락 속에서 가능한 모든 소소한 일상은 그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한동국의 작품 속 문처럼 블랙/화이트 홀같은 통로는 치명적인 사건이 터지는 경계가 된다. 작품 [문](2024)에서 문의 유리 부분에 비치는 미사일은 수직/수평/곡선으로 이루어진 일상의 안정성을 다른 단계로 진입시킬 것이다. 현관문 시리즈는 할아버지의 자살을 목격한 충격과 관련된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후 나는 한동안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못하게’ 된 작가에게 ‘현관문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자 통로가’ 되었다. 2022년의 [현관문] 시리즈에는 검게 칠해진 문은 거의 평면적으로 보이고, 그 밖의 기구들인 오래된 초인종이나 손잡이 등은 재현에 충실한 점이 특이하다.
문은 초인종이나 손잡이 등의 작동 상관없이 관객의 시선을 저 너머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비상구 시리즈는 갑작스러운 사고 발생에 대응하여 죽음을 피하기 위한 통로지만, 그 결과가 낙관적일지는 미지수다. 폭탄은 무조건 도망이라는 1차원적 반응을 야기한다. 폭력은 인간과 삶을 단순하게 만든다. 작품 [비상문](2023)은 다른 작품에서 보이는 비상구 마크 아래의 문이다. 자세히 그려진 손잡이를 제외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주 저편의 심연으로 열려 있는 문일 수도 있다. 최근에도 많이 그린 생과 사의 경계인 문은 아파트나 고시원 등 촘촘한 밀도를 가진 건물에서 많이 보인다. 깨지기 직전의 평온을 강조하기 위해서 정면이라는 정적인 구도를 자주 사용하는 그에게 냉장고같은 일상의 사물도 문 시리즈처럼 나타난다. 냉장고의 경우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인 ‘문’이다. 하지만 작품 [냉장고](2024)에서 식구들의 끼니를 걱정해서 이것저것 메모가 붙은 냉장고 근처에도 어김없이 미사일이 내려오고 있다.
출전; 예술소통공간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