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없는 깊이

 

이선영(미술평론가)


윤형근과 최병소는 자신의 방식을 일관되게 실행하면서 실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채색 톤의 차분하고 묵직한 분위기의 추상은 기본 요소의 확정과 그 조합의 결과다. 윤형근은 캔버스 위에 큰 붓으로 몇 번 그의 선들로 만든 면을, 최병소는 종이(신문, 잡지 등) 위에 펜과 연필로 수없이 긋는 선이 만든 면을 보여준다. 하나는 배어들 듯, 다른 하나는 마치 바탕을 거의 뒤덮어 밀봉 내지는 방수 처리가 된 듯한 대조적인 느낌이다. 후자는 잔잔히 스미지 않고 세게 튕겨낸다. 전자는 형과 형의 경계면에서 리넨 천의 올이 보일 정도지만, 후자에서 화면의 바탕인 종이는 감춰져 있어 잡지 일부가 드러나 겨우 그것이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캔버스와 물감이라는 매체를 존중하지만, 후자에서 매체는 원래의 기대를 저버린다. 종이 위에 볼펜이라는 조합은 읽기로 귀결되곤 하는데, 배경이 없는 선들은 조명 없는 어둠 속에서처럼 무분별해진다. 읽을 수 없는 매체는 극히 불투명하다. 




Yun Hyong Keun 20호,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1999년, Oil on linen, 72.7x50cm



윤형근의 작품은 미묘하게 번지는 경계가 특징이며, 최병소는 바탕이 일어날 정도의 강도와 밀도가 만들어내는 광물질적 표면이 특징이다. 두 작가가 만들어내는 면은 추상화의 문법이 된 평면성에 근접한다. 서사가 배제된, 또는 불확실한 그들의 작품 제목 또한 건조하고 중성적이다. 윤형근은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라는 작품의 색조를, 최병소는 [Untitled–일련번호]로 표기한다. 색은 숫자보다는 감성적으로 다가온다. 볼펜 드로잉의 바탕 면인 종이나 잡지의 일부가 드러나는 최병소나 배경과 사각형 비슷한 형태의 관계가 남아있는 윤형근의 작품은 완전한 평면은 아니다. 평면적 화면은 최소의 획(선), 또는 최대의 획(선)으로 만들어진다. 붓질이 드러나지 않는 윤형근의 작품이나 셀 수 없는 최병소의 작품은 N번의 선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의 작품은 선으로 만들어진 면이지 선에서 한 차원이 늘어난 기하학적 차원의 면이 아니다. 그들의 화면이 된 캔버스나 종이와의 질적으로 다른 면이 그 위에서 펼쳐진다. 


수 없는 볼펜 자국으로 뒤덮인 최병소의 작품은 표면을 강조한다. 표면이 훼손되어 들려 일어나 생겨난 입체감은 견고한 3차원적 대상이 아니라, 표면을 더욱 강조한다. 광물질적 표면이 벗겨져 아래의 피하층이 드러난다면 그것을 윤형근의 작품 같은 표면이 아닐까. 둘은 얇은 표면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깊이가 있다. 깊이 없는 깊이라는 역설이다. 관객은 그들의 작품에서 표면과 그 이면이 만들어내는 깊이, 즉 표면의 깊이를 관조하게 된다.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과 각을 세우는 미학은 이전 시대의 깊이를 표면으로 대체한다. 하나의 표면이든 중층적인 표면이든 탈 근대의 미학은 깊이를 형이상학이나 재현주의와 관련시킨다. 포스트 모더니즘 이론가 이합 핫산에 의하면, 깊이의 거부는 자연이나 문화에 침투하는 해석학의 거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이합 핫산이 인용하는 바에 의하면, 현대의 작품은 ‘리비도적 표면’(리오따르)이다. 




Choi Byung So, 0210828 Untitled, 2021년, Magazine, Ballpoint Pen, pencil, 18.3x25.5cm



표면에의 탐닉은 포토리얼리즘이나 팝아트 같이 형태가 분명히 나타나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가령 포토리얼리즘에서 사적인 미묘한 반사면의 강조는 매우 평면적이다.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한 앤디 와홀의 예술적 행적도 깊이/표면, 중심/주변의 관계를 해체한다. 후기구조주의나 텍스트 이론 또한 깊이의 조건인 구조나 의미를 상대화한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대중문화가 예술처럼 자기참조적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미디어가 자율화되었기 때문이다. 장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이러한 자율성은 미디어가 실제적인 사물을, 세계, 준거틀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호에서 다른 기호로 어떤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어떤 소비자에서 다른 소비자를 차례로 지시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기의가 소멸됨으로써, 기표가 동어반복되고 스스로 기의가 됨으로써 기표만 눈에 띠게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 리오따르는 [리비도의 경제]에서 현실 세계를 덧없는 거대한 얇은 껍질과 비교했다. 


니이체가 말한 가면 속의 얼굴이 없듯이 껍질 내부는 없다. 뫼비우스 띠와 같이 깊이도 없이 어디에나 편재하는 이 거대한 얇은 껍질은 모든 모순적인 것들이 공존하고, 논리적이고 자기당착이고 앞뒤, 아래위, 안팎이 구별되지 않은 거대한 표면이라는 것이다. 리얼리즘에 반대하여 ‘누보로망’을 주창한 로브그리예가 말한 바 있듯이, 우리 주위에 있는 세계는 의미도 영혼도 가치도 없는 반들거리는 표면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이는 또한 ‘포스트 모더니즘적 기술의 숭고함’이기도 하며, ‘전세계적이고 다국적이며, 탈중심적인 거대한 통신망의 지도를 그릴 수 없는 인간 내부의 무능력’(프레드릭 제임슨)을 지시하기도 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논리]에서 이론의 영역에서도, 본질과 형상에 관한 변증법적 모델, 잠복과 현시 또는 억압에 관한 프로이트적 모델, 진지함과 진지하지 않음에 관한 실존주의적 모델, 기표와 기의의 기호학적 대립 등의 심층모델이 표면, 혹은 복합적인 표면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Yun Hyong Keun 25호,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1999년, Oil on linen, 80.5x60.8cm



Yun Hyong Keun, 100호, Burnt umber & Ultramarine blue, 1992-1993년, Oil on linen, 130x162cm



Choi Byung So, 0200817 Untitled, 2020, Paper, Ballpointpen, Pencil, 118x83cm


Choi Byung So, 0221104 Untitled, 2022, Magazine, ballpoint pen, pencil, 23.5x18.5cm



윤형근의 작품에서 암갈색 톤의 오래 묵은 색감은 붓질을 통한 시간성은 아니다. 필획들은 평평한 면에 통합되어 있다. 배경과의 경계는 물감의 번짐을 통해 흐려진다. 짙은 밀도의 무엇인가가 서서히 번져나가는 순간이다. 물리 화학적 법칙은 서로 다른 밀도가 균질해지는 흐름을 말하지만, 그의 작품 속 시간은 매우 느릿해서 스며들 듯 전염되듯 소통된다. 재현적이지 않은 작품은 형식적 요소를 통해 이야기한다. 한 화면에 넓은 띠가 하나가 있는가 둘이 있는가에 따라 관객의 상상력은 다르게 작동할 수 있다. 하나면 존재, 둘이면 관계하는 식으로 말이다. 크기가 다른 면이 근접해 있는 작품들은 연인이나 모자 관계를 떠올린다. 가장자리의 번짐이 두 존재를 이어준다. 최병소의 작품에서 시간에 대한 암시는 TIME, LIFE 같은 단어를 노출시키는 지점부터 그자체가 시간의 흐름인 드로잉의 궤적에 나타나 있다. 강하게 그어진 선들에는 속도감이 느껴진다. 관객은 촉촉하게 적셔오는 윤형근의 느릿한 시간과 최병소의 급물살을 타는 듯한 시간성을 비교할 수 있다.



출전; 데이트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