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라는 디딤대 위에서
이선영(미술평론가)
윤철규의 ‘인생은 즐거워’ 전은 현실과 희망 사이에 있다. 별빛을 가득 품은 거대한 나무처럼 자신의 뿌리가 있는 곳과 머리 위를 매개한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와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며 작품화하지만, 그것의 기계적인 반영을 넘어서 또 다른 차원을 표현한다. ‘인생은 즐거워’라는 전시부제는 현실이 즐거울 수만은 없지만,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작가는 이 부제가 역설적 표현이라고 한다. 일종의 희망고문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처한 삶에 또 다른 차원을 상상할 수 없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예술은 직접적 현실과 상상 사이의 완충지대에 존재한다. 그가 화가이기 때문에 이 또 다른 차원은 기저의 삶을 찬란하게 불태울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두터운 표면 질감으로 깊은 원근법을 구사해서 대지나 하늘의 비중이 크고, 풍경 속 인물이 홀로 가는 골목길에도 넉넉한 맥락을 부여한다. 대자연이라는 맥락은 대도시에서는 이미 사라져가는 비전이다.

고층빌딩을 24시간 밝히고 있는 미디어파사드는 윤철규의 작품에 등장하곤 하는 별빛 달빛 가득한 하늘을 희미하게 한다. 그의 그림 속 야트막한 건물을 줄지어 있는 지방의 소도시 풍경 속에서 지나가는 사람은 늘 한 명이다. 지나치게 밝은 가로등만이 행인의 행적을 바라볼 뿐이다. 도시의 경우 가로등에는 대부분 CCTV가 설치되어 있으니 기계가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대도시에 가득한 인파 또한 그 고독함이 윤철규의 작품 속 인간에 못지않다. 많음 가운데 없음보다는 한 명이라도 확실한 존재감이다. 이는 그의 작품에 아직 인간적 온기가 남아있음을 알려준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풍경은 대부분 그 주변에 있다. 그 지역 사람이면 알 수 있는 명소인 ‘치명자산, 초록 바위, 전동성당, 전주천, 기린봉, 모악산’ 등이 배경이거나 주인공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동네의 골목길 풍경과 사진으로 치면 줌 아웃한 듯한 거시적 풍경으로 나뉜다. 그리고 미시/거시 풍경을 이어줄 이야기를 이끄는 인간이 등장한다.
하늘과 대지를 포함한 광활한 비전을 품은 작품은 숭고미에 호소한다. 골목길 풍경은 급격한 원근법으로 그려져서 나른하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에 속도감과 긴장감을 주었다.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 사람을 그린 [완산동]은 골목길에는 대부분 한 사람이 걷고 있고 가로등만 쌩한 분위기다. 가로등 외에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소변 보는 남자를 그린 [완산동에서], 급격한 원근법 언덕길을 홀로 올라가는 남자를 그린 [장승배기에서], 고개를 떨구고 피곤한 발길을 옮기는 남자를 그린 [늦은 귀가]에서 가파른 길, 인적 없음, 가로등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특히 가로등의 표현은 현대사회에서 인간보다 더 존재감을 발휘하는 사물의 위상을 보여준다. 장소명이 작품명으로 드러나는 등, 실제 장면에 바탕하지만, 작가는 이 상태를 피곤하고 고독한 현대인의 여로로 전형화시켰다. 작품 [아버지의 10월]은 연로하신 아버지가 저 멀리 가는 뒷모습을 그린 것으로, 급격한 원근법은 불편한 거동을 더욱 강조한다.



낡은 건물들이 있는 텅 빈 거리에서 화면 앞으로 걸어오는 사람이 보이는 [서학동]은 따스한 분위기다. 작품 [사는 거 별거 있던가]는 이례적으로 복수의 인물이 등장한다. 여흥을 즐기고 밤늦게 귀가하는 두 남자는 하늘에 많은 비중을 많이 둔 원근법으로, 심란함과 위트가 함께 한다. 그의 작품에서 빠지지 않는 밝은 가로등은 때로 눈을 찔러올 듯 강렬하며, 소시민적 삶의 무대를 조명한다. 인물은 골목 내부로 더 침투한 시점이다. 특히 그의 작품 속 인물은 음식이나 술 등을 먹고 있는 모습이 많다. 지상적 삶의 필수인 먹는 행위는 코믹하면서도 경건하다. 맛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SNS에 흔히 등장하듯이 예쁘고 값비싼 먹을 거리를 두고 자랑하듯 포즈를 취하는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이 인물들의 대사는 [뭘 더 바라랴]부터 [인생은 즐거워]까지, 생명을 유지하는데 기본적인 욕구를 긍정하면서도 다소간 풍자적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 인간들은 결코 자연적 욕구에 머물지 않는다.
식사 장면처럼 화면에 한사람이 가득 포착된 [모두가 희망입니다] 시리즈는 인물의 배 부분에 위인을 품고 있다. 겉으로의 풍요와 안정 속에서 양극화된 우리 사회에서 따스한 음식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반주를 곁들여 맛있게 밥을 먹는 남자부터 국밥 한그릇을 앞에 두고 기도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상황 속에서 포만감이라는 일차원적 욕구와 함께 가지고 가야 하는 무언가를 일깨운다. 작품 [바라고 바라다]는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묵직한 임파스토 기법으로 표현되었다. 급격한 원근법으로 다소간 긴장감 있는 동네 풍경과 달리, 자연은 보다 안정감 있다. 대자연의 풍경은 사람이 안보일 정도로 멀찍이서 포착되어, 문명의 낡은 세트장에 한 두명만 있는 고독함을 일소한다. 전라도의 유명한 모악산을 배경으로 하는 밤은 한 지역을 넘어선 우주적 풍경으로 다가온다. 별빛이 쏟아지는 [모악 별밤]에서 문명의 비중은 매우 적다. 사람 사는 곳은 화면 아래켠에 빛나는 몇 개의 띠들로 나타날 뿐이다.



모악산 위로 뜬 보름달을 그린 [모악의 달]은 그 비중과 밝기가 거의 태양 수준이다. 달은 주변을 고요하게 비추기보다는 그자체의 존재감으로 타오른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빛나는 별들을 그린 [초록 바위 별 밤]은 문명의 밤을 밝히는 인공광원을 압도하는 빛이 쏟아진다. 대자연의 캔버스인 하늘에서 일어나는 웅대한 사건이 펼쳐져 있는 [평화동에서]에서, 문명은 그 아래에 조그맣게 자리잡는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숭고미에 호소한다. 리오타르의 [숭고의 미학(The Sublimity)]에 의하면, 숭고와 관련된 대상은 초감성적 영역의 징표이다. 숭고는 대상의 형식이 현존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사고, 즉 대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의 현존을 대상에서 느끼는 것이다. 숭고는 재현적 아름다움을 벗어나는 추상 미술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지만, 그것은 너무 멀리 나아간다. 초현실로 비약하기 위해서는 디딤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현실이다.
그러한 디딤대를 통해 관객은 별과 달의 세계까지 이른다. 보이는 두 영역 간의 비약은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암시한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숭고한 감정은 미적인 것의 극단적인 경우이다. 취미와 대조하여, 숭고는 긍정과 부정 사이에 번갈아 일어나는 정서로, 미와 숭고 간의 차이점은 대상의 한정된 특성과 무한정한 특성 간의 차이다. [숭고의 미학]에 의하면 항상 형식에 의존하는 예술적 제시에 의해 절대적인 것을 증명하는 것, 이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를 보여주는 것이 숭고이다. 미학자들이 유한/무한의 대조법 속에서 미와 구별시킨 숭고는 윤철규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급격한 원근법과도 관련된다. 안 쉬르제는 [서양 무대 장식 기술의 역사]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원근법을 무한이라는 개념과 연관시킨다. 무한소실점은 초월과 관련된다. 르네상스에 체계화된 원근법은 안정된 세계상을 위한 재현적 장치였지만, 이 장치에 내재한 무한소실점은 현대미술에서 다른 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20세기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도기에 뭉크나 반 고흐, 데 기리코의 작품 속에 잠재된 깊은 원근법은 보이는 세계를 안정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안과 고독, 초월과 신비의 표현으로 변형된다. 윤철규의 ‘인생은 즐거워’에는 즐겁지만은 않은 현실과 그에 대한 초월이 공존한다. 대자연이 아니라 골목길이나 인근 자연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작품 [동문거리에서]는 평범한 골목길 풍경에 긴장감을 주는 붉은 하늘은 사건의 전야처럼 타오른다. 빛을 가득 받는 물살을 그린 [싸전다리에서] 소소한 일상사를 초월하는 보다 거시적인 시공간감이 표현된다. 그러한 대자연에서는 인간보다는 자연과 더 가까운 존재들이 잘 어울릴지 모른다. 넓은 들판을 자유롭게 다니는 개 두 마리가 있는 [금구에서]는 대지와 하늘 사이의 작은 집과 나무가 두 거시 세계를 결속시키고, 작품 [중바위 산이 보이는 풍경]에서 거대한 자연은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마을을 품어주는 듯하다.
출전; 전북특별자치도립미술관 서울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