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분통이 터져 미칠 지경인데, 어떻게 입을 봉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인가? … 내가 일생 동안 단 한 가지만이라도 선행을 했다면, 나는 그걸 내 영혼으로부터 후회할 것이다!”

시작 시간에 맞게 도착하려 퇴근 후 바삐 찾은 한 소극장에서 체념하는 한 인간상을 보았다. 위 말은 셰익스피어의 첫 비극으로 알려진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아론의 마지막 대사이다. 왕비의 정부, 아론은 물리적 폭력보다 선동과 모함, 위증과 사기를 통해 가장 잔인한 범죄를 주도한다. 로마가 배경인 이 고전극에서 주인공, 전쟁영웅 안드로니커스와 그의 가문은 아론을 포함한 등장인물 대부분과 함께 공멸해간다. 극을 보기 하루 전날 ‘계엄 사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복수와 분노로 가득한 극이 평상시보다 더 나와 우리 사회의 일처럼 섬뜩하게 다가왔다. 이 연장선 상에서 금속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이 가득했던 전시가 떠올랐다.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공연 사진, 2024 ⓒ 신성호

지난 10월에 전시장에서 들렸던 타자기 소리로 가득했던《를를를: 침묵하는 시대》(2024.10.16-10.30, pier contemporary)가 그것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역사적 기록의 진실성 부재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작업을 진행해 온 미디어아티스트 심철웅(1958- )의 개인전이었다. 전시장에 들어설 때 ‘탁, 탁, 탁’ 선명한 타자기 소리에 감각이 곤두섰다. 전시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를를를’은 그 난해함으로 한국 근대기, 일제강점을 비롯한 시대의 억압 속에 발표되었던 해체주의 관점으로 해석되는 시를 떠올리기도 한다. ‘를’은 문법의 품사 개념으로 보면 목적격 조사로 “영화(명사)를(조사) 보다(동사)”처럼 문장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단독으로 사용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이를 “침묵하는 시대”라는 부제, 작가의 작품 경향과 함께 고려하여 보면, 전시장을 가득 채운 ‘를’은 오히려 죽은 이의 이름을 거듭 부르는 것처럼 그 부재를 강조하는 것이 된다. 전시는 수많은 파편이 완성된 문장을 이루지 못하여 많은 기호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침묵하게 된 시대를 표상한다.

《심철웅: 를를를》 전시 전경, 2024

“다시는 광주사태와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모국의 슬픈 소식은 타국에 사는 이민자들에게도 커다란 파동을 줍니다. 계엄령이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나라를 이끌어 가는 분들이 그 중요성과 무게를 잊었나 하고 정신적 혼동이 왔던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업무 이메일이었음에도 한 작가는 위와 같이 다음날 안부를 물어왔다. 대통령의 담화문 속 의도에 공감하느냐의 여부를 떠나, ‘계엄 사태’가 다수 국민과 외신에게 엄혹했던 한국의 1960-1980년대의 군사독재를 떠올리게 했으며, 국제관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이 실추되는 요소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분노의 표출 방식 중 잘못된 것도 있다. 이 사태의 원인제공자들의 출신학교에 폭언을 쏟아붓는 행태이다. 졸업한 지 40년이 더 된 졸업생으로 인해 어린 재학생이 피해를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서두의 극 마지막에 이르러서 안드로니커스는 복수에 성공하여 원수들을 척살하지만, 분노에 사로잡혀 원수들에 의해 불구가 되어 버린 자신의 딸도 충동적으로 죽이고 만다. 이 행동은 그가 아들들을 전쟁터에서 잃으면서까지 국가를 숭상하고 시민들이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에도 선왕의 아들이 왕이 되도록 양보하여 명예를 지켰던 것을 배경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고결한 의지가 끝내 음모로 인해 시민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렸을 때 극에 달한 국가와 자신에 대한 분노가 딸에게까지 표출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주인공과 대척점에 선 아론은 마지막 심판의 시간에 진실을 말할테니 자신의 사생아만은 살려달라고 심판자의 신에게 하는 맹세를 받아낸다. 이로써 마지막 문장은 분노와 체념을 가장한 희생으로까지 들린다. 모순으로 가득한 상황 속에서 나에게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인물은 아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