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봉, 춤추는 선, 몸적인, 회화적인, 음악적인
제24회 이인성 미술상 수상 작가전. 대구미술관
고충환 | 미술평론가
예술에 대한 정의가 지워졌다고 상상해보자. 회화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고 가정해보자. 예술에 관한 한, 회화에 관한 한 의식의 영도지점(현상학)에 서 있다고, 기관 없는 신체(질 들뢰즈)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예술과 회화의 정의가 문명의 결과로 알려진 만큼, 문명 이전의 예술과 회화의 처음 상태를 가정해보자. 그때 하는 행위, 그때 그리는 끄적거림으로 예술이 겨우 정의되고 최초의 회화가 생성한다고 생각해보자. 가정을 전제로 그 행위는 아마도 원초적인 행위가 될 것이고, 그 끄적거림은 원형적인 그리기가 될 것이다. 자기반성적인 행위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 그러므로 삶에 주어진 시간을 헤아리는 자기 강박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로만 오팔카). 그리고 의미 없는 끄적거림이, 무의미한 낙서가 될 것이다(사이 톰블리, 현대미술작가 중 권오봉이 유일하게 동반자로 인정하고 있는).
권오봉은 자신의 그림이 낙서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원초적인 그리기, 원형적인 그리기, 의미 없는 그리기, 막 그리기, 반무의식적인 그리기를 매개로 한 그의 낙서 회화는 문명 이전의 회화, 그러므로 회화의 태생을 묻는 심각함이 있고, 시니컬이 있고, 진지함이 있다. 현대미술과 관련한 담론을 뒤로하는 강단이 있다. 비록 유희와 놀이를 매개로 한 것이지만(호이징하는 유희와 놀이에서 문명이 비롯했다고 본다. 그리고 실러는 유희충동에서 감성과 이성을 통합하는 제3의 능력을 본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은 놀이에도 규칙이 있다고 했다), 사실은 문명 이전을 묻는다는 점에서, 감성과 이성 이전의 몸을 묻는다는 점에서, 규칙 이전의 몸의 우연한 발현을 묻는다는 점에서 유희와 놀이를 넘어서는 역설이 있다.
몸을 묻는다? 몸의 우연한 발현을 묻는다? 아마도 생명력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분출과 자기실현을 의미할 것이다. 사실, 몸의 발현에 대한 부합성으로 치자면 미술보다 음악이 더 가깝다. 음악은 어떤 매개도 없이 몸에 직접 작용한다. 리듬이 그렇고, 노래(아니면, 소리)가 그렇고, 춤이 그렇다. 그러므로 정통미학에서 음악을 진정한 예술로 친 것도,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음악을 추상적인 예술로 본 것(그러므로 아마도 추상미술에도 부합한다고 본)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어쩌면 몸의 본성을 매개로 한, 그러므로 생명력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분출과 바이오리듬을 매개로 한 음악성의 미술 버전이며 회화 버전이라고 해도 좋다. 그만큼 음악성과 통하는 회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다. 몸의 본성 그러므로 몸성과 음악성과 회화성이 어떤 경계도 없이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원초적인 그리기,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의 발현을 증거 하는 몸적인 그리기, 그 자체 리듬(몸이 저절로 체득하고 있는, 어쩌면 생득적이라고 해도 좋을 바이오리듬)을 타는 음악 아니면 춤적인 그리기는 정작 작가의 그림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외관상 작가의 그림은 무의미한 낙서를 연상시킨다. 트랙터로 마구 파헤쳐진 객토 된 논밭을 상기시키고, 터실터실한 회벽을 손바닥으로 쓸고 지나갈 때 손끝에 감촉돼오던 감각의 추억을 상기시키고, 누구와 누구는 연애한대요, 와 같은 치기 어린 낙서로부터 보고 싶다, 와 같은 제법 성숙한 문자와 기호로 덧칠된 화장실 낙서를 상기시키고, 집과 자동차와 같은 알만한 형태를 축약해 그린 어린아이의 그림을 상기시키고, 흙바닥이나 모래밭에 꼬챙이로 끄적거리던 의미 없는 그림을 상기시키고, 뻘쭘할 때 뭘 그린다는 의식도 없이 보지도 않고 그렸던, 그렇게 공책을 온통 시커멓게 만든 낙서를 상기시킨다.
미술사로 치자면 추상표현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액션페인팅을 떠올리게 하고, 드로잉을 떠올리게 만든다. 흔히 드로잉은 그림에 대한 구상 그러므로 머릿속 그림(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미술관)을 의미하지만, 작가의 그림에서 드로잉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온다. 의식 이전의 그림이라는 말이다. 의식 이전의 그림? 무의식이다. 능동적인 그리기보다는 수동적인 그리기, 의식적인 그리기 대신 무의식적인 그리기에 가깝다.
그러므로 다시, 작가의 그림은 미술사적으로 액션페인팅의 몸 그림에 연동되고,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마치 받아쓰기라도 하듯 저절로 그려지는), 자유연상 기법(그 의미가 열려있는), 그리고 의식의 흐름 기법(두서없는 그리기, 밑도 끝도 없는 그리기)에 연동된다. 초현실주의가 무의식에 연동된 심리주의에 경도돼 있다면, 작가의 그림은 순수한 그리기에 연동된 몸의 흔적 그러므로 행위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 대해서는 회화를 질료로 한 행위예술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캘리그래피 그러므로 서체의 변용을 떠올리게 만든다. 뭘 쓴다는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의 필선과 필획 자체의 우연한 발현과 자기실현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모든 미술사적 성과를 소화해 자기만의 형식으로 다시 게워내는 부분이 있다. 조르주 바타이유의 잉여와 모르스 블랑쇼의 바깥(회화의 바깥)을 공략하는 부분이 있다. 잉여? 바깥? 아직 회화에 미지의 영역이 남아있는가. 아직 발굴되지 않은 감각적인 부분이 있는가. 작가는 무의식적인 그리기, 막 그리기를 통해 어쩌면 그런, 회화의, 감각의 처녀지를 공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회화에, 감각에 그런, 미지의 영역이 아직 남아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그러므로 어쩌면 무분별한, 보기에 따라서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는, 그래서 오히려 의미가 있는 그 기획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회화에 대한 정의에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회화란 매번 재현 불가능한 일회적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질 들뢰즈라면 매 순간 비로소 존재하는 생성회화라고 했을. 그리고 차이를 만드는 반복이라고도 했을.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무의식적 그리기, 막 그리기는 우선은 회화의 관성에 반하는 것에서, 그렇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감각의 잉여를 발굴하는 것에서, 회화의 바깥을 향해 문을 열어젖히는 것에서 당위성을 찾는다. 이를테면 작가는 붓 대신 빗자루, 꼬챙이, 마대 걸레, 헝겊, 칼, 못, 갈고리, 주걱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그리는데, 사실상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도구가 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회화의 관성을 타파하기 위해서다.
여기서 회화의 관성은 동시에 손의 관성, 감각의 관성, 그리고 여기에 눈의 관성에도 연동되고, 그러므로 관성을 타파하는 작가의 그리기는 우선은 감각적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리기와는 거리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자체 몸의 본성에 부합한다는 점에서는 감각적 쾌감을 다시 회복한다. 부자연을 매개로 자연을 추구하고, 불협화를 통한 협화를 지향한다고 해야 할까(자연도 관성이고, 협화도 관성이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드로잉이 현저한 그림은 물론이거니와 일전의 오브제 설치미술과 일부 개념미술(각 그림의 위아래를, 컬러를, 그리고 여기에 그림은 다만 그림일 뿐, 사랑은 그저 사랑일 뿐이라는 텍스트를 영문자로 표기한)마저도 이런 부자연과 불협화를 위한 형식실험으로 보이고, 무의식적인 그리기와 막 그리기의 일부처럼 보인다. 다시, 들뢰즈로 치자면 생성회화의 전조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 분청자기가 있다. 전통적으로 청자는 귀족의 예술로, 백자는 선비의 예술로, 그리고 분청은 서민의 예술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만큼 분청은 격이 없고 품이 없다. 격이 없고 품이 없다는 것은 자유분방하다는 말과도 같다. 전통미술 중 자유분방한 경우로 치자면 민화와 분청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진즉에 현대미술을, 고도의 추상회화를 예비하고 있었던 경우라고도 생각된다. 분청에는 각 박지(상감과 역상감), 귀얄, 덤벙 기법이 알려져 있는데, 작가의 그림에서 이런 기법이, 기법의 회화적 변용이 엿보인다. 정색하고 그 형식을, 기법을 차용했다기보다는 그림의 회화적 질감에, 심성에, 분위기에 상동성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마구 긋기, 되는대로 그리기, 형식도 없이 그리기가 재차 격을 얻고 품을 얻는, 그렇게 회화적 성취를 얻고 있는 경우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외관상 마구 그리고 되는대로 그린 것 같지만, 그 와중에서도 아마도 작가가 찾아낸 최소한의 형식이 있고 룰이 있다. 바탕화면을 검은색과 같은 어두운색으로 칠하고 그 위에 밝은 색깔을 올린다. 그리고 덧칠된 색이 채 마르기도 전에 꼬챙이와 같은 이런저런 도구로 마구 긁고, 긋고, 그린다. 그렇게 화면 속에 숨은 색이 선으로, 드로잉으로, 낙서로, 행위의 흔적으로 표면화되고 전면화한다. 칠흑 같은 어둠 그러므로 원래 심연의, 침묵의, 무의식의, 카오스의 일부였던 선을, 기호를, 행위의 흔적을, 생명의 리듬을,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을, 몸말을, 혼잣말을, 미처 의미를 얻지 못한 선의미를, 그리고 여기에 원형적인 이미지를 마치 혼을 부르는 무당처럼 그림 위로, 현실 위로 불러내고 있다고 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