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영, 삶의 다섯 가지 질문
제16회 김종영 미술상 수상 기념전. 김종영미술관



고충환 | 미술평론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수없이 많은 인연을 가지고 관계를 맺어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관계를 통해서 다시(그러므로 매번)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혼자라는 사실에 불안감을 가질 것이고, 그 불안감에서 작업이 나오게 될 것이다. (작가 노트) 
 

사진이 떨어진다. 천둥 치는 소리를 내며 사진이 벽에서 무너져내린다. 그리고 한 사람이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떨어진 사진을 다시 붙인다. 무너져내린 사진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사진이 다시 떨어진다. 한 사람이 다시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떨어진 사진을 다시 붙인다. 그리고 다시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반복된다. 같은 사람이다. 사진 안에도 내가 있고, 사진 밖에도 내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 영상을 보는 내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사진 속에 있는가. 사진 밖에 있는가. 아니면 영상 밖에서 영상을 보고 있는가. 

여기서 작가는 정체성 문제를 묻는다. 버거운 삶의 문제를 묻는다. 나는 내가 버겁다. 실물 크기 그대로의 사진 속 나는 중량도, 그러므로 삶의 무게도 그대로다. 그렇게 무너져내린 사진을 매번 다시 일으켜 세우는, 그러므로 무너져내리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나는 내가 힘에 부친다. 그리고 지인들이 작업에 동참했다. 그렇게 영상 속 사람들이 무너져내리는 자신을 매번 다시 일으켜 세우는 행위를 반복해 보여준다. 이 작업을 하면서 작가는 시시포스의 형벌을 떠올렸다고 했다. 삶의 메타포다. 삶은 매번, 다시, 무너져내리고, 일으켜 세우고, 무너져내리고, 일으켜 세우는, 밑도 끝도 없는 반복 행위의 연속으로 지속된다. 차라리, 오히려, 겨우, 지탱된다고 해야 할까. 

작가는 이 작업을 1999년, 문화예술위원회 주최로 뉴욕에서 1년간 P.S.1 국제레지던시에 초대를 받아 참여했을 때 처음 선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때 그대로 재연했다. 그렇게 그때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가 서로 마주 보게 했다. 부재의 문제를 묻고, 시간의 문제를 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르헤스는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내가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상황을 소설에서 그린 적이 있다. 먼발치서 지켜보고, 서로 스치기도 하지만 끝내 만나지는 않는. 

그때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 사이에는 무수한 자기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중 나는 어디에 있고, 있었는가. 여기서 롤랑 바르트의 너무 많이 고쳐 쓴 나머지 마침내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을 떠올리게 된다. 양피지 위에 나는 누구라고 쓴다. 그리고 지운다. 지우고 다시 쓴다. 그렇게 쓰고 지우기를 밑도 끝도 없이 반복한다. 그렇게 마침내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위에는 다만 나에 대한 희미한 흔적만 남는다. 그러므로, 나는 흔적이다. 나는 부재다(지워진 나). 나는 존재(기록된 나)다. 어쩌면 나는 존재와 부재 사이를 떠도는 희미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작가는 그때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를 대면시켜 그 사이를 떠도는 자기의 희미한 흔적을 붙잡으려는 안타까운, 어쩌면 불가능한, 어쩌면 부질없는, 그래서 오히려 의미가 있는 기획을 시도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자기 정체성을 묻는 작가의 작업은 정체성과 정체성이 충돌하고 부침하는, 사회적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이며 현장이라고 해도 좋을, 타자를 매개로 한, 관계의 문제로 확대 재생산된다. 여기에 이름들이 비처럼 흘러내린다. 영화가 끝날 때 제작진 이름이 화면에 뜨는 엔딩크래딧의 형식을 차용한 작업이다. 영화에서 엔딩크래딧이 아래에서 위로 이름들이 올라간다면, 작가의 작업에서는 이름들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 쌓이면서 사라지는 것이 다른 점이다. 그렇게 이름들이 밑도 끝도 없이 흘러내리고, 쌓이고, 사라진다. 이 이름들은 다 무엇인가. 작가가 평소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다. 여러 형식으로 작가의 삶에 영향을 주고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작가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사람들이다. 

여기서 다시, 작가는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랭보는 내가 신이고, 악마고, 타자라고 했다. 그리고 후기구조주의는 주체란 이질적인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라고 했다. 그때그때 주어진, 매 순간 맞닥트리는 상황과 맥락이 매번 다른 주체를(그리고 의미를) 낳는다고도 했다. 상황이 주체를 낳고, 맥락이 의미를 결정한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예수는 미친 사람 속에 군대가 있다고 했다. 미친 사람에 대한 비유를 빼면, 그러므로 미친 사람을 일반화하면 후기구조주의의 주체와 일치한다. 어쩌면 다만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모두 약간씩 미친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미친 사람은 그 자체 예술가적 자질을 의미하기도 하는, 질 들뢰즈의 정신분열증적 주체와도 통한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 삶에 영향을 준 사람들, 자기 인격을 형성시켜준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한다. 사람들의 이름을 매개로 자기 정체성을 묻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이름을 매개로 한 또 다른 버전의 작업이 있다. 파벽돌에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넣은, 마치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명패와도 같은 작업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파벽돌을 쌓아 벽을 만들거나 바닥에 깔아 길을 만든다. 멀쩡한 벽돌이 아니라 파벽돌인 것은 삶에 대한 시간을 함축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 자체 삶의 질감을 표상한다고 해야 할까. 이처럼 사람들의 이름을 매개로 한 작업은 앞으로도 어떤 관계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므로, 그렇게 어떤 다른 이름이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등록될지 모를 일이므로, 그 자체 비결정적인 상태로 열려 있는 현재진행형의 작업이다. 

정체성과 정체성이 부침하고 충돌하면서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를 매개로 사회가 유래한다. 그렇게 정체성을 묻는 작가의 작업은 타자와의 관계를 넘어 사회적 현실에 대한 비판과 풍자의 형태로 표출된다. 여기에 기울어진 땅이 있다. 그리고 그 땅을 좌대 삼아 그 위에 낡은 나무 의자 여섯 개가, 그리고 긴 지팡이 하나가 놓여 있다. 의자는 마치 사람들이 뭔가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기울어져 있고, 지팡이는 넘어지는 극적 순간을 증언이라도 하듯 한쪽이 들려 헛되이 허공을 찌르고 있다. 비록 부분적으로 다리를 잃은, 그렇게 기능을 상실한 의자이지만, 의외로 의자와 지팡이의 표면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정교한 자개로 마감 처리돼 있다. 낡은 의자와 화려한 표면이 대비되는, 한눈에도 불안정해 보이는, 그렇게 극적 상황을 연출한 것처럼도 보이는 이 작업은 무엇인가. 

상황극인가. 사물극인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성경 구절에 착안해 그린 피터 브뤼겔의 원작을 차용하고 각색한 작업이라고 했다. 주지하다시피 브뤼겔은 당대의 풍자화가로 유명했고, 작가는 아마도 브뤼겔의 현실 비판적인 관점에 공감했고, 그렇게 암울한 시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비록 속절없는 세월이 흐른 뒤지만, 지금의 시대 감정과도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현실이 놀랍다. 낡은 의자와 화려한 표면은 또한 어떤가. 정작 속이 썩어 문드러진 줄도 모르고 마냥 외양과 남들 보기에만 급급해하는 현실을,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눈먼 현실에 기꺼이(?) 발목 잡힌 부조리한 삶을 극적 상황 논리로 풀어낸 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피터 븨뤼겔의 원작에 나타난 시대정신을 오마주한 것인데, 또 다른 작업으로 바벨탑이 있다. 역시 성경 구절에 착안한 작업이다. 우리가 협력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자.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협력해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았다. 그리고 진노한 하나님이 탑을 허물면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해 흩어지게 했다. 여기서 작가는 인류 최초의 언어사적 사건을 본다. 그리고 거대한 스피커 탑을 쌓아 말과 말이 충돌하고 언어와 언어가 부닥치는 말들의 탑을, 언어의 탑을, 바벨탑을 만들었다. 스피커에 소리를 입혀 소리의 탑을 만든 것이다. 이 작업으로 작가는 2023년 송도국제도시에 개관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전시에 초대를 받아 호평을 받기도 했다. 작가가 제작한 단일 조형물로는 그 규모가 가장 큰 이 스피커 탑은 소리를 매개로 소통을 꾀한다는 점에서 소리예술(사운드아트)로 정의되며, 주로 일상으로부터 채집한 소리를 매질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존 케이지를 중심으로 한 환경음파와도 통한다. 

한편으로 이 작업은 어떤 소리를 입히느냐에 따라 자가 변신이 가능한 점이 특징으로 사람들의 말을 입히면 광장 조각이 되고, 새소리 물소리와 같은 자연에서 채집한 소리를 입히면 명상 조각이 된다. 이런 명상의 계기가 통해서일까. 작가는 국내 최초로 현대미술과 박물관 전시가 하나로 결합 된 융복합 전시를 성사하기도 한다. 창령사 터에서 발굴된 오백나한을 소재로 한 전시로서, 2018년 국립춘천박물관을 시작으로,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을 거쳐, 한호 수교 60주년에 해당하는 2021년에는 호주 시드니 파워하우스박물관으로 이어진 일련의 순회 전시가 그렇다. 박물관은 일종의 시간의 집이고, 여기에 현대미술이 개입해 잠자는 유물을 일깨워준, 그렇게 전시 관행을 바꿔놓은 사건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엄마가 죽었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죽었을 때, 특히 어른이 죽었을 때 죽었다고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돌아갔다? 원래 존재가 유래한 곳으로,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 원래의 집으로 되돌아갔다는 말일 것이다. 이에 비해 보면 정작 삶은 임시적인 거처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잠시 잠깐 지금의 삶이라는 꼴을 덧입고 사는 임시방편의 집이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생물학적 개념이고, 돌아갔다는 말은 문명사적 개념이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문명을 영위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생사가 순환하는 삶을 믿는, 윤회를 믿고 싶은 인간 고유의 개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생전 어머니의 유품을 평소 써오신 아버지의 일기(아버지는 지금도 일기를 쓴다고 했다)와 함께 태웠다. 그리고 겨우내 작업실을 데웠던 땔감에서 나온 재를 한데 모아 길을 만들었다. 생전 어머니가 걸어오신 길일 것이다. 삶의 메타포가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이 길인 만큼(예컨대 로드무비) 존재 일반으로 확대해도 좋고, 그렇게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재는 죽음을 상징하고(화장), 비통한 마음을 상징하고(사람들은 재를 뒤집어쓰는 것으로 슬픔을 표현했다), 재생을 상징한다(특히 안젤름 키퍼). 

그렇게 생전 어머니의 삶이 새까맣게 타 재가 되었고 재의 길이 되었다. 길게 이어진 재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길 끝에 불에 타 새까맣게 숯이 된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마치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기라도 하듯 길을 보고 앉아있다. 그런데 왜 하나가 아닌 두 개인가. 두 개의 불에 탄 의자가 마치 하나인 양 놓여 있는데, 하나의 의자가 다른 의자에 살짝 기대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했다. 아버지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한 어머니지만 그래도 믿고 의지하는 노부부의 연을, 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의자 위에는 조명이 있어서 그 밑쪽 뒤편으로 그림자가 생기는데, 그림자가 마치 門(문) 같고 間(사이) 같다. 인연을 의미하고, 새로운 문을 열고 들어간(나온) 어머니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렇게 작가는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불에 타 새까맣게 숯이 된 의자를, 속이 비쳐 보이는 투명유리 의자를, 그리고 철 의자를 바쳤다. 생전에 어머니는 시장에서 포장마차를 했고, 철제 자리 안에 데운 물을 넣어 추위를 견딘 것에 착안했다고 한다. 사람 체온과 같은 37도를 유지하고 있는 칠이 벗겨진 빨간 철 의자에 작가가 앉으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체취를 느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앉으면 인간관계를 유지 시켜주는 온기(그러므로 위로)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박스 형태의 자리에 물을 넣은 유리 의자에는 물과 함께 가족사진을 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진 속 이미지가 흐릿해진다. 생전 어머니와 함께한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다가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그렇게 가족이, 존재가, 세상이 사라지고 마는 믿을 수 없는 기억을, 무상한 삶을, 시간의 폭력을, 살아있는 사진의 생리(이미지는 살아있다)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에 영상이 있다. 생전에 어머니가 죽음을 선고받은 후 작가는 당장 집을 이사해 어머니를 모셨다. 그리고 노부부가 산책하는 길에 동행했는데, 영상은 산속으로 난 길을 향해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평소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거나 나란히 걷던 것과는 달리 아버지를 앞질러 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신이 먼저 간다는 것을 예견했던 것일까. 그렇게 노부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영상은 계속된다. 존재가 사라진 뒤에도 자연은 계속된다. 내가 사라진 이후에도 세상은 계속된다. 사라진다기보다는 돌아간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작가는 임종 순간 어머니의 심전도 그래프 그대로 자수로 수놓았다. 생전에 어머니는 당신이 죽을 때 사용할 수의를 마련해 놓았고, 세로로 좁고 긴 그 수의 위에 생전에 어머니가 가장 좋아한 보라색 실로 마치 한 숨 한 숨 숨을 쉬듯 한 땀 한 땀 수놓았다. 근 한 달 내내, 아마도 작가가 심정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시기를 함께 통과해온 이 작업은 그러므로 망자의 호흡을, 숨결을, 생명을 물화 된 형식으로 옮겨놓은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육화된 혼이라고 해야 할까. 혼을 박제한 작업인 만큼 혼이 깃든 물건이며, 영적 오브제, 그러므로 신성한 오브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망자를 위한 전시를 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이번에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는 어쩌면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바치는 전시, 망자를 오마주하는 전시라고 해도 좋다. 프로이트는 상실감을 매개로 애도와 우울(멜랑콜리)이 결정된다고 했다. 상실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상실감에 사로 잡혀있을 때 우울이 되고, 상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애도가 된다. 그러므로 작가는 지금 어쩌면 망자에게 바치는 전시를 통해 긴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와 애도의 희미한 빛(그러므로 승화)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 결은 좀 다르지만, 알브레히트 뒤러가 예술가를 우울한 기질을 타고난 자에 비유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그러므로 어쩌면 예술가란 애도와 우울 사이에서 존재를 연민하는 자(예컨대 작가의 작품 중 우는 부처, 그리고 롤랑 바르트의 마망)로 정의해도 좋고, 작가 김승영은 바로 그 정의를 몸소 실천하고 실현하는 작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예술은 질문의 기술이다. 작가는 삶을 묻고, 죽음을 묻고, 존재를 묻고, 정체성을 묻고, 관계를 묻는다. 신이 죽고, 형이상학이 죽고, 거대 담론이 죽고, 비극이 죽은 가벼운 시대에 던진 질문이기에 다소 무거운 작가의 물음은 오히려 그 울림이 더 크게, 더 묵직하게,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